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214)

일부러 오버하는 것도 아니라 진심으로 좌절하고 있었기에 인유신은 다급히 외쳤다.

〈물론 닭 다리 살도 맛있어요!〉

〈……주인님의 취향도 눈치채지 못한 이 방자한 쥐새끼는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괜찮다니까요! 예전엔 규하 씨한테 취향을 드러내지도 못했었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죠.〉

얘기를 하다 보니 현규하와의 변한 관계가 새삼 실감이 나서 인유신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지우기 위해 현규하가 콜라와 섞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탓에 숙취가 이튿날인 지금까지 조금 남아 있게 되었다.

인유신은 8세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알코올로 지우려고 했는데도, 혼자 남게 되니 다시 어젯밤의 상념이 어른거렸다. 현규하가 이아드로 가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 시기가 늦길 바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나 정말 못됐다, 그렇지”

“끼이잉! 낑!”

주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8세는 아니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고, 인유신은 실없이 웃었다.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린 건 그 무렵이었다.

“어, 규하 씨가 벌써 왔나”

후딱 일어나 현관문을 연 인유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눈앞에 공태성이 있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네…….”

인유신은 떨떠름하게 올려다보았다. 자식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걸 이해했다는 것과 용서를 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였으니. 공태성에게 딸의 생명이 중요한 만큼, 인유신에게도 현규하가 귀하다.

공태성도 몹시 열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 전화해 보니 오늘은 오후 출근이라고 해서 찾아왔다만, 이른 시간부터 미안하다. 고래가 멸망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봐 달라고 자꾸 귀찮게 굴어서 말이지. 현규하의 오피스텔부터 들러 봤지만 부재중이었고.”

“지금은 고래가 안 보이는데요”

“밤새도록 귀찮게 하다가 해가 뜰 무렵부터 졸고 있다. 제 용건이 급하니 부르면 깨어나긴 할 거야.”

일단 손님은 손님이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할 텐데……. 인유신은 현관에 선 채로 눈동자만 굴렸다. 집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호감도까지 바닥을 친 그를 무작정 들이기에는 좀 그랬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공태성이 먼저 한 걸음 물러섰다.

“현규하와 있는 게 아니었나 없다면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도착할 때까지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아침 식사를 사러 가긴 했는데……. 언제 오는지 물어볼게요. 잠깐만요.”

현관문을 열어 둔 채 인유신이 매트리스 옆에 있는 휴대폰을 가지러 갔을 때였다.

“큭.”

공태성이 낮은 신음을 뱉으며 재빨리 몸을 날려 옥상의 난간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있던 자리를 내리누르는 듯했던 묵직한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손에 샌드위치 봉지를 든 현규하가 현관 앞을 가로막듯이 내려섰다.

“아직 안 뒈지고 살아 있었나 끝녀 누나의 원수를 갚아 줘야겠군.”

“끝녀의 원수라니 무슨 소리냐.”

“누나가 네 생살여탈권을 나한테 줬거든.”

“…….”

그 발언이 엊그제 던전에서의 일보다 공태성에게 더 큰 타격을 준 것 같아서 인유신은 내심 감탄했다. 민끝녀는 공태성을 갈구는 방법이라면 확실히 최진혁보다 고단수인 모양이었다.

“고래가 멸망한다는 게 뭔지 궁금해하고 있나 봐요.”

“괜히 얘기해 줬네요. 귀찮게.”

현규하는 투덜투덜하면서도 거만한 표정으로 공태성에게 턱짓하며 현관을 넘었다. 눈치를 보던 공태성도 한숨과 함께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온 현규하는 손짓으로 현관에서부터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선을 그었다.

“그 선 넘어오지 마. 넘어오면 목 따고 박제해서 끝녀 누나한테 보내 줄 테니까.”

“알았다.”

공태성은 별 불만 없이 시키는 대로 현관 앞에 털썩 앉았다.

“일단 주인님 식사부터 하고. 유신 씨, 많이 기다렸죠”

인유신을 돌아보며 샌드위치와 아이스티를 내밀 때는 표정만이 아니라 목소리의 톤부터 확연히 달랐다. 솔직히 ®ÀÇ에 관한 게 궁금하기도 했으므로 인유신도 얼른 샌드위치를 받았다.

“규하 씨는 안 먹어요”

“저놈한테 이것만 잘라 주고요.”

