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14)

계측된 장소인 오봉산은 함경산맥의 한 줄기였다. 함경도의 산답게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올랐다. 좌표는 거의 산봉우리 근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 높이 떠올라서 관찰하기도 하고, 숲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였으나 그냥 평범한 산이었다. 마수들의 출몰에 겁먹은 짐승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웅크린 기척도, 급격하게 몰아치는 마나의 파동 따위도 없었다.

던전으로 통하든 마수만 토해 내든 현실을 침식하든 그 외의 무엇이든, 모든 게이트는 ‘게이트’라는 이름 그대로 현실의 세계와 다른 세계를 접목한다.

‘아마도 돌발 게이트와 비슷한 성질의 마나 파동을 가진 게이트가 열렸던 것 같군.’

만약 그 게이트가 완전히 닫히지 않고 지금도 마수들을 내보내고 있다면, 마을에 마수가 간간이 나타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설명되었다.

현규하는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공태성이 세계의 틈을 벌려서 마수들을 소환하여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 라는 상상까지 떠올려 보았지만 곧 폐기했다. 기껏해야 마수 몇 마리가 기어 나오는 정도라면 스케일이 너무 찌질하지 않나.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미세한 마나 파동까지 추적하는 건 현규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관측소의 슈퍼컴퓨터나 관련 특성이 있는 각성자라면 모를까.

어쨌든 돌아가서 다시 고민해 볼 일이었다. 인유신과 관계가 있거나 그에게 해가 될 문제가 아니라면 공태성이 뭘 하든 굳이 파고들 작정은 아니었다. 인유신과도 의논을 해 봐야겠지만, 민끝녀와 공유하여 공태성에게 직접 캐묻는 게 나을 듯하다.

결론을 내린 현규하는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기차표를 검색해 보니 청진행 기차는 1시간 30분 뒤에 있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는다.

청진에서 환승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기차까지 끊은 뒤 문자를 작성했다. 도착 시각을 알면 서울역까지 마중을 나오려 할 테니 그 부분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너무 늦으면 바로 오피스텔로 돌아갈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요. 맛있는 거 사 갈게요.]

이모티콘 하나 없이 또박또박 쓴 문자를 보내려 했으나 전송이 되지 않았다. 1,400미터에 가까운 높은 산이어서 전파가 불안정한 모양이다.

현규하는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허공을 날아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고 전민수에게도 들은 바에 따르면 관광객이 주로 사 가는 회령의 특산품은 귀밀떡과 백살구였다. 살구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인유신은 살구빵을 더 신기해할 거 같았다.

현지인 전민수에게 추천받은 역 근처의 유명한 가게에서 귀밀떡과 백살구빵을 샀다.

‘살구빵은 처음 먹어 봐요.’

신기한 표정으로 백살구빵을 오물오물 먹는 인유신의 얼굴이 절로 떠오르며 입가가 느슨해졌다. 그의 입맛에 맞으면 주말에 가볍게 여행을 와도 좋을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여름휴가 때 느긋하게 해외여행을 가고 싶지만 6세를 데리고 해외까지 나가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인유신이 나이도 많은 6세를 두고 여행을 가지도 않을 테고.

‘이참에 자가용 비행기라도 살까. 유신 씨가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빌렸다고 하면 될 거 같기도 한데.’

6세의 나이도 2살이 훌쩍 넘었으니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유신이 마음의 한편을 의지하는 6세가 죽는 것도 걱정이고, 그로 인해 슬퍼할 인유신은 더욱 걱정이다.

인유신은 정이 많은 사람이다.

플랫폼 대기실의 의자에 앉은 채 현규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 정이 많은 사람의 곁에, 자신은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이아드로 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서만 달려온 그는 미래를, 10년 후를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10년 후에도 자신은 통로를 찾아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이아드로 건너가 모든 걸 끝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죽었을까.

어째서일까. 그 모든 광경에는 인유신이 없다.

