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14)
  • 현규하는 공태성에게 호의도 호감도 없다.

    민끝녀가 아버지 민 회장과 강석우를 비롯한 숱한 사람들을 몰살한 현규하와 친하게 지내는 걸 공태성은 거북하게 여겼고, 그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현규하도 자신을 꺼리는 사람에게 호의를 돌려줄 호인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유지되어 왔다.

    그러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건 재작년부터였다. 공태성은 뻔히 다른 속셈이 있는 눈빛이라는 걸 숨기지도 않으며 그를 길드에 영입하려 했고, 현규하는 단칼에 거절하는 걸 반복했다. 악화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회령 다녀왔을 때랑 시기가 얼추 겹치는군.’

    회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공태성을 고문해서 알아내면 된다. 사지를 자르더라도 입만 남아 있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의 궁금증 따위는 인유신을 이용했다는 분노에 비하면 가볍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유신 씨와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지.’

    적어도 인유신에게 그가 관심을 표한 이유와, 인유신의 상태창에 그의 알림이 출력되는 원인 정도는 알아내야 했다. 만약 인유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전부 제거해야 하니까.

    자신이 이아드로 가기 전에.

    ‘남은 열쇠는 두 개.’

    현규하는 저도 모르게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열쇠의 남은 개수는 곧 남은 시간과도 동일하다.

    천천히 그는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몇 년이 될지, 혹은 며칠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언제 그때가 당도하더라도 인유신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자신의 재산 따위는 하찮은 가치일 테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공태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의 의도를 알아낸 뒤에는……. 민끝녀와 민안나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가볍게 털어 냈다.

    결론적으로 역시 그냥 죽여야겠다고 현규하는 결심했다. 어차피 인유신을 걸고 도발한 순간부터 그의 처우는 결정된 것이다.

    다만, 공태성을 싫어하며 죽이겠다는 결심까지 한 현규하가 판단하기에도 그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치는 것만으로도 하얀 불길이 뱀처럼 뻗어 나와 아가리를 벌렸고, 불꽃을 두른 칼이 사각에서 급소를 노렸다. 원거리와 근거리 모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공방 일체의 이능이 현란하게 사방을 수놓았다. 아홉 겹의 담벼락이 붕괴하고 정원의 화초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원거리든 근거리든 아무 상관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인유신이 이용당한 걸 알고 머리끝까지 피가 올랐던 현규하는 전투에 임하며 오히려 냉정해졌다. 오른손에 쥔 사인참사검으로 날아오는 화염구를 베어 내며 도약한 현규하의 앞을 불길을 두른 칼이 가로막았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서늘한 검명이 연이어 귓전을 찢었다. 공중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에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힘을 싣는 공격을 받아 내는 공태성의 발이 차츰 뒤로 밀려났다.

    현규하는 내심 조소했다. 공태성이 벌써 밀린다고 천만에.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도 개의치 않았다. 유인해서 무슨 수작을 부리든, 전부 짓밟아 주면 되는 일이다.

    어느새 두 사람은 던전의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어섰다. 겹겹이 세워진 높고 웅장한 전각들이 그들을 맞았다. 생명체를 인식한 던전에서 마수들이 생성되고 있었지만 둘 모두 거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현규하는 참사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턱짓했다.

    “해 봐.”

    “음”

    “트랩이든 뭐든 준비해 놓은 거 있을 거 아니야. 전부 박살 내고 목을 따 줄 테니까 해 보라고.”

    공태성이 픽 웃었다.

    “알아서 자만하여 방심해 준다면 나야 고맙지. 이쪽은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보니.”

    “네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도 처참하게 처발려야 하니까. 그래야 유신 씨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고 뼈저리게 후회하겠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안다고 강석우 박사에게 안 배웠나”

    고의로 꺼낸 한 사람의 이름은 현규하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리게 했다.

    “좋아, 결정했다. 끝녀 누나는 네 시체도 못 찾아서 빈 관으로 장례식을 하게 될 거야.”

    “네놈은 장례 치러 줄 사람도 없는 거고.”

    말과 함께 공태성은 아공간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내 찢었다. 현규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스크롤을 찢어서 공태성이 제한된 시간이나마 다룰 수 있게 된 스킬은 그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사이코키네시스다.

