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규하도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장소를 옮기자는 제안에는 순순히 동의한 듯하다. 아마 레스토랑에서는 인유신이 싸움에 휩쓸릴지도 모르기 때문이겠지.
공태성은 쓴웃음을 베어 물며 집검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현규하의 눈동자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이 정도면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에게 인유신이 납치되었을 때만은 못해도 아주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건 확실해 보인다. 하. 공태성은 차라리 웃어 버렸다.
“너, 무슨 수작이야”
으르렁거리듯 내뱉은 한마디는 여러 의미를 내포했다. 그냥 한판 붙자고 했어도 기꺼이 밟아 줬을 텐데 유신 씨까지 끌어들인 속셈이 뭐냐,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자신이 인유신을 인질로 삼거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 말이다.
“널 죽이려고.”
“나를 네가”
“그러니 너도 나를 죽일 작정으로 달려들어야 뒷맛이 덜 찝찝하겠지.”
현규하가 날카롭게 조소했다.
“마치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못 죽일 이유가 있나”
“그 뒤에 세계의 틈을 벌리고 마수를 소환해서 지구 정복이라도 하려고”
“무슨 소리인가.”
이 와중에도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으나 딱히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공태성은 순순히 대답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더 이상 그에게는 비밀로 할 게 아니었다. 그가 죽든 자신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죽어서 여기를 나갈 테니까.
“네 심장이 필요하다.”
“변태 새끼. 끝녀 누나도 네가 남의 심장에 발정하는 변태 성욕자라는 거 알아”
“…….”
공태성은 저 새끼를 꼭 죽이겠다는 결심을 재차 굳히며 말을 이었다.
“네 심장이 있으면 이 철의 시대의 인간인 나도 ®ÀÇ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는군.”
“……뭐”
현규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말뜻을 이해하고 경악했다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가, 이어, 살의. 다시 살의.
“누구한테 그 소리를 들었는지, 네가 ®ÀÇ를 어떻게 아는지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딴 것 때문에 감히 유신 씨를 끌어들여!”
그의 감정이 격앙되자 공기에 파동이 번지며 지표면의 포석이 들썩거렸다.
그딴 것. 그딴 것이라. 그의 말을 되뇌며 공태성은 쓰게 웃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는 필생의 염원이 누군가에게는 겨우 ‘그딴 것’이었다.
“그래, 그딴 것이지. 머리에 피가 올라 이성을 완전히 잃게 하려면 인유신과 연락만 끊을 게 아니라 죽여 버렸어야 했던 건데.”
얄팍한 도발이었다. 평소의 현규하였다면 도발에 넘어가기는커녕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태성이 입에 올린 사람은 인유신이었다.
“…….”
현규하의 얼굴에 감정이 걷혔다. 발을 탁 하고 구른 순간, 섬전처럼 쇄도한 검은 그림자가 공태성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공태성은 손가락을 튕겼다. 불길이 화르륵 치솟으며 그 사이를 뚫고 나온 칼날이 현규하를 겨누었다.
- 뭐라고요
“레스토랑 일 트라몬토 알지 거기서 파파가 규하랑 가볍게 붙어서 유리창 깨지고, 벽도 좀 부서지고, 내부는 더 박살이 나고, 아무튼 그렇게 됐어.”
- 뭐!
“어지간하면 가스 폭발 사고 같은 거로 퉁치고 싶은데 소동이 생각보다 커져서 어려울 거 같아. 아유, 파파는 왜 하필 번화가에서 그 난리를 쳤는지 몰라. 기왕 규하를 꼬셔서 데려온 거, 으슥한 데로 갔으면 얼마나 좋아.”
- 그래서 길드장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범이도 몰라요.”
- 야!
“지금쯤 목격담이 많이 떴을 거 같은데 규하는 밖에서 들어왔으니까 폰으로 찍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수습 좀 어떻게 잘해 봐. 너만 믿을게.”
- 아니, 잠깐만! 왜 싸웠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수습하라는 건데! 설마 지금도 싸우고 있어요!
“범이도 몰라요.”
- 야! 야! 장범!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야 해서 이만 끊을게.”
- 야, 이 개새끼야! 똑바로 안 불어! 네가 헌터면 다냐고!
“어어, 준수야. 나도 사랑해.”
한준수의 우렁찬 욕설이 들려오는 와중에 쪽 소리까지 내서 뽀뽀한 장범은 핸즈프리를 뺐다. 그리고 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 오는 휴대폰의 전원까지 아예 껐다.
“돌아가면 준수가 내 모가지를 뽑아서 죽이려고 하겠네. 옛날에는 귀여웠는데 갈수록 파파를 닮아서 성질머리가 지랄맞아지고 있다니까. 35살에 사춘기가 왔나”
투덜투덜하면서도 장범은 착실히 운전대를 잡았다. 인유신은 초조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필 퇴근 시간대라서 도로가 많이 막힌다.
“더 빨리는 못 가요 규하 씨는 차도 들어서 옮기던데.”
“양심이 없어 어떻게 14살에 S급이 된 괴물한테 연약한 날 비교해 나도 자동차 정도는 들어 올릴 수 있긴 한데 걔처럼 멀리는 못 옮겨.”
“어디 던전인데요”
“파주.”
“……혹시 감악산이에요”
“아니, 시내야.”
감악산이 아니라는 말에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8세가 있는 파우치를 양손으로 꼭 쥐었다. 현규하가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감악산의 던전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불길하니.
“길드장님은 정말 규하 씨를 죽이려고 하시는 거예요”
“어, 그렇대.”
“……왜요 규하 씨랑 사이가 안 좋긴 한데 서로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잖아요.”
“나도 몰라.”
“…….”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진짜 몰라. 길 정말 안 뚫리네.”
장범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굳이 캐물을 이유가 없잖아. 파파는 명령하고 나는 따르는 거야. 그걸로 끝. 오케이”
“하지만 길드장님이 죽을 텐데도 이유도 모르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이야, 유신아. 너는 규하가 반드시 이길 거라고 확신하나 봐”
“예.”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대답에 장범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파파 너무 무시하지 마. 그래 봬도 맨몸으로 길드 하나 일으켜 세우고 규하보다 더 오래 이 바닥에서 굴렀다고.”
“규하 씨는 더 대단한데요.”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어린애를 달래는 투로 대꾸한 그는 더 말을 걸지 않고 전방만을 바라보았다. 인유신도 초조한 감정을 꾹 누르며 현규하의 상태창만을 불안하게 살폈다. 현규하가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도 뭐가 불안한 걸까. 뭐가.
도로는 여전히 번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