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14)

“파파 기술에 당한 거야 규하는 그 기술 못 쓰지 않나”

“오늘 처음 썼다. 내 걸 보고 따라 쓴 모양이야.”

장범은 혀를 내둘렀다. 공태성도 만만치 않지만 그를 걸레짝으로 만든 현규하는 더한 괴물이었다.

“그래도 내장은 안 튀어나왔네. 내장까지 퍼렇게 썩어 문드러졌으면 회복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냥 죽으라고 하지 그러나.”

“묫자리 알아볼까”

“수목장할 거다.”

“죽기 전에 부회장님은 보고 죽어야지.”

“……그래. 마지막으로 본 게 네놈 얼굴이라면 원통해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 같군.”

“우와, 아무리 나라도 그딴 발언에는 상처 입어.”

아공간을 뒤적거려 봤지만 썩어 가는 환부를 치료할 만한 게 마땅치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현규하가 과연 보내 줄까.

걱정스레 응시하는 장범과는 달리 공태성은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서 다소 멍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 장범은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뭔가.”

“아니. 싸우다가 시력이 맛이 갔나 싶어서.”

멀리 들리던 종소리가 완전히 멎고, 새로운 알림창이 출력되었다.

[던전의 보스 ‘누구도 응하지 않는 종소리’가 사망했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순삭이구만.”

장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디바를 몸 앞으로 들어 올렸다. 현규하를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지만 발버둥은 쳐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유신을 옆구리에 끼고 근처에 내려선 현규하는 미간만 찌푸렸을 뿐 공태성의 목을 따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냥 옆에 있는 인유신을 내려다보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공태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 팔다리를 잘라서 몸통만 들고 가는 꼴을 저 꼬맹이한테 보이고 싶지는 않겠지.”

“둘이 대체 무슨 플레이를 한 거야”

그에 대한 대답은 현규하가 했다. 현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인유신의 정수리에 가볍게 손을 얹더니 혼자 공태성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굽힌 그의 나직한 속삭임은 떨어져 있는 인유신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일단 보내 주는데 곧 찾아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유서는 미리 써 놓든가.”

“그때라고 해서 내가 얌전히 당하기만 할 거 같나”

“발버둥 쳐 봤자 결과는 바뀌지도 않을 거고, 추하기만 할걸.”

“무슨 추한 꼴을 보여서든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현규하가 등 뒤에 있는 인유신을 힐끔거렸다. 표정을 보니 ‘눈앞에서 죽이는 건 안 되더라도 팔 하나 자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서 장범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에헤이, 내가 있는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그쪽은 나 못 이기는데요.”

“죽기 전에 파파가 도망칠 틈은 벌 수 있지 않을까”

“그쪽이 나한테 활을 쏘면 공태성 다리부터 바로 잘라 주죠.”

“파파라면 기어서라도 튀겠지.”

“지금 내 몸을 가지고 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장난 같은 말과는 달리 장범은 정말 간디바의 활시위를 당겼고, 현규하도 발리사르다를 빼 들었다. 눈앞에서 다시 싸움이 벌어지려 해 인유신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

눈을 한 번 깜빡한 순간, 그들의 눈앞에는 고래가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시야에 다 담기지도 않을 만큼 아주 거대한 고래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현규하는 즉시 뒤로 몸을 날려 인유신의 앞에 섰다.

장범도 간디바를 재빨리 높이 올리며 중얼거렸다.

“히든 보스 아니, 던전 브레이크도 없었는데 신종 마수야”

“앙이야(아니야)!”

고래가 지느러미를 파다다닥 흔들며 억울해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디메 마수 따우가 비교하느 말이!”

“…….”

이마를 짚으며 침음하는 공태성을 제외한 좌중의 입이 벌어졌다. 그들은 마수처럼 보이는 뭔가가 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그 입에서 나온 게 걸쭉한 함경도 사투리라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거대한 눈동자를 굴리던 고래가 얼굴을 바닥에 콱 박는 시늉을 했다.

“쌤딜하디 말구 살궈줍소꼬마.”

“아니, 왜……. 마수가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거지 그것도 젤 빡센 육진 사투리를……”

“마수 아님메!”

