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214)
  • “보내 줘도 돼요”

    인유신도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을 속이고 현규하를 끌어들인 공태성을 향한 호감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죽는 걸 보고 싶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충 손짓한 현규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인유신이 결심했다면 더 할 말은 없다. 게다가 공태성을 붙잡는 거야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고래인지 마수인지 하는 놈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도 있었다.

    장범이 공태성을 부축하여 일어났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길드원들이 호위하듯 두 사람을 둘러싸며 걸음을 옮겼다.

    낮게 속삭이는 소리는 공태성의 귀에만 들렸다.

    “규하가 뭐 진짜 어디 왕자라도 돼”

    “그런 모양이다.”

    “흐응……. 기죽지 마. 파파도 나의 영원한 왕자님이니까.”

    공태성의 얼굴에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드러났기에 장범의 목소리는 뾰족해졌다.

    “야, 공태성. 그 얼굴은 진짜 상처거든”

    “그놈의 파파 소리 안 들으니 한결 낫군.”

    “파파는 범이만 미워해.”

    투닥거리며 나르샤 길드원들이 멀어지자, 현규하가 냉큼 아공간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하얗고 동글동글한 빵을 인유신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얼떨결에 한 입 베어 물었다.

    “공태성 때문에 저녁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고프죠 회령에서 산 백살구빵인데 어때요”

    “어, 살구빵은 처음인데 새콤하고 단 게 맛있어요.”

    신기해서 우물우물 먹다 보니 8세 생각이 났다.

    “오늘 8세가 도와줬어요. 얘가 길드장님 위치를 알 수 있더라고요.”

    “그랬어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나중에 족쳐서 알아내기로 하고, 아무튼 쓸모는 있었네요. 밖에 나가면 살구빵 하나를 너그럽게 하사하도록 하죠. 회령에서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나가서 얘기해 줄게요. 성길 형도 걱정하고 있을 테니 연락을……. 아.”

    인유신을 안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려던 현규하가 멈칫했다.

    “나 사고 친 거 있었네.”

    “예!”

    “아까 주인님이랑 전화가 안 된다는 걸 회령역에서 알게 되는 바람에 능력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만.”

    정확한 영문은 모르겠지만 사고를 쳤다니 정말 큰일이었다. 던전 밖에서 헌터가 위법적인 행위를 하면 일반인들보다 중한 처벌을 받는다.

    “으아, 그럼 빨리 던전에서 나가야죠!”

    “근데 휴대폰도 박살이 났어요.”

    “제 폰 빌려드릴게요!”

    어째서인지 사고를 친 현규하보다 인유신이 더 허둥지둥했다. 제 일처럼 걱정하는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던진 현규하는 곧장 하늘로 몸을 띄워 던전 입구로 향했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권성길에게 전화해서 별 탈이 없다고 설명하고, 회령역에도 보상하겠다는 연락을 취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이제 회령에서 사 온 백살구빵과 귀밀떡을 나란히 까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눌 타이밍이었으나…….

    “규하 씨, 옷 벗어 주세요.”

    “박력 넘치는 주인님도 너무 멋져.”

    현규하가 즉시 바지 벨트를 덜그럭거리면서 풀었고, 인유신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옷 벗으라는 얘기를 하면 분명히 섹드립을 칠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대뜸 바지부터 벗으려 한다니!

    “그거 말고요!”

    “네에 우리 좋은 거 하자는 말 아니었어요”

    “안 해요! 상처 치료해야죠, 상처!”

    “치료보다 그게 더 급한데요.”

    “상처 그냥 놔두실 거라면 앞으로 규하 씨를 뀨뀨라고 부를 거예요.”

    “…….”

    지금도 매트리스 머리맡의 선반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2등신 인형을 힐끗거린 현규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라이딩 재킷을 벗더니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럼 티셔츠는 주인님이 벗겨 주세요. 이건 양보 못 합니다.”

    옷을 벗겨 달라고 하면 인유신은 제대로 손도 못 대고 뚝딱거릴 게 뻔했다. 그 핑계로 대충 넘길 작정이었으나 인유신도 단단히 결심했다. 주방에 다녀온 그의 손에 주방 가위가 들려 있는 걸 본 현규하는 얌전히 티셔츠를 벗었다.

    “뱃살이 아직 안 붙어서 창피하네요.”

    “안 찌워도 된다니까요.”

    인유신은 뱃살은커녕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이 자리한 복부의 상처에 손을 가져갔다. 상처는 금세 회복되었다. 다친 걸 보니 너무 속상했다. 지금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말하라면 서슴없이 공태성을 외칠 수 있었다.

    자잘한 다른 상처도 치료하면서 왼쪽 가슴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선명하게 새겨진 이름이 눈동자에 비쳤다. 처음 저 이름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8세 덕분에 규하 씨를 치료할 마나가 부족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꼼꼼히 치료를 이어 가던 인유신의 머리에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던전에서 버프를 주었을 때는 전투 직후가 아니었나 그때야 상황이 급해서 지나갔지만 지금 힐을 주는 바람에 그, 거도 다시 되살아났다면

    인유신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경련했다. 잘게 떨리는 시선이 차마 아래쪽을 내려다보지 못하고 있을 때, 현규하가 상큼하게 미소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손 씻으러 가시는 거죠!”

    “뭐어……. 그것도 포함되어 있긴 하네요.”

    “……!”

    그것도 그것 말고는 또 뭐가 있길래!

    입술만 뻐끔거리는 인유신을 남겨 둔 현규하는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손만 씻는다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산뜻한 표정으로 나왔다.

    인유신은 8세와 귀밀떡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유신 씨.”

    나긋한 음성이 귓바퀴에 숨을 훅 불어 넣으며 목덜미를 쓸기 전까지만.

    “히야아앜!”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이 기겁한 그의 옆에서 현규하가 꽃잎을 흔들었다.

    “목덜미에 이게 떨어져 있었네요. 벽에 걸린 꽃다발에서 떨어졌나”

    “…….”

    “근데 왜 그렇게 놀라요”

    “…….”

    진짜 얄밉다. 그 와중에 뻔뻔한 낯이 새침하게 갸웃거리는 게 귀여워 보여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