    마수들이 기성을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지만 공태성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아공간을 크게 열었다. 현규하는 직감했다. 그의 고유 능력이 파이로키네시스이니 아공간에서 화염이라도 두른 무기들을 사출할 작정일 것이리라고. 자신이 가끔 활용하는 것처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추측이었다.

    아공간에서는 미리 채워 둔 무언가들이 빠르게 사출되었다. 현규하는 재빨리 역장을 두르며 상황을 파악했다.

    투명화 스킬이라도 미리 걸어 둔 것인가. 그렇다면 무기 아니다. 무기가 허공을 가를 때의 소리나 기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규하다. 이건 장병기의 기척이 아니었다. 암기 아니, 그보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훨씬 작은…….

    “……!”

    생각은 길었지만 실제로는 1초도 지나지 않았다. 현규하가 사출된 무언가들의 정체를 파악했을 때, 거대한 백염의 폭발이 던전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폭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연쇄적으로 쾅쾅 터지며 현규하를 덮쳤다.

    공태성이 사출한 것은 극도로 압축한 화염이었다. 겨우 손톱만 한 크기였으나, 그것은 폭발하는 순간 단독 주택 한 채는 우습지도 않게 먹어 치울 만큼 압도적인 위력의 화마가 되었다.

    폭발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공태성이 현규하를 유인한 곳은 겹겹이 증축된 전각들 사이였다. 폭발에 휩쓸린 벽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기울며 지붕이 붕괴했다. 그 모든 가운데에는 현규하가 있었다.

    “끼에에에!”

    애꿎게 폭발에 말린 마수들이 연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칫.”

    현규하는 이를 으득 악물며 폭발의 충격이 닿을 때마다 흔들리는 장벽을 유지했다. 사방에 화마가 이글거리고, 건물이 무너지는 뿌연 먼지로 시야가 흐렸다.

    ‘시야부터 틔워야겠어.’

    어느 정도 폭발이 가라앉았을 때 먼지를 밀어 내기 위해 현규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역장에 무언가가 부딪혔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다시금 연쇄적으로 폭발이 터지기 시작했다.

    현규하는 깨달았다. 아주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폭발하는 압축된 화염이, 사방에 지뢰처럼 깔려 있다는 사실을.

    마나의 흐름을 파악하려 했지만 유달리 마나의 농도가 높은 던전이라 쉽지 않았다.

    ‘제법 대가리를 굴렸는데.’

    나직이 비웃었다. 그를 사냥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하고 설계한 함정이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무너질 건물들이 즐비한 드넓은 황궁, 마나의 농도가 높아 추적하기 힘든 던전.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다시금 연이은 폭발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 화염에 전혀 해를 입지 않는 공태성의 칼이 날아올 테고.

    현규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회령에서 서울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전속력으로 날아오느라 급속도로 소진한 마나로 인한 두통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다시 마나를 쥐어짤 만하다.

    지뢰처럼 온 사방에 깔린 폭발물. 그와 비슷한 보스가 출몰하는 던전을 이미 겪은 적이 있다.

    ‘파리스의 심판이 배경인 던전이었지.’

    보스 몬스터로 나왔던 황금 사과의 폭발보다 공태성의 화염이 몇 배는 더 강력하다는 것을 현규하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규하는 그때 썼던 공략법을 반복하기로 했다. 사방에 지뢰가 깔려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고 그럼 전부 터트리면 그만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역장을 더욱 두껍게 몇 겹으로 두른 현규하는 양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바닥으로 중압을 내리꽂았다.

    빼곡하게 깔려 있던 압축된 화염들이 일거에 터지며,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수백, 수천 발의 폭탄이 동시에 터지는 전장의 한가운데가 이와 같을까.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새하얀 화염에 살라 먹히고 있었다. 염제라는 공태성의 이명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역장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고막이 전부 찢어지고도 남았을 굉음이 천지사방을 뒤흔들고, 터져 나온 백염이 사납게 사방으로 몰아쳤다. 화마의 열기와 짙은 연기가 폭풍처럼 휘돌았다.

