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214)
  • 장범은 식겁했다.

    “아니, 미친. 이거 오늘 아침에 리셋된 던전이었는데 저 둘 싸움판에 휘말려서 마수들이 다 떼몰살했다는 거야”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웅장하게 울리는 굵은 종소리와 함께, 지표면이 꿈틀거리며 대지가 솟아올랐다. 둥글게 솟아오른 땅은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심어진 인공산의 형상을 이루었다.

    전방의 회화나무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황색의 곤룡포를 입은 채 목을 매단 시체가, 후방의 나무에는 환관 복장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아마 저 산 자체가 던전의 보스 몬스터인 모양이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위치였다. 장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위치가 좀…… 우리에게 가깝지 않나”

    “어, 그러게요…….”

    안 그래도 50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산인데 거리까지 가까우니 훨씬 더 커 보였다. 인유신의 발이 주춤주춤 뒷걸음질했다.

    몇 걸음 물러나기도 전에, 높은 산의 지면이 들썩들썩하더니 수십 개의 뿌리가 튀어나왔다. 장범이 기겁해서 인유신의 허리를 안았다. 발밑에서 일어난 작은 회오리가 그들을 뒤쪽으로 날렸다.

    “자문 학자들이 보스 몹 추측한 것 중에는 촉수 괴물에 호러 무비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의 말처럼 목매달고 죽은 두 구의 주검이 흔들거리는 나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스산한 공포였다. 던전의 시간이 한낮이 아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 공포를 희석하는 게 끝없이 뻗어 나오는 촉수 같은 뿌리라는 게 더 문제였지만.

    재빨리 거리를 두었으나 ‘누구도 응하지 않는 종소리’의 몸체가 워낙 거대했기에 그리 큰 차이가 있지도 않았다.

    장범이 간디바의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희게 빛나는 한 대의 화살이 메겨지자, 그것을 하늘로 쏘았다. 하늘로 날아간 화살은 최고점을 지나 아래로 꺾이는 순간 수십 대로 분할되어 내리꽂혔다.

    파바박! 돌풍을 동반한 수십 대의 화살이 ‘누구도 응하지 않는 종소리’에게 격중하는 파열음에 이어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뿌리들이 꺾이고 개중에서도 중심이었던 굵은 뿌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렸으나 워낙 거대한 몸체였다.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었다.

    “야! 거기 두 놈들! 싸울 때 싸우더라도 보스 몹은 잡고 싸워! 여기 유신이 있다고!”

    짜증을 섞어 크게 외친 장범은 팔찌를 풀어서 인유신에게 던졌다.

    “마나 주입하는 방법은 알지 그거 발동하고 저쪽 바위 뒤편에 가서 숨어 있어. 내가 보스를 유인해서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까.”

    “저한테 이걸 주시면 장 헌터님은요!”

    “실드 친 상태에서는 못 싸워!”

    장범은 인유신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개바람을 일으켜 하늘로 몸을 띄웠다.

    “쓰읍. 파파가 있었다면 불로 확 태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의 신장보다 긴 장궁에 다시 빛나는 화살이 메겨졌다. 그렇지만 인유신은 구태여 실드 코어를 가지고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익숙한 인영이 저 먼 하늘에서 보였다.

    간디바에서 화살이 쏘아지기도 전이었다. ‘누구도 응하지 않는 종소리’의 몸체 위로 무너지고 부서진 궁전의 잔해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곧 내리꽂혔다. 황제의 용포를 입은 시체에 금을 씌운 옥좌가 내던져지는 모습은 상당히 아이러니했다.

    전신에 가해지는 충격이 아까 장범의 공격을 받았을 때보다 더 컸던 모양이다. 구강이 없어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누구도 응하지 않는 종소리’가 발작하듯이 거대한 몸을 비틀었다. 웅장하게 울리던 종소리에 쇳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장범이 간디바를 거두며 혀를 찼다.

    “겁나 빠르네.”

