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 털어놓을 게 있다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다 불어.”
『싫다아……. 왕자님은 왕들을 하나도 안 닮았어. 왕은 둘 다 상냥한데…….』
눈꼬리가 추욱 처지긴 했지만 솜노로스는 8세와 나눈 대화를 설명했다. 8세는 창세신 둠네제울이 직접 빚어 재탄생시킨 존재다. 하여 인유신에게 적의를 가질지도 모르는 이아드의 존재를 탐색할 힘을 주었다고.
‘적의라고’
인유신은 그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현규하가 제 히든 특성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적이 있었다. 확실히 관련이 있는 모양인지, 그는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네 계약자인 공태성과도 유신 씨가 어느 정도 연결될 수 있었던 모양이군.”
“뭐”
이번에는 공태성이 화들짝 놀랐다.
“어, 별건 아니고요, 길드장님이 8세랑 가까운 곳에서 귀속 아티팩트를 쓰시면 제 알림창에도 떴거든요. 그거뿐이었어요.”
“하아……. 저 물고기 새끼 때문에 온갖 일을 다 겪는군.”
『나도 그만큼 도와줬잖아!』
“필요할 때마다 잠만 처자긴 했지.”
『피이.』
부루퉁해진 고래에게 현규하가 손을 내저었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꺼져.”
『응, 왕자님. 다음에 다…… 아니, 그게 아니라! ®ÀÇ가 왜 멸망하는 거냐고! 그거 물으러 온 거였는데!』
“쳇.”
현규하가 귀찮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혀를 찼다.
“생기가 쇠잔하여 멸망이 진행 중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랬는지, 언제 멸망하는지는 나도 몰라.”
『그렇구나…….』
뇌에서 뇌로 직접 전달되는 텔레파시인 탓일까. 솜노로스가 울적해한다는 게 짙게 느껴졌다.
『다른 세계의 신계에서 나는 신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가 없어. 그래도 창세신께서 우리 세계의 이름을 지옥이라는 뜻의 ®ÀÇ로 새로이 명명하셨다는 소식은 어렴풋하게 들었거든. 그때는 ®ÀÇ에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멸망을 예견하셨던 거구나…….』
지느러미를 불안하게 떨면서 몇 차례 허공을 맴돈 솜노로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왕자님,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알지만 ®ÀÇ로 갈 때 꼭 데려가 주세요.』
“어차피 가 봤자 죽을 텐데 공태성한테 계속 기생해 있어.”
“계약은 지속해도 상관없다.”
공태성은 기생이라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거절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솜노로스가 얼굴을 내저었다.
『지금 내 빈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우리를 돌보던 다른 신이거든. 그분도 힘이 세지만 대지를 받치기 위해 창조된 나보다는 못해. 내가 제자리로 돌아가면 조금이나마 멸망을 늦출 수 있을지도 몰라.』
“글쎄.”
현규하의 입가에 조소가 짧게 스치는 모습은 인유신만이 보았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인유신의 정수리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묫자리 찾아가는 거니 내가 간섭할 필요는 없지. 마음대로 해.”
『고마워.』
“그보다 남은 열쇠의 기운은 아직 없나”
『응. 느껴지면 바로 말할게.』
가만히 있던 8세가 불현듯 끼어들었다.
“찍! 찌익!”
『어, 8세가 꼭 공략해야 할 던전이 있다는데』
갑자기 햄스터가 물고 온 던전에 현규하도 공태성도 눈을 크게 떴지만, 제일 놀란 사람은 인유신이었다.
“8세야! 너도 던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뿌우!”
“세상에! 천재 햄스터잖아!”
인유신은 라이온 킹의 한 장면처럼 8세를 높이 들어 올렸다. 신나게 으쓱으쓱하던 8세는 인유신의 어깨 뒤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현규하의 눈초리에 다시 쪼그라들었다.
솜노로스가 8세의 설명을 통역해 주었다.
『으음, 늘 기운을 느끼는 건 아니고 ®ÀÇ에서 듣고 온 특정 던전만 된다나 봐. 아무튼 어렴풋한 영상이 보인다는데 산이 있는 곳이래.』
한국의 국토는 70퍼센트가 산지다.
『근처에 신전도 있고…….』
산이든 도시든 곳곳마다 보이는 게 절이다.
『유적지 옆이라는데』
소소한 유적지라면 도시마다 다 있다.
답답해진 인유신은 볼펜과 종이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현규하가 눈치 빠르게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내 내밀었다. 8세가 꼬리로 태블릿 펜을 휘감았다.
“신전이라고 한 게 절이지”
“찍!”
“입구의 편액, 그러니까 커다란 직사각형 나무 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여기 그려 볼래 굵게 세 글자가 적혀 있을 거야.”
8세는 조금 생각하는 눈치이다가 꼬리를 움직였다. 태블릿 액정에 비뚤비뚤한 세 글자의 한자가 그려졌다. 寺法廣.
“광법사 여기가 어디인지 아세요 들어 본 거 같기도 한데.”
“찾아보죠. 음……. 평양의 대성산에 있는 절이라는데요.”
“대성산의 유명한 유적지”
“개마총 아닌가”
공태성의 말에 인유신은 개마총 유적지를 검색해서 사진을 보여 주었고 8세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유신은 개마총 옆의 던전을 소유한 곳이 어디인지 근무 중인 김지연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김지연은 바쁜 와중에도 바로 검색해서 던전을 소유한 길드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샤이닝 길드래요.”
“샤이닝이라면 내가 협상해서 소유권을 매입하도록 하겠다. 사과도 할 겸.”
“당연한 보상을 하면서 큰소리치긴.”
공태성은 손톱만큼도 너그러워지지 않는 현규하에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래의 본신이 신허계 아무튼 그런 이름의 신계에 있긴 하지만 현세에서는 계약 관계인 내 주변이 아니면 투영하지 못한다더군. 필요한 게 있다면 나에게 연락해라.”
『왕자님, 그리고 왕자님 애인님! 나중에 또 봐!』
고래는 지느러미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사라졌다. 할 이야기가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끝내 말을 삼킨 공태성까지 돌아가자 현규하가 수줍은 미소를 그리며 인유신을 응시했다. 심장이 살짝 두근두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데이트하러 가요.”
“진짜 데이트죠 운동 아니죠!”
“하하하.”
현규하는 싱그럽게 웃으며 트레이닝복을 아공간에서 꺼냈고, 인유신은 도망치다가 포획되어 근처의 공원까지 달리게 되었다. 즐거운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