    쿠르릉! 수천 칸의 방들이 연속하여 불타고, 무너지며, 전소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마수들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폭사했다.

    겹겹의 역장 가운데에서도 폭발의 여파로 인한 충격이 연이어 들이닥쳤다. 시야가 어질어질하게 뒤흔들렸다. 아니다. 현규하는 속에서 왈칵 치미는 선혈을 한 모금 뱉으며 정정했다. 다시 두통이 시작된 탓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정도 페널티는 그를 방해하지 못한다.

    현규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전방을 주시했다. 마나가 아니라 화염의 흐름을 좇았다. 코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연기와 백색 화마가 어지러이 뒤엉켜 있지만 공태성을 찾아낼 방법은 있다. 공태성은 자신의 능력에 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니…….

    ‘찾았다.’

    화염의 농도가 가장 옅은 곳.

    콰가가가각! 참사검에서 발출된 무형의 칼날이 지면을 터트리고 마수를 양단하며 매섭게 내달렸다. 검압에 쓸린 화마와 연기가 걷히며 드러난 틈으로 공태성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발출된 기운이 공태성을 반으로 쪼개기 직전, 검은색의 불길이 화르륵 치솟았다. 지금껏 그가 다루었던 백염과는 판이한 검은색의 불은 무형의 기운마저 살라 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현규하는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숨겨 둔 한 수 정도는 있었다는 건가.

    “그거 뭐야.”

    “아비지옥.”

    지옥의 겁화였나. 현규하는 생각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역장을 거두자 폭사한 마수들의 피비린내와 살점이 타들어 가는 역한 노린내가 훅 끼쳐 왔다. 아랑곳없이 단번에 허공을 격하여 칼을 휘둘렀다.

    공태성은 여유롭게 검은색 불길을 두른 칼을 움직였다. 아티팩트도 아닌 참사검 정도는 이 불길을 뚫지 못하고 녹을 것이다.

    카아앙! 칼과 칼이 부딪쳤다. 지옥의 겁화에 칼날이 녹지 않고 검명이 찢어졌다. 공태성은 눈썹을 움찔했다.

    어느새 현규하의 손에 있는 건 지금까지 쓰던 참사검이 아니라, 신비를 자르는 칼인 발리사르다(이탈리아 시인이 쓴 서사시에 나오는 무기)였다.

    “정말 바리바리 아티팩트를 싸 들고 다니는군.”

    “이렇게 쓸 데가 있잖아.”

    아티팩트를 소지하고 있다는 건 차치하고도, 급박한 그 순간에 카운터가 될 무구를 재빨리 판단하는 천부적인 전투 센스가 무엇보다 위협적이다. 익히 알고 있음에도 공태성은 얼굴을 사납게 굳혔다.

    삽시간에 검격이 교환되며 칼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겁화가 사위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면, 발리사르다가 불길을 가르며 서늘한 냉기로 메웠다.

    공태성의 전완이 한 차례 빛나며 귀속 아티팩트의 힘이 칼날에 깃들었다. 웅웅웅. 원혼의 귀곡성이 스산하게 번졌다.

    챙! 좌상단에서 내리긋는 현규하의 칼날을 공태성이 받아쳤다. 묵직한 힘이 위에서 아래로 실렸다. 끼기긱. 칼날이 서로를 긁으며 소름 끼치게 울었다. 호흡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현규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그거 켄묘렌(일본의 전설 속 무기)이지 왜놈 칼이나 쓰는 새끼.”

    “씨발. 상성 때문이라고. 최진혁이 지랄하는 거로도 지긋지긋하니까 네놈은 닥쳐.”

    일본 요괴의 칼, 수만 명의 원혼을 끌어낼 수 있는 일본 전장의 아티팩트, 거기에 일본에도 전래된 지옥의 겁화. 그의 말처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성이었다. 하지만 현규하는 차갑게 비웃었다.

    “상성 따위는 노오력으로 극복하면 돼.”

    그는 줄피카르를 꺼내지 않고서 튀르키예의 귀속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하여, 이탈리아의 일반 아티팩트인 발리사르다에 덧씌웠다.

    [귀속 아티팩트 ‘계승자 파디샤의 영원한 정복’을 일부 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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