현규하는 도마에 샌드위치 하나를 올려놓고 식칼로 6등분 했다. 그리고 최저가로 산 싸구려 나무 도마에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식칼을 내리꽂았다. 그 기세에 손잡이가 파르르 떨렸다.

“야. 처먹어.”

“찍.”

8세는 손잡이처럼 파르르 떨면서도 먹을 건 거절하지 않고 슬금슬금 도마 위로 올라왔다. 언행이야 살벌하지만 부탁하지도 않은 8세의 아침까지 따로 챙겨 온 게 아닌가. 안도한 인유신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자 공태성이 솜노로스를 불렀다. 솜노로스는 잠기운이 가득 내려온 눈을 하고 있긴 했으나 부르자마자 나왔다.

“어”

반쯤 감긴 눈을 끔뻑끔뻑하던 솜노로스가 탄성을 질렀다.

“이 주이(쥐) 왜 잉게(여기) 있슴메”

“야.”

『놀라서 말이 나온 거야! 저번에 던전에서 봤을 때는 이 쥐 평범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까 얘 그거잖아. 그거.』

“뺙!”

『아아, 적대하는 사이일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고 그 뒤에는 날 피하느라 던전에도 안 따라왔고 하긴, 기운이 노출되었으면 내가 바로 알아봤을 테니까. 근데 너는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뀨굿!”

『그랬구나. 신들도 없는 낯선 세상인데 안 무서웠어 여기는 네 동족들도 없잖아.』

“뵷! 먀앙!”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인유신은 멍하니 대화 아닌 대화를 들었다. 침식 게이트에서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8세가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의 선물이라는 것도 떠올렸었다. 같은 세상에서 온 솜노로스가 8세를 아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한데.

그보다 솜노로스는 8세와 말이 통하는 걸까 부럽다…….

현규하의 눈초리가 사나워지자 솜노로스는 다급히 설명했다. 이 집 안에서 현규하의 눈치를 안 보는 건 인유신뿐이었다.

『얘, 그러니까 지금 이름은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8세라고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8세의 종족이 원래 뭐냐면…….』

“저기, 그냥 8세라고 불러도 돼요…….”

『애칭이야 알았어. 지금은 모습을 변형했지만 원래 8세는 지하에 사는 종족인데, 밤에 지상으로 올라와서 바람피우는 나쁜 사람들을 괴롭히고 혼내 주는 애들이야.』

발음이 깨지니 고유 명사인 종족명을 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유신은 솜노로스의 설명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구 세르비아에 구전되는 칼리칸트자로스라는 이름의 종족이 떴다. 중세 분위기의 삽화와 함께.

“…….”

인유신은 온몸에 털이 무성한 데다 여러 짐승이 섞여 있고 성기가 도드라진 그 삽화를 다급히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8세는 귀여워. 귀엽단 말이야……!

머리 위에서 힐끗 휴대폰 화면을 본 현규하가 굳이 참견했다.

“원래는 징그럽게 생겼네요.”

“아니에요. 8세는 뿡알까지 귀여워요!”

인유신은 강력히 부정하며 8세를 손안에 보듬었고, 역시 휴대폰으로 검색해 본 공태성은 더욱 질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인유신이 현실 도피를 하는 사이에도 솜노로스는 설명을 이어 갔다.

『침식 게이트에서 바로 건너오는 것도 어렵고, 건너와도 소멸할 테니까 창세신께서 보스 몬스터라는 형식으로 재구성하셨대. 그 뒤에는 주인을 섬기기 위해 설치류가 된 거래.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럼 어쨌든 햄스터가 맞다는 거죠!”

『주인인 네가 햄스터이길 바란다면 햄스터로 남을 거야.』

“8세야! 넌 햄스터야……!”

“삐요오……!”

인유신은 새삼 8세와 눈물겨운 상봉을 나누다가 현규하의 상태창에 ‘질투’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걸 보고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참, 8세를 침식 게이트에서 만난 신에게 선물받았을 때 들었던 얘기가 있거든요. 집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고래를 보살펴 주라고요.”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곁에 두어도 큰 도움은 안 될 거다.’라고 했던 말은 생략해 주었다.

『……진짜 날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해 주셨던 거야』

솜노로스의 커다란 눈에 금세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고향을 떠나온 뒤로 헤아리기도 힘든 긴 시간이 지났을 테니 그곳의 신이 여전히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럽기도 할 터였다.

인유신도 순간 코끝이 찡해졌는데, 현규하가 가차 없이 솜노로스의 감동을 박살 냈다.

“신은 망각하지 않는 존재니까 당연하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