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214)
  • “찍! 찌익!”

    “잘했어!”

    인유신도 흥분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연구원들도 오오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8세는 으쓱으쓱하게 손바닥에서 폴짝거렸다.

    연구원에서 테이머의 훈련법을 배우며 틈틈이 8세의 변형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하늘다람쥐와 날다람쥐 등의 시각 자료를 8세에게 보여 주면서 실험해 본 결과, 익막을 형성하는 건 성공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때마침 현규하에게 영상 통화도 걸려 왔다.

    “규하 씨! 8세가 날았어요!”

    “찍!”

    - 네

    “날다람쥐처럼요! 나중에 회령에서 돌아오시면 보여 줄게요! 오늘 저녁에는 오는 거죠”

    - 아, 지금 연구원에 있죠

    “비번이니까 집에서 할 일도 없어서 그냥 8세랑 훈련이나 하고 있어요.”

    - 흠, 오늘은 그거랑 같이 안 나왔나 보네요.

    “그거요”

    - 그거요, 그거…….

    “뀨뀨요”

    - 네. 그 수치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거요.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라는 이름도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뀨뀨는 입에 담는 것조차 창피해한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인유신은 그냥 실없이 웃었다.

    - 좀 늦거나 내일 새벽에 돌아갈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기다리지는 마요.

    “회령에 볼일이 많이 남았어요”

    - 공태성이 회령에 들렀던 이후에 뭔가 이상이 생기긴 했는데 정확한 연관성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애먼 곳에서 삽질하는 거 같기도 하네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 무리할 만큼 찾아야 할 게 많지도 않아요.

    화면 너머로 현규하가 엷게 미소했다. 뒤에 보이는 풍경은 어딘가의 사무실 같았다. 그리고 오늘도 이어지는 잔소리 퍼레이드 끝에 전화를 끊었다.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8세와 조금이나마 성과가 있었던 건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하다못해 나한테 다른 능력이라도 있었다면 좋을 텐데.’

    햄스터를 기르는 것 말고는 효용이 없는 테이밍. 그리고 현규하의 히든 특성 중 하나인 ̵¡©±Ï¶와 세트로 묶이는 거라고 이해하면 된다던 히든 특성, ¦°ø¾Îð.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그의 말을 따르고는 있지만 나중에라도 ¦°ø¾Îð에서 쓸모 있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서, 현규하에게 있어서 소중한 의미일 반지를 헛되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그런 힘을 갖게 된다면.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 벨 소리가 상념을 끊어 냈다. 발신인을 확인한 인유신은 목을 가다듬고 짐짓 활기차게 받았다.

    “형님! 유신입니다!”

    - 어, 유신아. 오늘 퇴근 후에 별일 없으면 공방에 들를 수 있냐

    “오늘요”

    - 발주했던 오레이칼코스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거든. 꼭 오늘 오라는 건 아니지만 네 마나 패턴이 주입되면 바로 작업 들어갈 수 있어.

    인유신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원래 현규하와 같이 가서 마나 패턴을 주입하기로 한 날은 다음 주였지만 작업이 일찍 완료되면 좋을 듯했다. 어린애도 아니니 혼자 가는 게 어려울 것도 없고.

    별일이야 있겠는가.

    “오늘 비번이긴 한데 지금 연구원에 있거든요. 오후에는 갈 수 있을 듯한데 몇 시쯤이 괜찮으세요”

    - 어디 보자……. 1시에 시간이 비는구만.

    “넵. 그럼 그때 뵐게요!”

    좀 더 연습하다가 점심을 먹고 슬슬 출발하면 될 시간이었다. 지금은 일단 제 능력의 활용법에 대해 공부해 보자. 인유신은 의욕을 돋우며 8세에게 물었다.

    “8세야. 힘들어”

    “찌잇!”

    “좋아. 우리 조금만 더 힘내고 점심 맛있게 먹자!”

    “뺫!”

    아공간의 무게는 10킬로그램까지 넉넉하게 늘리기로 했다. 10킬로그램이라면 얼마 안 되는 무게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오레이칼코스 잉곳을 본 인유신은 입이 떡 벌어졌다. 과장 좀 보태어 100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저렇게 많은 오레이칼코스를 녹여서 문신에 쓰려면 전신 이레즈미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아냐. 아냐. 그런 걸 규하가 너한테 하자고 말했겠냐. 가공 과정에서 압축하고 정제하면 엄청 줄어든다.”

    하긴 그것도 그랬다.

    권성길이 모니터 옆으로 손짓해서 앉혔다. 모니터 화면에는 여러 가지 타투 디자인 샘플들이 보였다. 아공간의 최대 무게를 늘리는 것처럼, 문신 시술을 필요로 하는 제작 아이템들이 있기에 대부분의 블랙 스미스들은 타투이스트 자격증도 갖고 있었다.

    권성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디자인 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외주를 맡긴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문신 디자인은 생각해 봤냐”

    “……숫자 7이요.”

