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 딸린 보호자실에서 민끝녀와 마주 보고 앉은 건 그로부터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인유신은 따뜻한 코코아를 타서 슬쩍 내려놓았다. 다른 때였으면 대기업 부회장이 앞에 있다는 거에 긴장하여 심장이 오그라들었을 텐데, 아까 그 광경을 목격해서 그런지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퉁퉁 부은 민끝녀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유신 씨.”
“아니에요. 원래 병실에 있던 거라…….”
“유신 씨를 만나는 건 처음인데 초면부터 추한 꼴을 보여 드렸네요. 이런 일 두 번 다시는 없도록 공가 놈 감금이라도 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안나가 많이 아파요”
민끝녀가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어쩌다가 다른 남자 애를 전남편이랑 같이 키웠냐는 질문부터 했을 텐데, 유신 씨는 현 헌터처럼 좋은 사람이군요.”
인유신은 말없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딸의 안부가 걱정되었다는 게 공태성을 용서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궁금한 것도 많았고 공태성의 소행은 여전히 화가 난다. 하지만 이유를 들으니 계속 추궁할 수가 없었다.
자식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부모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게다가 결과적으로 현규하는 무사하기도 했고.
‘……아마 규하 씨가 무사하다는 이유가 제일 클 거야.’
현규하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코코아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민끝녀가 한숨처럼 서두를 뗐다.
“연애할 때부터 태성이와는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걸 반복했어요. 다른 남자들과 사귀어 봐도 태성이하고만큼은 안 되더라고요. 태성이는 돈밖에 없던 시절의 나를 좋아해 준 사람이거든요.”
돈밖에 없던 시절……. 그럼 지금은 뭐가 더 있는 걸까.
왠지 식은땀이 흐르는 인유신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민끝녀가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권력도 있지만요.”
“아하…….”
“여하튼 결혼 준비하다가도 깨져서 이번에야말로 그 인간이랑은 완전히 끝났다고 홧김에 잠깐 만났던 남자가 있었어요. 근데 그 자식 애를 가져 버린 거예요. 하필 딱 한 번 콘돔을 안 썼던 날에…….”
민끝녀가 훌쩍거리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유신 씨는 나처럼 실수하지 말고 콘돔 꼭 쓰세요. 현 헌터는 매너도 있고 젠틀하니까 그런 건 잘 챙기죠”
“그, 어……. 네…….”
“임신한 걸 알게 된 게 태성이랑 다시 만나고 있을 때였어요. 앞이 깜깜했죠. 태성이랑 결혼을 파투 내고 혼자 애를 낳아서 키우느냐, 몰래 애를 지우고 결혼하느냐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를 선택했어요.”
국내에서 임신 중단 수술을 하면 공태성이 눈치를 채게 될지도 몰랐다. 민끝녀는 해외 출장이라고 핑계를 대 독일로 떠났고, 수술 날짜까지 잡았다.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태성이가 독일까지 쫓아왔어요. 자기 때문에 애를 지우는 거냐면서, 자칫해서 다치거나 두 번 다시 아기 못 가지면 어떻게 하냐고, 아빠 노릇 잘할 테니까 지우지 말라고 울면서 붙잡는 거예요……. 그때 결심했죠. 돈과 권력밖에 없는 내가 이 모지리를 책임져야겠다고.”
어쩐지 손끝이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안으로 말려들어 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인유신은 저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확신했다.
민끝녀가 가슴을 누르면서 무겁게 탄식했다.
“그리고 침식 게이트에 휩쓸렸어요.”
도란도란한 얘기가 오가는 보호자실과는 달리 병실에는 썰렁한 기운만이 내려앉았다. 현규하도 코코아를 타 왔다. 물론 공태성을 위해 가지고 온 건 아니었고 혼자 의자에 앉아 마셨다.
“육하원칙 맞춰서 상세하게 불어.”
“하아.”
공태성은 복잡한 상념이 섞인 한숨을 길게 쉬었지만 순순히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민끝녀가 다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독일까지 쫓아갔다는 걸 얘기하며 공태성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끝녀의 가족이 어떤 인간들이었는지는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알지, 내가 죽였으니까.”
