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규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고래 만나서 멍때리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 아냐. 히든 보스 결정석 얻은 건 없어”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
“아니. 명령.”
공태성은 현규하의 당당한 낯을 한 번 노려보기만 했을 뿐, 순순히 아공간을 불러와 손을 넣었다. 광채가 흐르는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 현규하의 머리로 날아왔다.
현규하가 가볍게 결정석을 잡았다.
“하나뿐이다.”
“무슨 던전이었는데”
“‘분노를 노래하소서’. 히든 보스의 이명이었지.”
“아킬레우스 사냥하는 맛이 있었겠군.”
이쪽은 20년간 겨우 다섯 개를 모았는데 2년 동안 한 개를 획득했다면 무척이나 준수한 성적이었다. 여하튼 이제 남은 조각은 한 개뿐이다.
“그 고래에게 ®ÀÇ와 연결된 던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 조금은 도움이 될 거다.”
“그래”
시큰둥한 대답을 들은 공태성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게이트를 탐색하여 ®ÀÇ와의 연결 고리를 찾는 건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다. 감지 능력이 있는 고래의 힘을 빌리고도 2년 동안 두 개를 찾은 게 전부였다. 그중 한 개는 현규하가 낙찰한 던전이었고.
탐색에 속도가 붙을 게 분명한데도 현규하는 그리 유쾌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안나의 병 때문에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친자식이 아닌데도 힘들어하는 태성이를 보는 게 갈수록 어려워져서……. 뭐, 순순히 이혼 서류에 서명을 안 하고 도망 다니길래 길드까지 찾아갔지만요.”
대수롭지 않은 듯 가볍게 말하는 민끝녀였으나,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을 딸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도 되지 않아 인유신은 말을 삼갔다. 아이를 지울 결심을 하고 베를린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스스로를 상처 주고 있을 것이다. 인유신도 그랬으니까.
민끝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특유의 맥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괜히 분위기만 칙칙해졌네요. 달리 궁금한 건 없어요 아, 내가 현 헌터와 어쩌다 알게 됐는지 들었어요”
“아니요.”
“후후, 잘됐다. 그 얘기라도 해 줄게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민끝녀는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 전에, 내 이름이 많이 웃기죠”
허를 찔린 인유신은 잔기침을 콜록콜록했다. 그래도 민끝녀는 전혀 불쾌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들 낳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인간이었거든요. 추잡스럽게 쉰이 넘어서 30살은 어린 여자와 네 번째 결혼을 했는데도 아들은커녕 자식도 낳지 못했어요. 고자 새끼 같으니. 그래서 개명도 안 한 거예요. 아버지가 어떤 인간 망종이었는지 잊지 않으려고.”
간신히 얻은 유일한 자식마저 딸이었다. 민 회장은 처음이자 마지막 딸이라는 의미에서 끝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존심 때문에 하지 않던 시험관 시술에도 손을 대었으나 그나마도 계속 배아의 성별이 딸로 판정되었다. 민 회장의 네 번째 아내는 거듭하여 난자를 채취해야 했다. 부작용으로 인해 건강을 완전히 해칠 때까지.
결국 아들을 포기한 민 회장은 딸이 아닌 조카에게 기업을 승계하기로 했다. 민끝녀는 양사가에서 액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곳에 있다는 건 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
아버지를 일컫는 민끝녀의 과격한 단어 선택에 진땀을 흘리던 인유신도 이야기를 듣고 납득했다. 집안에서 저런 대우를 받고 자랐다면 아무리 친아버지라도 정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인유신은 부모의 정에 목말라 있었지만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있는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식이 있다는 것도 이해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자랐으니까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어요. 그나마 집안 체면 때문에 돈 문제로 아쉬운 건 없었으니까 방탕한 재벌 3세로 살다가 죽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죽은 거예요.”
인유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현규하 얘기다.
“그 뒤에 사촌 오빠가 갑자기 나를 이사 자리에 앉혔는데, 적응하기도 전에 재수 없던 사촌 오빠와 날 무시하던 오촌 조카들까지 줄줄이 죽어 나갔죠. 정신이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그늘에서 갑자기 햇살 아래로 끌려 나온 민끝녀에게 조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공태성만이 그녀까지 당할지도 모른다면서 길드 업무까지 팽개치고 경호했을 뿐이었다.