    그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옆으로 내려온 현규하에게 인유신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규하 씨!”

    레스토랑에서 보았을 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설령 죽기 직전이더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남자였다. 인유신은 다짜고짜 그를 붙잡고 버프부터 걸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시체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안색이 돌아오며 소진된 마나가 빠르게 차올랐다. 잠시 숨을 멈췄던 현규하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저야 멀쩡하죠! 힐도 더 할 수 있어요.”

    방금까지 살벌한 전투를 했을 텐데도 자신부터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가슴 안의 무언가가 울컥 터질 것만 같았다.

    인유신은 감정을 추스르며 재빨리 그를 살폈다. 큰 부상은 없어 보였지만 자잘한 화상은 여기저기에 있는 듯했다.

    급히 앞으로 뻗은 손이 현규하에게 붙잡혔다. 분명히 원기를 회복시켜 주었는데도, 붙잡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기에 인유신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현규하가 얕은 한숨과 함께 인유신의 손가락 끝에 가만히 입술을 눌렀다. 몹시도 차가운 입술이었다.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규하 씨는…….”

    인유신이 눈동자로 허공을 훑더니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현규하는 쓴웃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아마 상태창을 확인한 것 같았다. 상태창에 나오는 제 감정이 어떠할지 알기에 그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유신 씨가 나를 걱정할 때마다 19년 전의 그 꼬마가 떠올라요.”

    “예”

    “정말 어리고 작아서, 내가 없었다면 금방 죽었을 만큼 아무것도 못 하는 그런 아이였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갸웃하는 인유신의 얼굴 위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앙앙 울던 꼬마가 떠올랐다. 제 두려움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현규하가 다치는 걸 걱정하고 울던 그 작은 온기.

    나는 이 사람도 그 아이처럼 온전히 나에게만 의존해 주기를 바랐던 것인가. ……얼마나 지독한 이기심인지. 언젠가 반드시 그의 곁을 떠나야 하는데도.

    〈규하 씨 없을 때도 자취하면서 혼자 잘 살았는데요, 뭐.〉

    그 말처럼, 인유신은 그를 만나지 않았을 때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혼자 씩씩하게 제 삶을 살았다. 그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하여도 그 삶에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인유신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자신과는 달리.

    현규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미소를 가장하여 덧그렸다. 인유신의 손이 닿은 일점으로부터, 온기가 느릿하게 번져 갔다.

    “유신 씨가 그 아이처럼 약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저는 8세보다도 약한데…….”

    “아니요. 유신 씨는 나 같은 것보다 강한 사람이에요.”

    인유신이 대답하기 전, 회오리바람 위에서 장범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얘들아, 뜨거운 해후는 다음에 이어서 하고 지금은 보스부터 잡으면 안 되겠니”

    현규하의 공격에 타격을 받았던 ‘누구도 응하지 않는 종소리’가 그새 회복하여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현규하는 마지막으로 인유신의 손을 꽉 쥔 뒤에 놓았다.

    “금방 끝내고 올게요.”

    멀리서 들리던 종소리가 서서히 멎었다. 모든 것을 불사르며 멸하는 지옥의 겁화도 꺼진 지 오래였다.

    공태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동강이 난 남목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망자의 원혼이 깃든 칼날은 베었을 때 상처를 썩게 한다. 그 덕분에 출혈은 심하지 않았지만, 피가 흐르는 상처와 썩어 들어가는 상처 중 어느 쪽이 치명적인지는 뻔하다.

    “파파, 살아 있어”

    “죽었다.”

    “오, 켄묘렌도 부러졌네. 저거 귀속 아티팩트랑 상성 맞춘다고 힘들게 구한 거잖아.”

    “규격 외의 괴물에게는 상성이고 나발이고 쓸모가 없더군.”

    공태성은 제 다리를 자르기 직전, 인유신이 던전에 있다는 장범의 외침을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갔던 현규하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은 장범이 상처를 유심히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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