“단란한 가족을 갖는 게 끝녀의 소박한 꿈이었는데 나 같은 거 때문에 아이를 지우게 할 수는 없어서 독일까지…….”
“끝녀 누나가 남자 보는 눈이 발바닥에 붙어 있다는 건 충분히 설명되었으니까 사설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얘기해.”
“…….”
현규하를 잠시 매섭게 노려본 공태성은 이내 머리를 내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베를린에서 침식 게이트에 휩쓸렸다.”
“침식 게이트는 사전에 계측되어서 대피령이 내려오지 않나”
“예상보다 게이트의 입구가 광범위했어. 게이트 내부는 거의 베를린 전체였고.”
방사능 수치는 정상이었고, 마나 농도도 들쑥날쑥하긴 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온이 수시로 바뀐다는 것과 내부가 광활하여 수색하기 어렵다는 것만 제외하면 난도가 높지 않은 게이트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하게 된 추측이다만, 멸망의 원인이 신의 분노가 아니었나 싶더군. 신성력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신성력의 농도가 높았다는 것도 게이트를 클리어한 뒤의 조직 검사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도시 전역을 수색하느라 5일을 소모했다. 농도 짙은 신성력에 노출되면 성인은 약간의 부작용만 겪을 따름이었지만, 배 속의 아이는 달랐다.
5일을 헤매는 동안 태아는 신성력을 끊임없이 흡수했고, 이를 증명하듯 농후한 신성력을 온몸에 휘감은 채로 태어났다. 안나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감기 한 번 앓는 일 없이 아주 건강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민안나의 몸에 신성력이 짙게 깃들었다는 걸 들은 현규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10살 전에 죽는다는 뜻이잖아.”
“……그래. 겉으로는 멀쩡해도 신체의 균형이 무너져 있으니까.”
신들과 소통하는 세계였다면 신이 특별히 아껴서 데려갔거나, 혹은 신에게 바쳐진 순정한 아이라는 표현이 붙었을 병이었다.
이 세계는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다만 신을 경외하는 마음 자체가 일종의 힘이기에 카타스트로피 이후에는 신성력이 발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라고 해 봤자 고작해야 60년뿐이다. 신성력 또한 게이트학이나 고유 능력처럼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더 많았다.
공태성과 민끝녀는 딸의 병을 알게 되자 신성력을 지닌 소수의 성직자들을 찾아다녔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느 성직자도 민안나의 병을 낫게 하지는 못했다. 민안나의 작은 몸에 깃든 신성력은 이 세계의 종교와는 궤를 달리했다.
“아마 이 세계에서는 이미 맥이 끊긴 종교의 신이겠지. 여긴 신이 없는 세계니까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진 종교와 잊힌 신이 적지 않다. 게다가 그리스의 신처럼, 신화나 전설로는 남아 있어도 종교의 형태를 띠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니까.”
“……그래서 ®ÀÇ에 가려고 한 건가 ®ÀÇ는 신과 소통하는 세계니까”
“그 고래가 알려 주더군. 다른 만신전의 신이어서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ÀÇ에 가면 찾을 수 있다고.”
처음 회령에서 고래와 만난 공태성은 마수라 여기고 토벌하려 했다. 하지만 그 고래는 사람의 말을 했고, 딸의 병을 낫게 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공태성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래와 계약을 맺었다.
현규하를 죽이고 그의 심장을 사용하여, ®ÀÇ로 가는 문을 열 자격을 얻기로.
“®ÀÇ에 가서 병을 낫게 할 약 같은 걸 얻게 된 뒤에는 어쩌려고 ®ÀÇ로 가는 길은 편도인데”
“약병 하나 정도는 옮길 수 있다고 했다.”
“흐음.”
현규하는 턱을 톡톡 두드리다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이아드에서 철의 시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걸 보니 고래에게 사기를 당한 건 아닌 모양이다.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공태성은 부쩍 피곤한 기색으로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네 목적도 ®ÀÇ로 가는 것일 테지”
“당연하지.”
“네놈도 ®ÀÇ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