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두 사람이 퇴근한 뒤에도 공태성은 여전히 입원한 상태였다. 썩고 부패하는 상처를 치료하긴 했지만 며칠간 안정을 취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현규하는 전부 무시하고 병실 문을 열었으며 인유신도 살금살금 뒤를 따랐다.
“왔군.”
VIP실의 침대에 앉아 있는 공태성은 인유신이 거의 엄살로 입원해 있을 때만큼이나 멀쩡해 보였다. 현규하는 다짜고짜 턱짓했다.
“고래부터 불러.”
“기다려 봐라.”
공태성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슬리핑 뷰티. 나와 봐.” 하고 중얼거렸다. 현규하의 뒤에 숨어서 인유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 커다란 고래를 슬리핑 뷰티라고 부르는 걸까. 범상하지 않은 센스였다.
그렇지만 눈앞은 잠잠했다. 공태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 나오는데 원래 하루의 절반은 반드시 잠을 자는 놈이라.”
“잠이 많은 커다란 고래라고”
익숙한 조합인지 현규하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네. 그렇지만 그건 고래가 아니라 물고기인데……. 뭐, 어쨌든. 언제 깨는데”
“널 만나겠다고 했으니 오늘 안으로는 눈을 뜨겠지.”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고래가 잠을 깨길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은 현규하에게도 있었다.
“그럼 너부터 조지면서 기다리면 되겠네. 처음부터 불어. 그 고래, 회령에서 만난 거지”
“거기까지 조사했나”
공태성은 순순히 수긍했다. 재작년 회령에 들렀을 때 게이트에서 나온 고래와 만났고 서로 간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지금까지 계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를 이었다.
“너에 대한 얘기도 대충 들었고.”
“규하 씨의 심장을 사용하겠다는 것도 진짜예요”
“맞다.”
이번에도 공태성은 긍정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인유신의 속을 끓어오르게 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어쩌면 저렇게 태연한 낯빛일 수가 있는 건가.
인유신은 현규하의 등 뒤에서 앞으로 나갔다.
“사람을 죽여 가면서까지 길드장님에게 필요한 게 대체 뭐였는데요”
그답지 않은 날카로운 음성에 공태성만이 아니라 현규하까지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고 공태성보다 어째서인지 현규하가 더 허둥지둥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현규하에게 졌고 구워 먹든 삶아 먹든 할 말이 없는 처지다만, 그게 내 목적을 전부 밝혀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그러니까 그 목적이 뭐였냐고요. 길드장님은 사람을 차로 치어서 죽여 놓고도 빨리 가야 했다는 한마디로 넘길 작정이에요 규하 씨를 왜 죽이려고 했는데요!”
정제하지 못한 울화가 속에서 울컥 치밀었다. 언젠가 현규하가 약점인 자신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의 약점인 주제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그가 저를 구해 주지 않았기를 바라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
이 울화는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유신 씨, 당신은…….”
머뭇거리던 현규하의 입이 간신히 열렸을 때,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말을 끊었다. 공태성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들었다.
“한준수, 지금은 연락하지 말라고 했…….”
- 누, 누나요! 누나가 병원에 오셨어요! 저는 못 막습니다!
“……뭐”
공태성이 묵직한 신음을 채 토하기도 전이었다. 병실의 문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쾅 열리더니 정장을 입은 여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키는 크지만 맥없어 보이는 하얀 낯 때문에 흐린 인상의 여자는 거침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
추궁을 당할 때도 태연하던 공태성의 낯빛은 삽시간에 굳었고, 현규하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누나. 독일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저 인간이 사고 친 소식 듣고 당장 비행기 띄웠어요. 아, 그리고 옆에 있는 분이 인유신 씨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민끝녀라고 해요.”
인상만큼이나 힘이 없는 목소리는 울컥 치밀어서 흥분했던 인유신마저 조금은 가라앉히게 했다.
‘어디서 본 얼굴 같았는데……. 양사 부회장님이었구나.’
공태성의 전처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현규하가 누나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게 더 먼저 인식되었다.
문을 쾅 열던 기세와는 달리 기운 없는 걸음을 흐늘거리며 침대까지 옮긴 민끝녀는 던전의 부산물로 만들어서 억대는 가뿐히 넘을 명품 백의 숄더 스트랩을 내렸다. 그리고 백을 붕붕 휘두르며 공태성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
인유신이 흠칫 놀란 사이에도 공태성은 허벅지 둘레가 자신의 반도 안 될 듯한 민끝녀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고 있었다.
“자, 잠깐만. 끝녀야. 얘기를 좀.”
“이 미친놈아! 던전에서 현 헌터에게 뒈지지, 왜 살아서 나왔니!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그냥 나가 죽어!”
“아니, 그게…….”
“나한테 말 걸지 마!”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백의 금속 액세서리가 이마에 잘못 맞았는지 ‘빠악!’ 하는 소리가 났다. 청명하게 울리는 큰 소리에 인유신은 자신이 맞은 게 아닌데도 흠칫했다. 정말 아프긴 하겠다. 솔직히 그게 고소하게 느껴진다면 나쁜 걸까.
[현재 상태 살의. 애정. 불안. 유쾌.]
음, 나쁜 게 아닌 거 같다.
“현 헌터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감히 해치려고 해! 현 헌터보다 나이는 9살이나 더 처먹은 주제에 넌 대체 뭐니! 현 헌터는 저렇게 듬직한데! 너는 뒷구멍으로 사람 해칠 궁리나 하고!”
새끼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는 전처에게 꼼짝도 못 하고 구타당하던 공태성도 현규하와 비교하는 말에는 참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안나의 병을 고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잖아!”
“……뭐라고 했니”
“현규하를 죽여야, 안나를 살릴 수 있다고!”
삽시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태성과 민끝녀만이 아니라, 현규하와 인유신에게도.
인유신은 낯익은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안나, 안나…….
“……안나요 누나 딸이 왜 걔 아팠어”
민안나. 분명히 저들의 외동딸이었다. 인유신이 공태성과 같이 백화점에서 고른 선물의 주인공.
홧김에 뱉은 공태성의 낯에 뒤늦은 후회의 기색이 서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씹어뱉듯이 민끝녀에게 중얼거렸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안나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현규하부터 죽여야 했다.”
“…….”
“현규하가 너에게 어떤 사람이든, 그런 건 상관…….”
짜악!
뺨을 후려 맞은 공태성의 얼굴이 휙 꺾였다. 입술이 터진 걸 본 인유신은 흠칫했다. 공태성도 어느 정도의 육체 강화는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민끝녀의 앞에서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모양이다.
그는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숨만 쉬었다. 민끝녀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서럽게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너는…… 너는, 네 핏줄도 아닌 애한테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 네 자식도 아니잖아!”
“……!”
재벌 4세의 출생의 비밀이 난데없이 밝혀졌다. 얼떨결에 청자가 된 인유신과 현규하가 급격히 숨을 들이켰다.
“사랑하는 여자가 낳았고 내가 키웠다. 왜 내 딸이 아니야!”
“머저리 같은 새끼!”
왐마야…….
민끝녀는 이제 울면서 주먹으로 공태성을 패기 시작했다. 현규하가 미간을 누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장르가 신파 섞인 아침 드라마가 됐지.”
“……저희 나가 있을까요”
“한참 걸릴 거 같으니까 그렇게 해요.”
두 사람은 그냥 밖으로 나와 병실 문을 닫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