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글쎄요……. 아무래도 마수가 한두 마리씩 내려오는 일에만 신경이 쏠려 있다 보니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만…….”
기억을 더듬는 듯 골똘히 생각하던 전민수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회령에서 체류 기간이 넉넉하시면 내일 사무실에서 그사이의 게이트 발생 현황과 마수 출몰 자료를 직접 살펴보시겠어요”
“공문도 없는데 그래도 되나요”
“본청의 공무 헌터이시니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현 헌터님이 실마리를 찾아 주신다면 저희로서도 고마운 일이고요.”
시간이 꽤 늦었으므로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전민수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그냥 공태성한테 직구 던지는 게 빠르겠군.’
비즈니스 호텔의 좁은 방에서 현규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말로 물어본다고 순순히 털어놓을 인간은 아니니까 납치해서 고문이라도 하면……까지 의식의 흐름을 뻗다가 민끝녀를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말은 냉랭하지만 민끝녀는 아직 전남편에게 마음이 있는 눈치였다.
만약, 회령까지 내려온 건 전부 헛짓거리였고 공태성이 정말 인유신에게 연애적인 의미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거였다면……. 현규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급히 전화를 걸었다.
- 규하 씨!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 불안정하게 쿵쾅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간신히 잦아든다. 현규하는 제 흔들림이 인유신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6살 많은 것도 확실히 연상이죠”
- 네 당연하잖아요.
“10년쯤 더 일찍 태어날 걸 그랬나 봐요.”
- 규하 씨는 38살이 되어도 지금이랑 똑같을 거 같아요.
“무슨 의미죠”
- 젊게 산다는 좋은 뜻이에요.
“나잇값 못 할 거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인유신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현규하도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웃음을 엷게 입가에 덧그리며 베개에 머리를 기대었다. 보고 싶다.
“영상 통화로 바꿔도 돼요”
- 아, 그럼 저 세수만 금방 하고 10분 뒤에 다시 걸게요.
자다가 깬 얼굴도 몇 번이나 봤는데 새삼 따로 준비할 게 뭐 있나 싶었지만 현규하는 충실히 10분을 기다렸다.
벨 소리가 들려왔다. 인유신의 전용으로 해 둔 트로트 벨 소리다. 그 지긋지긋하던 트로트마저 즐겁게 바꿔 주는 유일한 사람.
휴대폰 화면에 뜬 건 세수를 해서 뽀송뽀송해진 얼굴이 아니었다. 대가리와 눈깔은 비현실적으로 큰 주제에 팔다리는 짧둥하여 8세만큼이나 과하게 귀여운 척을 하는 2등신 솜 인형이었다.
“…….”
- 퇴근하니까 뀨뀨 새 옷이 도착해 있어서 갈아입혔어요. 시판되는 옷인데 규하 씨 재킷이랑 비슷하죠 규하 씨한테 옷 만드는 거 배우기 전에 산 건데 완전 딱이에요.
“…….”
- 인형용 워커도 팔더라고요. 까만색은 품절됐었는데 중고로 구했어요.
현규하는 귀척질만 하는 자신의 솜 인형이 인유신의 손에 소중히 안겨 있는 광경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 인형, 정말 오늘 밤에 끌어안고 잘 거예요”
- 매트리스 머리맡에 나이트 램프 갖다 놓은 작은 선반 있잖아요. 거기에 두려고요.
현규하의 귀에는 인형 나부랭이 따위가 그와 나란히 잠을 잔다는 뜻으로 왜곡되어 들렸다. 정작 자신은 그와 같이 잠을 잔 적이 게이트 밖에서는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주인님은 나랑 그 인형 중에 뭐가 더 귀여워요”
- 규하 씨는 뀨뀨처럼 만지면 몰랑몰랑한 뱃살이 없잖아요.
“…….”
- 규하 씨
“내가…… 더 늙지는 못해도 살을 찌워서 뱃살이라면 어떻게든 만들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 노, 농담이에요!
“곧 뱃살 보여 줄게요. 아무튼 문단속 잘하고 잡상인이나 모르는 사람한테 문 열어 주지 말고, 휴대폰으로 문자 오면 URL 함부로 클릭하지 말고, 햄스터 보여 주겠다면서 나쁜 사람이 꼬셔도 따라가지 말고요. 길거리에서 햄스터 사료 무나 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거나 함부로 받아 와서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한테 먹이면 안 됩니다. 이상한 게 있으면 먼저 팔놈에게 시험 삼아 먹이세요. 그놈은 독극물을 먹어도 멀쩡할 거란 확신이 듭니다.”
마지막까지 잔소리 폭탄을 퍼부은 현규하는 살이 찌는 방법을 검색했다. 단기간에 살만 찌우는 데에는 조폭처럼 개 사료를 먹는 게 제일 효과적인 것 같았다.
‘햄스터 사료를 먹는 거로는 안 되나’
반면에 햄스터 사료는 밀웜부터 곡식까지 나름대로 건강식이었다. 짜리몽땅한 팔다리와 몸통이 굴러다닐 듯 통통한 인형처럼 살이 찐 자신을 상상해 보던 현규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10년 후. 무심코 뱉은 제 목소리가 귓전에 아교처럼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다. 현규하는 입 속으로 다시 그 단어를 중얼거려 보았다. 10년 후. 10년 후의 자신은 38살이 된다.
그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을까, 나는.
뇌리를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해한 순간부터 미래를 포기했는데, 그와 있으니 무의식중에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제 모습이 더없이 낯설었다.
12.
“삐엣!”
“맞아! 그거야!”
“삐야아아!”
의미 불명의 용맹한 울음소리를 내며 8세가 사지를 쫙 벌렸다. 그리고 높은 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다리 사이에 익막이 펼쳐지며 글라이더처럼 멋지게 허공을 활강한 8세는 인유신의 손바닥 안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8세]
[현재 상태 기쁨. 안정. 흥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