소설리스트

136화 (136/214)
  • “말도 안 돼…….”

    현규하가 머리를 싸매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날카롭고 긴 것이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주인님의 가녀린 옥체에 쑤셔 박히다니…….”

    “저기요.”

    “아기처럼 보들보들하고 여린 주인님의 피부가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무참하게 쑤시는 저 흉측한 게 너무나 원망스럽네요……. 나도 저 정도로는 못 박아 봤는데……. 부럽, 아차 그만 본심이. 당장이라도 저 흉물을 뜯어 버려야만…….”

    “일부러 그런 워딩 쓰는 거 맞죠”

    현규하의 헛소리에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인유신은 창피해서 얼굴을 빨갛게 붉혔고 권성길도 짜증을 내면서 타투 머신을 껐다. 동석한 프리랜서 힐러는 어색하게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

    오레이칼코스를 문신으로 새기는 시술을 하기 위해 권성길의 공방에 들른 참이었다. 꼴랑 손바닥만 한 문신을 새기는데 힐러까지 고용해서 데리고 온 거로도 모자라 주둥이로 염병을 떨어 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권성길로서도 이런 진상은 처음이었다.

    결국 권성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술실 문을 가리켰다.

    “현규하, 너 나가.”

    “나만 따돌리고 주인님과 셋이서 은밀하게 뭘 하려는 속셈이죠……”

    “너 때문에 신경 흐트러져서 네 주인님의 귀한 몸에 실수하는 꼴 보고 싶지 않거든 당장 나가!”

    등짝을 걷어차여서 쫓겨난 현규하가 밖에서 문을 벅벅 긁어 대는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형님, 죄송해요.”

    “에휴, 유신이 네가 욕본다.”

    권성길의 안쓰러워하는 시선에 어째서인지 눈물이 찔끔 났다.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훼방만 놓던 현규하가 제거되자 시술은 빠르게 끝났다. 힐러가 빠르게 힐을 해 준 덕인지 아프지도 않았다.

    부기까지 깨끗하게 가라앉은 어깨의 타투를 본 현규하의 표정엔 서글픔이 어렸다.

    “주인님의 백옥처럼 고운 피부에 상처가 생긴 건 몹시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어째서일까요. 주인님이 선택한 디자인이 7이라는 걸 알게 되자 마치 싸우다가 버프를 받은 것처럼 흥분돼서 그만 설…….”

    인유신은 다른 사람들이 듣기 전에 급히 양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현규하가 혀로 손바닥을 할짝 핥는 바람에 비명을 끄악 질렀다. 어쨌든 그날 저녁은 피를 철철 흘렸다는 이유로 한우를 포식했다.

    두 개의 아티팩트도 넓어진 아공간에 무사히 넣을 수 있었다. 당장은 마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쓸모가 있으면 좋겠다.

    현규하가 진짜 예약해 버린 에스테틱 숍에서 피부 관리도 같이 받고, 날이 더워지니 더위를 타는 6세도 보살폈다. 조금이라도 더 긴 시간을 6세와 같이 보낼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윽고 8세가 말한 던전에 갈 날이 되었다. 공태성의 인망이 현규하보다 좋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협상 끝에 매입했다고 들었다.

    던전에 가기로 한 날이 되자 인유신은 다시금 두려움에 휩싸였다. 평양까지 1시간은 걸리는데 설마 또 현규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현규하는 그냥 기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다만 그 이유로 꺼낸 말이 인유신을 기겁하게 했다.

    “주인님이 내 차를 타서 울며불며 또 나한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긴 하지만 던전 진입하기 전부터 진을 빼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적 없는데요.”

    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그의 말처럼 울며불며 매달린 적은 절대 없었다. 애초에 조수석에서 안전벨트까지 꽉 매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매달린단 말인가.

    현규하가 안도한 표정으로 방긋 미소했다.

    “그랬어요 내가 착각했나 보다. 그럼 우리 차 타고 가요.”

    “매달렸어요! 제가 규하 씨한테 매달렸죠!”

    “그냥 매달린 게 아니라 막 엉망진창으로 울어서 발긋한 얼굴로 죽을 것 같다고 애원도 하고……. 그랬죠”

    “그, 그랬던 거 같아요.”

    “울다 지쳐서 내 어깨를 붙잡았는데 땀에 젖어서 손은 미끄러지고……. 그랬죠”

    “아, 네…….”

    없던 추억을 왜곡해서 만들어 내며 나불거리는 현규하를 보자니, 공태성을 두들겨 패던 민끝녀의 심정이 아주 조금, 그러니까 정말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은 이해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를 한 대만 때리고 싶다는 건 아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개마총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내리고 또 버스를 타야 했지만 데이트 같아서 좋았다.

    “기왕 멀리 나왔으니 천천히 둘러보면서 데이트나 해요.”

    현규하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무더운 날이어서 인유신의 옆에는 현규하가 띄워 놓은 작은 휴대용 선풍기들이 돌돌 돌아가고 있었다.

    평양에는 박승기가 평양대에 재학 중이던 시절 몇 번 놀러 왔던 게 전부여서 생소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개마총을 직접 목격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개마총은 6·25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된 유적지다. 예전에 박승기에게 들었던, 북한이 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평행 세계가 생각났다. 여기가 북한 땅이었으면 왠지 복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포기했을 거 같다.

    인유신은 오랜만에 국뽕이 차는 걸 느끼면서 현규하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에 승기랑 평행 세계 얘기했던 게 떠올랐는데요, 규하 씨가 갖고 있는 그 펜던트 말이에요. 이 사람들이 맞아요”

    예전에 휴대폰으로 찾아보고 즐겨찾기에 저장했던 웹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도시를 완공하고자 했던 왕에 대한 전설이다.

    현규하의 눈동자가 유심히 휴대폰 화면을 읽어 내렸다.

    “전래된 전설은 왕이 요정의 조언을 거절하고 도시를 완공한 건데, 이상하게도 쌍둥이들을 산 제물로 바치는 꿈을 꿨거든요. 되게 비약적인 상상이긴 한데 혹시 ®ÀÇ에서는 꿈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게 아니었나 싶어서요. 이름도 같으니까 규하 씨와 관련 있을 거 같아서…….”

    “…….”

    “역시 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죠”

    현규하가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인유신은 말을 얼버무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전설을 읽고 신경을 많이 쓰는 바람에 괜히 이상한 꿈을 꿨나 보다. 머쓱하게 휴대폰을 내리려는데 현규하가 불현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그 얼굴은, 무한한 감격에 젖은 표정이었다. 대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였다.

    “……재.”

    “예”

    “주인님은 천재야……. 어떻게 이름만 듣고 알아냈어요 어쩜 이토록 굉장한 천재가……. 이런 천재를 전 인류가 잃은 대신 내 주인님이 되어 주었다니 내 행운 수치는 EX를 찍고도 성층권을 돌파한 게 분명해요…….”

    [현재 상태  살의. 애정. 벅차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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