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14)
  • 인유신은 작게 하품했다. 어제도 늦게까지 현규하와 데이트하며 바느질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이른 아침에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왔더니 조금 졸렸다.

    현규하가 졸린 눈 밑을 쓸어 주려다, 멈칫 거두고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인유신은 괜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붙잡힌 현규하가 기분 좋은 웃음을 덧그렸다.

    “배웅은 안 나와도 된다니까요.”

    “그렇지만 먼 길을 가시니까…….”

    “걱정되는 건 유신 씨입니다. 내가 없더라도 조심해야 해요.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초록색으로 바뀌어도 바로 건너지 말고 좌회전하는 차가 없는지 몇 초 살펴보고 한 손을 들고 건너야 하고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손잡이를 꼭 잡아야 합니다. 엘리베이터 문에 등을 기대도 안 되고요, 지하철역에서도 선로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세요. 식중독을 특히 주의해야 할 계절이니까 요리에서 조금만 이상한 냄새가 나면 아까워도 그냥 버리세요. 운동하기 귀찮겠지만 식사 후에 산책이라도 해요. 사무실에서는 1시간마다 책상 앞에서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이라도 하고요. 무엇보다 앙증맞은 햄스터가 유혹한다고 해서 주워 오면 절대 안 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를 듣다 보니 잠이 깼다. 남이 들으면 2일이 아니라 2년쯤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저는 2살이 아니라 22살인데요.”

    “그러니까요. 32살도 아니고.”

    “규하 씨 없을 때도 자취하면서 혼자 잘 살았는데요, 뭐.”

    장난처럼 하는 말이지만 어느 정도는 본심이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기댄 것만으로도 과하다. 인유신은 혼자서도 괜찮아야 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현규하가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유신 씨는 무인도에 표류해도 우는소리 안 하고 혼자 뚝딱뚝딱 집 지으면서 잘 살 거 같아요.”

    “집을 어떻게 짓는지 모르니까 동굴에 들어가 살지 않을까요”

    농담으로 대꾸했는데 현규하는 동굴은 야생 동물의 은신처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더 주의해야 한다며 다시 잔소리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살다가 무인도에 표류할 일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찍!”

    파우치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있던 8세가 안심하라는 듯 외쳤다.

    “이놈을 보면 더 불안해지는 느낌이지만……. 주인님이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거 같으면 몸을 던져서 깔개가 되도록. 알겠냐, 고기 방패.”

    “뀨!”

    이윽고 플랫폼으로 기차가 도착한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현규하는 인유신의 손을 한 차례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1시간마다 전화할게요.”

    “어, 음……. 넵! 전화 못 받는 상황이면 문자라도 바로 보낼게요.”

    처음에 3시간 간격이었던 통화 시간이 어느새 1시간으로 줄었다는 자각 없이 인유신은 손을 흔들었다. 기차는 곧 출발했고 차창으로 잠깐 보이던 그의 모습도 사라졌다.

    인유신은 현규하가 세게 잡았던 감각이 남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혼자서도 괜찮아야 한다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인데, 금세 허전해졌다. 빨리 이틀이 지나고 그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인유신은 다음 기차를 타기 위해 내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플랫폼을 나왔다. 현규하가 태워 주지 않는 출근길이다. 늦지 않게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야 했다.

    오랜만에 탄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최악이었다. 거기다가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급히 오르다가 지하철까지 잘못 탔다. 지각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사무실에 골인하여 아침부터 시달린 몸을 추욱 늘어뜨리고 있던 인유신은 주변의 낯선 시선을 조금 늦게야 눈치챘다. 어쩐지 사람들이 그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티셔츠를 거꾸로 입기라도 했나 싶어서 살펴보는데 손바닥에 올라온 8세를 조몰락거리던 최진혁이 의미심장한 말을 툭 던졌다.

    “현규하와 드디어 깨졌나”

    “예”

    “너 없이 내버려 두면 심신 상실이나 다를 바 없는 놈이 혼자 휴가까지 내고 여행을 갈 리가 없지 않나.”

    “…….”

    설마 주변에서도 이미 금치산자 취급을 받고 있었나……. 인유신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규하 씨가 애도 아닌데요, 하하하.”

    “애보다 더하지. 어린애는 울다가 제풀에 지치기라도 하는데 그놈은 지치는 게 아니라 서울을 박살 내고도 남을 놈이니까.”

    “…….”

    이번에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치산자라며 본인이 인정한 팩트…… 아, 아니 오해를 벗기기 위해 인유신은 열심히 노력했다.

    “여행 간 게 아니라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휴가 얻은 거예요.”

    “어디로”

    “회령이요. 거긴 너무 멀어서 그냥 혼자 갔다 온다고 했어요.”

    “뭐, 회령이라면……. 그럴 만도 하군.”

    최진혁만이 아니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사무실 사람들도 끄덕끄덕 납득했다.

    부산에서 청진까지 KTX로 6, 7시간 만에 도착하는 시대이긴 해도 회령까지는 확실히 장거리였다. 여행이라면 즐겁게 다닐 만한 거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규하 씨는 회령에서 잘 찾고 있을까’

    ‘진짜 하나도 못 찾겠군.’

    역 앞의 편의점에서 늦은 점심을 대충 때운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꺼낸 바이크를 타고 회령을 둘러보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뚜렷한 목표도 없이 민끝녀의 말만 듣고 방문한 길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막상 부딪히니 망망대해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찾는 수준이었다.

    회령까지는 서울에서 직행하는 KTX 노선이 없기에 청진역에서 환승해야 했다. 원래는 비행기를 타려다가 인유신이 배웅해 준다고 해서 기차로 바꿨다. 아침 일찍 인천 공항까지 나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먼 거리였다. 인유신을 데려오지 않길 잘했다. 서울보다 덜 더운 건 나쁘지 않지만.

    ‘보고 싶다…….’

    현규하는 ‘무닌의 눈’의 좌표를 띄웠다. 반짝반짝 빛나는 점이 한 곳에 멈추어 있었다. 사무실이다. 오늘 구내식당 메뉴는 인유신이 좋아하는 제육 덮밥이었다. 맛있게 잘 먹었을까.

    일하는 데 방해가 될 테니 정말 1시간마다 전화하지는 않았다. 대신 1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문자 보낼 시각이다.

    [일하는데 힘들지는 않아요]

    휴대폰을 톡톡 두드려 문자를 작성한 뒤 조금 생각하다가 회령천과 논지가 보이는 주변의 풍경까지 사진으로 찍어서 첨부했다. 인유신이 낯선 풍경을 보면 좋아할 거 같으니 사진은 열심히 촬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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