    7이 무슨 의미인지 권성길이 알 방법은 없을 텐데도 말하면서 살짝 민망했다. 어떤 디자인이 좋을지 고민을 엄청 했지만, 결국 공태성의 이니셜을 새긴 한준수와 똑같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흐음. 문신 크기에 비례하니까 7만 넣으면 면적이 좀 좁은데.”

    “안 그래도 저도 그게…….”

    그 역시 같은 고민은 했지만 면적이 부족하다고 해서 77이나 777로 하기에는 좀 그랬다. 권성길이 디자인 샘플을 보여 주었다.

    “숫자 7이랑 다른 디자인을 결합해 보는 건 어떠냐”

    인유신도 스크롤을 내리며 유심히 디자인들을 살펴봤지만 느낌이 오는 게 없었다.

    “아니면……. 7을 갖은자로 써서 ‘柒’이나, 로마자 ‘VII’는”

    “오! 로마자가 괜찮을 거 같아요.”

    VII를 기반으로 한 화려한 고딕체 디자인이 더 끌렸다. 인유신이 최종적으로 고른 건 당초무늬로 장식한 디자인이었다.

    “오케이. 시안 도착하면 문자로 보내 줄게. 문신은 어디다 할 생각이냐”

    이번에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이 나왔다.

    “제일 안 아픈 부위요.”

    문신은 어깨 뒤쪽에 하기로 했다. 디자인도 얼추 정하고 오레이칼코스에 마나까지 주입하니 용무는 다 끝났다. 다음에 다시 방문해서 문신을 새기기만 하면 된다. 용량을 늘린 게 조금이라도 현규하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으련만.

    “바쁘실 테니까 이만 가 볼게요.”

    “오냐. 다음에 한가할 때 놀러 와.”

    놀러 오라는 단순한 한마디에 인유신은 잠깐 멈칫했다가, 얼굴을 잔잔한 기쁨으로 물들이며 대답했다.

    “네.”

    공방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방금 공방에서 마나도 주입하고 디자인까지 정했어요. 형님이 나중에 디자인 샘플도 보내 주신대요.’라고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를 쓰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길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인유신은 눈썹을 깜빡거렸다.

    “공태성 길드장님”

    비슷한 타이밍에 인유신을 발견한 공태성도 가볍게 눈인사했다.

    “네가 여긴 웬일이지”

    “공방에 볼일이 있어서요.”

    “현규하도 없이”

    “저도 혼자 다닐 수 있는데요…….”

    “아니, 너 말고. 너와 떨어져 있으면 현규하가 인간 이하의 폐급이 되지 않나.”

    “…….”

    현규하의 이미지 개선을 어떻게 하면 좋지…….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속삭임을 인유신은 힘들게 외면했다.

    “규하 씨는 함경도에 볼일이 있어서요.”

    “함경도”

    “어, 그게……. 개, 개마고원이요.”

    회령까지 간 이유는 공태성 때문이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얼버무리려는데 뜬금없이 생각난 게 개마고원이었다. 공태성도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여름에 휴가 가기 좋은 곳이니 사전 답사라도 하나 보군.”

    “대충요. 길드장님은 무기 보러 오셨어요”

    “딸이 주말에 퇴원해서 퇴원 선물을 사려고 둘러보는 중이다.”

    “따님이 어디 아파요”

    “늘 하는 정기 검사야.”

    대답하는 공태성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어서 깜짝 놀랐던 인유신도 진정했다. 재벌가라서 어렸을 때부터 유별나게 건강을 챙기나 보다.

    그와는 딱히 볼일도 없으니 근황이나 나누는 스몰 토크가 끝났으면 인사하고 헤어져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인유신을 붙잡았다. 자신에게 그의 알림이 뜬다는 걸 알고 있는지 슬쩍 떠봐도 되지 않을까.

    가만히 인유신을 내려다보던 공태성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바쁜가”

    “아뇨”

    “그럼 쇼핑을 좀 도와 다오. 더 이상 무슨 선물을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애들 선물은 저도 잘 모르는데…….”

    “상관없어. 새로운 안목이 필요한 거니까.”

    인유신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으시다면요.”

    현규하는 지금 출발한다고 해도 저녁 늦게야 서울에 도착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선물을 사는 걸 도와줘도 될 듯했다. 게다가 같이 다니다 보면 은근슬쩍 떠볼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사례는 따로 하마.”

    “에이, 사례라뇨. 길드장님께 도움받은 것도 많은데. 저번에 선물해 주신 케이지도 잘 쓰고 있어요.”

    “찍!”

    얼굴만 빼꼼 내밀고 파우치 안에 얌전히 있던 8세가 맞장구쳤다. 그렇게 인유신은 공태성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휴대폰을 톡톡 터치하여 현규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길드장님이랑 밖에서 우연히 만났어요ㅎㅎ 따님 선물 사시는 거 조금만 도와드리려구요. 규하 씨 오기 전에는 끝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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