현규하는 왕이 완공한 도시를 홀로 무너트릴 것이란 오랜 결심을 떠올렸다. 인유신이 그의 짝인 ¦°ø¾Îð, 크르스니크라는 걸 알게 되어도 변하지 않은 결심이다.

14년 전에 공략했던 던전이 떠올랐다. 뱀파이어 사바 사바노비치와 그를 사냥하는 두 명의 뱀파이어 헌터, 담피르와 크르스니크가 나타났던 그 던전을. 환영 속에서 그들을 볼 때만 해도 현규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철의 시대에는 크르스니크가 태어나지 않을 거라고.

지금도 모르겠다. 신이 떠나갔으며 뱀파이어 또한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어떻게 크르스니크의 운명을 가진 인유신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하지만 인유신에게 그 특성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악신 네쿠라툴이 빚은 최초의 뱀파이어를 죽인 이래 담피르와 운명을 하나로 엮어 왔던 크르스니크. 담피르로 태어날 수밖에 없던 그의 유일한 짝.

최초에 했던 결심은 저의 운명에 타인을 끼워 넣지 않겠다는 독선적이며 회의적인 인간 불신이었다. 하나 이제 그것은 이 운명으로부터 인유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애정으로 바뀌었다.

인유신이 이아드에 알려지는 것도, 크르스니크로서 확실히 각성하게 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니.

‘젠장. 이쪽 세계에 미련 따위는 없었는데.’

하여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현규하는, 인유신으로 인해 비로소 소유하게 된 유일한 것만을 그의 곁에 두고 가려 했다.

바로, 자신의 진심을. 그 하나만을.

그렇게 생각하면 인유신이 히든 보스의 손아귀에서도 자신을 반지로 부르지 않을 만큼 필요로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나 이성으로 그리 결론을 내리면서도, 한편으론 인유신의 ‘필요’가 되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 바르고 곧은 그의 곁에 부끄러움 없이 서고 싶은 자신이 있었다.

인유신은 모든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내버리던 자신을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조금 더 나은 길로 나아가게 이끈다. 인유신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던 이 세계에 가치를 부여한다.

신이 떠나간 이 세계에 기적이 존재한다면, 그 이름은 바로 인유신이다.

그가 몹시 그리워졌기에, 현규하는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전송되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 전송되지 않았다.

다시 문자를 보낸다. 전송되지 않는다. 보낸다. 전송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전화를 건다…….

“우아아악!”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온 사방이 아우성이었다. 대기실은 벌써 박살이 나 있었다. 의자며 쓰레기통들이 전부 허공을 날아다니고, 공중에 뜬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기둥이며 육교를 붙잡았다. 전광판은 이미 뜯겨 나간 지 오래였다.

멀리에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내려온 역무원들이 주변을 휩쓰는 이능의 역류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새파랗게 질렸다. 현규하는 그때서야 가까스로 이성을 1할이나마 회복했다.

바닥으로 완만하게 스르르 추락하는 사람들 옆으로 뜯기고 박살 난 파편들이 쿵쿵 떨어졌다. 플랫폼의 이변을 목격한 열차가 속도를 늦췄다.

사람들을 부축하고 철로가 무사한지 살펴보는 역무원들을 지나 현규하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간신히 ‘무닌의 눈’을 떠올렸다.

“‘무닌의 눈!’”

비명처럼 외친 시동어에 좌표가 떴다. 타기팅이 된 광원이 깜빡거린다. 이다음엔 뭘 해야 하는 거였지. 현규하는 늑골을 부러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세게 박동하는 제 심장 위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멍이 들 정도로 퍽 퍽 후려갈겨 통증이 뇌리를 찢은 뒤에야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건지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지도를 꺼내서 좌표를 비교하고……. 어디인지…….’

깜빡거리는 빛의 위치는 백화점이었다.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멈추기도 하고 천천히 둘러보기도 하며,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구속되거나 끌려가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움직이는 경로를 봐서는 자유로워 보인다.