14살의 어린 헌터가 찾아온 건 그 무렵이었다.
〈그쪽 가족들을 죽인 사람이 난데요.〉
범인이 현규하라는 건 민끝녀도 알고 있었다. 이젠 자신이 죽을 차례인가 보다. 공태성의 뒤에서 덜덜 떨던 그녀에게 현규하는 여상히 말했다.
〈그쪽한테는 별 감정 없으니까 죽일 생각은 없고,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민끝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를 비롯한 그 많은 사람을 학살한 미치광이 살인마라기엔, 그의 눈동자가 맑았다. 눈앞에 있는 건 평범한 14살의 소년이었다.
공태성까지 억지로 내보내고 현규하와 독대했다.
〈원래는 그쪽이 뭘 하든 알 바가 아니었는데……. 생각이 좀 바뀐 계기가 있어서요. 어쨌든 내가 죽인 사람들이 그쪽에게는 가족이었잖아요.〉
〈…….〉
〈죽인 걸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죽일 테니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러 온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쪽이 날 죽여서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잖아요 복수하고 싶을 때를 대비해 기억하라고 얼굴 보여 주러 왔어요. 사진으로 찍어 놔도 돼요.〉
처음에는 희롱하는 건가 싶었던 민끝녀는 그의 표정이 몹시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복수 같은 건 안 해요. 나는 아버지가 죽은 게 하나도 슬프지 않거든요.〉
〈나랑 똑같네요.〉
〈현 헌터의 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그건 아니고, 양아버지가 될 뻔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민끝녀는 14살의 현규하를 어린아이가 아닌 ‘현 현터’로서 동등하게 대우한 최초의 어른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 법적 보호자를 자처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민 회장이 갖고 있던 강석우의 연구 자료도 찾아서 하나도 보지 않고 모두 넘겨주었다. 그 자료를 통해 현규하는 아내가 죽은 뒤 강석우가 불로불사에 집착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민끝녀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현규하는 의도한 게 아니었다 할지라도 민끝녀의 인생을 바꿨다. 태어날 때부터 둘러싸고 있던 견고한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그녀는 집안도 못 이을 딸이 아니라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회장직에 올려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고, 산하 길드도 새롭게 체제를 정비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변함없이 현규하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민끝녀는 미소와 함께 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현 헌터는 나에게 세계를 주었어요. 그런 사람이에요. 유신 씨에게도 그렇죠”
인유신은 시간을 천천히 더듬었다. 짧게는 그와 만나게 된 몇 달 전부터, 길게는 14년 전에 이르기까지.
현규하는 어린 그를 죽음에서 구해 주었으며, 평생을 평범하게 살았던 그에게 상상도 한 적이 없던 경험을 겪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임을 인유신은 느리게 깨달았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태성이를 마주 볼 수가 없어서 회피했어요. 그 결과가 이혼이죠. 유신 씨와 현 헌터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현 헌터에게 유신 씨처럼 의지하는 사람이 생긴 건 정말 처음이거든요. 후후, 이런 말은 너무 꼰대 같나”
“……제가 더욱 의지하는걸요. 규하 씨에게는 정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애인 사이에 손익 계산을 하는 것도 아니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현 헌터가 말 안 들으면 아까 내가 공 씨한테 그런 것처럼 그냥 시원하게 패 버려요. 우리한테 맞아 봤자 육체 강화 스킬까지 있는 S급들은 흠집도 안 나요.”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규하 씨처럼 귀여운 생물체를 제가 어떻게 때려요.”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민끝녀가 이내 동의한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민끝녀는 제 몫까지 공태성을 더 두들겨 패라는 상냥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공태성은 그녀에게 매우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긴 했지만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침 고래도 깨어났다고 하기에 바로 불렀다.
“안녕하심까(안녕하세요)! 고래 등장!”
고래가 인사하면서 힘차게 등장했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던 던전에서 볼 때도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내에서 만나니 더 커 보였다. 얼굴도 병실 안에 다 들어온 게 아닌 거 같다.
앳되고 중성적인 목소리를 듣자마자 현규하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