현규하가 혼란스러워하는 장범에게 슬쩍 물었다. 육진이라면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그가 있었던 회령도 속하는 지역이다.

“저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어어, 대충은……. 나 고향이 청진이라……. 아까 한 말은 싸움질하지 말고 살려 달란 뜻인데, 태성이 얘긴가……”

“흐음.”

당장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현규하는 발리사르다를 비스듬히 아래로 내렸다. 완전히 경계를 푼 게 아니었기에 납검은 하지 않았다.

“거기, 마수.”

“앙이란데두!”

“아니라는 말인가 뭐, 아무튼. 공태성과 무슨 관계지”

고래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 공태성을 내려다보았다. 공태성은 골치 아프다는 기색으로 머리만 누르고 있을 뿐, 참견하려는 낌새는 없었다.

하긴 모습까지 드러냈는데 무마할 방법도 없다.

“내래에 만내서 왕으 아델게 나기하겠디.”

“……”

현규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장범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살다 살다 보니 마수의 사투리를 통역하는 날도 오네. 나중에 만나서 왕의 아들에게 얘기하겠다는데 설마 그게 너야 중2병이 덜 나았니”

“……대충 비슷해요.”

현규하의 입가에 짧은 조소가 어렸고, 왕의 아들이라는 말에 입만 벌리고 있던 인유신도 흠칫했다.

뭔가 말을 할 거 같았던 고래가 눈동자를 끔뻑했다.

“왕자님, 이만 가겠음. 다른 사름덜이 옴메.”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고래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고, 전투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뿌연 흙먼지를 헤집으며 한준수와 나르샤의 길드원들이 달려왔다.

“길드장님!”

중상을 입은 공태성을 목격한 힐러가 급히 치료를 시작했다. 방금까지 허공을 부유하던 거대한 고래는 전혀 보지 못한 기색이었다. 크기로 보아서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목격했을 게 분명한데도.

“허.”

장범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준수야, 방금 뭐 본 거 없어”

“죽빵을 날리고 싶은 씹새끼라면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만”

“장범.”

공태성의 짤막한 호명은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꺼내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장범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털어 냈다.

“어떻게 이 던전을 찾은 거야”

“길드장님이 오늘 급하게 이 던전을 경비하던 사람들을 철수시켰잖습니까. 혹시나 해서 와 봤죠.”

“오, 똑똑해. 쓸데없는 일에만 예민한 줄 알았더니 우리 준수의 촉이 좋은걸”

“입 닥치시죠. 아까 전화만 떠올리면 목을 뽑아 버리고 싶어지니까.”

“옙.”

못 본 사이에 10년은 늙은 거 같은 얼굴로 한준수가 현규하와 인유신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길드장님과 현 헌터가 싸운 겁니까 유신 씨는 어디 다친 데 없고요 힐러 있으니까 치료해 줄게요.”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한준수는 현규하에게는 치료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고 대신 장범을 노려보았다. 당장 전후 사정을 불라는 사나운 눈빛이다. 장범이 볼을 긁적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너도 알잖아. 규하랑 파파가 삼각관계라는 거.”

“뭐!”

“유신이 두고 둘이 싸웠어.”

한준수만이 아니라 인유신마저 눈이 튀어나올 거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장범은 태연했다. 현규하와 공태성은 인상을 사납게 찌푸리긴 했으나 침묵했다. 어쨌든 심장이니 뭐니 하는 얘기를 꺼내지 않고 무마해야 한다는 건 둘 다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당연히 공태성을 잘 아는 길드원들은 믿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그럴 리가. 길드장님이 부회장님한테 얼마나 구질구질하신데…….”

“나는 솔직히 길드장님이 양사가 저택 앞에서 비 맞으면서 7박 8일 동안 서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의외로 한준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수긍했다. 진실을 밝히지 않고 무마할 거란 뜻을 이해한 것이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공태성을 치료하던 힐러가 걱정스레 시선을 올렸다.

“상처가 잘 낫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정화부터 해야 할 거 같아요.”

“그럼 우선 던전에서 나가야 하는데…….”

한준수가 슬쩍 바라보자 현규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인유신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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