현규하는 얼굴을 감싸며 그제야 숨을 토했다.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식은땀이 목깃과 관자놀이에 끈적거리며 흘러내렸다.

자신의 휴대폰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심호흡을 거듭 반복하여 권성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인유신은 연구원에서 권성길의 공방에 간다고 했다.

- 규하냐 회령에 갔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바로 전화를 했구만.

저간의 상황을 모르는 권성길이 유쾌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의 문제가 아니다.

“……유신 씨, 언제 나갔어요”

- 너 목소리가 왜 그…….

“유신 씨요.”

감정의 고저 없이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탁한 음성이 권성길의 말문을 막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 한참 됐지. 3시 되기 전에 나갔어.

“유신 씨에게 전화 한 번만 해 줘요.”

- 잠깐만.

가게의 전화를 쓰는지 권성길이 잠시 분주해졌다. 이어 당혹한 음성이 돌아왔다.

- 전화가 안 되는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현규하는 가슴 안으로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권성길의 음성도 몹시 조급해졌다.

- 유신이와 연락이 안 되는 거냐 너 그거, ‘무닌의 눈’은!

답할 겨를도 없었다. 다음 순간 현규하는 서남쪽으로 빛살처럼 몸을 내쏘았다. 회령에서 서울까지는 500킬로미터가 넘는다.

그 먼 거리를 사이코키네시스를 이용해 전속력으로 날아가면 마나가 흘러넘치는 그에게도 버거울 터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성의 냉정한 계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이, 태양이, 구름이, 새가, 비행기가 시야를 찢어발길 듯이 빠른 속도로 치닫는다. 칼날 같은 바람이 몸을 후려치고 매서운 울음을 토한다.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곤두서 있음에도 모든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그의 심장에 새겨진 하나의 단어.

- ……하야! 근처 공방…… CCT…… 부탁…… 태성…….

끄는 것도 잊은 휴대폰에서 권성길의 다급한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단절되며 지직거렸다. 현규하의 손아귀에서 휴대폰이 우지끈 박살 났다.

실로 오랜만에 ‘인간’을 향한 살의가 들끓어 오른다. 눈앞으로 14년 전의 새빨간 핏물이 짙게 번져 흐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일 것이다.

해가 기울었다. 기온이 낮아졌나.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도 느낄 수 없다. 거친 바람에 노출된 피부의 감각은 마비된 지 오래다.

연신 깜빡거리는 좌표의 광원이 이동했다. 빠르다. 움직이는 경로로 보아 지하철은 아니다. 일정 구역마다 정차하는 일도 없다. 자동차다. 공태성의 차인가. 뿌드득. 잇새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이동한다. 이동한다. 멈춘다. 어느새 하늘 높이 치솟은 마천루가 경로를 방해했다. 장시간 과도한 마나의 남용으로 인해 과부화된 뇌가 욱신거렸다. 상관없다. 바로 저곳에.

그가 있다.

  

“……!”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부르스케타였다. 현규하와 먹은 한우구이보다는 덜했지만.

“뺙!”

8세도 면봉처럼 짧은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앞접시에 정신없이 코를 처박았다.

“입맛에 맞나 보지”

“존맛이에요.”

연신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인유신은 다음 월급날이 언제인지 떠올렸다. 월급 받고 현규하와 또 같이 오면 좋겠다.

다음으로 나온 뇨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맛있게 먹는 8세를 보니 제 돈으로 사 먹이는 게 아닌데도 흐뭇해졌다.

뇨끼와 트러플을 입으로 옮기며 공태성이 무심하게 물었다.

“현규하와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

“틈틈이 문자 보내는데 아직도요.”

휴대폰만 회령의 산속 깊은 곳에 잃어버리고 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연락이 안 되었다.

걱정스레 현규하의 상태창을 띄운 인유신은 그만 포크를 놓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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