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14)

업무도 끝내고 지루하게 하품하던 오후. 김지연이 박스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부피에 비해서 무척 가벼웠다.

“그동안 유신 씨에게 고마운 게 많아서요. 근데 헌터님과 사귀는 유신 씨가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어요.”

“저한테요”

얼떨떨해하며 상자를 개봉한 인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20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솜 인형이었다. 소년처럼 싱그럽게 미소하는 표정에 머리칼은 황갈색이고 눈동자는 주황색. 확실했다.

“이거 규하 씨 인형이에요!”

“헌터님 팬들이 따로 제작해서 만든 건데 유신 씨가 생각나서요. 이런 거…… 괜찮으세요”

“당연히 좋죠!”

팬들이야 덕심으로 만든 굿즈라지만 인유신에게는 덕질 대상이 아니라 애인이다. 언짢아하는 건 아닐지 조마조마했던 김지연의 걱정과는 달리 인유신은 인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지연은 작게 웃었다.

“주문할 때 인형 옷은 제작을 안 했는데 마침 시판하는 햄스터 잠옷이 있길래 제가 따로 사서 입혔어요. 왜, 저번에 헌터님이 햄스터 잠옷 입으셨던 적 있잖아요.”

“완전 귀여워요! 규하 씨는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데 햄스터 잠옷까지 그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니까요.”

“그쵸. 그때 진짜 귀여우셨죠.”

“햄스터 귀랑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어 줬어요.”

“와, 진짜요 보고 싶다…….”

보들보들한 솜 인형의 머리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솜이 빵빵하게 들어간 통통한 몸을 살살 눌러 보기도 하던 인유신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근데 양산품도 아니고 따로 주문해서 만드는 거라면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제가 받아도 될지…….”

“신청자가 많다 보니 공구 단가도 많이 내려가서 싸요. 유신 씨가 아니었으면 제가 헌터님 보좌하는 업무를 맡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민원실에서 스트레스 너무 받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 생각했는데 다시 일하는 보람을 느낄 줄은 몰랐어요.”

일을 해 보니 헌터업무담당과의 업무가 적성에도 맞는다면서 김지연은 멋쩍게 웃었다. 인유신도 고맙게 그녀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김지연은 솜 인형의 보관과 세탁부터 시작해서 옷의 구매처로 추천하는 곳이라든가 1000원 숍에서 살 수 있는 소품 등도 알려 주었다. 열심히 휴대폰에 메모하던 인유신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얘는 이름 같은 거 있어요”

열띠게 설명하던 김지연의 목소리가 머뭇머뭇 작아졌다.

“……뀨요.”

“예”

“그, 인형 공구할 때 뀨뀨라고…….”

“뀨뀨 아, 규하의 규였네요!”

인유신은 이 바닥을 손톱만큼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팬의 감성으로 애칭을 언급하게 된 김지연이 몹시 민망해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서 새삼 인형을 바라보았다. 이름까지 진짜 너무 귀엽다.

“맞다. 주무관님, 입원했을 때 규하 씨가 사과를 깎아 줬던 적이 있는데요.”

현규하가 섬세하게 깎은 사과 사진과 영상을 본 김지연은 입가를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회의 중인데도 칼답한 현규하의 허락까지 받아서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니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 되었다.

이후부터 퇴근할 때까지는 월루 타임이었으므로 인유신은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고, 새로운 영역에 눈을 떴다.

‘뵤규하 이건 무슨 인형 공구지 아! 햄스터인가 봐!’

현규하=귀엽다. 햄스터=귀엽다. 현규하+햄스터=……!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쫑긋한 햄스터 귀가 달린 현규하 솜 인형의 짓궂은 미소를 본 순간, 인유신의 손가락은 자동으로 공구 신청 폼을 작성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트위터도 가입했고, 신청 기간이 남은 비공식 굿즈들도 탑승했다. 포토 카드가 뭔지도 알았다.

팬들이 만든 현규하의 헌터증이라든가 명함, 공무원증 같은 것들도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구매했다. 그냥 현규하한테 보여 달라고 하면 되는데, 상품 목록에서 발견한 순간 본능으로 지르고 말았다.

“유신 씨, 데이트할 시간입니다.”

회의가 끝난 현규하가 갑자기 외근 일정이 잡혔다며 데리러 왔을 때는 솜 인형에게 입힐 옷 쇼핑을 하던 중이었다.

“외근 어디요 던전에 사고 생겼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사고라고 할 만한 건 아니고, 던전 안에서 다툼이 생겼나 봅니다. 길드장들이어서 현장의 공무 헌터들로는 중재가 어렵다더군요. 외근 끝나고 바로 퇴근하면 돼요.”

굿즈들을 정신없이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퇴근 시간에 가까워졌다. 인유신은 인형이 든 가방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사무실을 나왔다.

문제가 생긴 던전의 게이트는 도봉산 중턱에 생성되어 있었다. 산 중턱에도 가판대를 설치한 상인들이 꽤 보였다. 게이트의 출입을 관리하는 공무원을 통과하여 들어가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인유신을 맞았다. 현규하가 재빨리 아공간에서 카디건을 꺼내 주었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31시간 57분 06초]

“성벽이 옛날 동북아시아 양식 같은데 무슨 던전인지 아세요”

“……회령 일대라더군요.”

“회령이면……. 앗, 거기네요. 그 발해 태자.”

헌터업무담당과로 옮기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현재 활성화된 게이트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유신은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던전 내부는 전쟁 중의 성벽이었다.

인유신이 배운 역사에서 발해 태자 대광현은 발해가 멸망한 뒤 수만 호의 유민을 인솔하여 고려에 귀순했지만, 이 던전의 배경에서는 달랐다.

대광현은 발해 부흥 운동의 가장 큰 세력을 이루어 이곳 회령 일대를 영토로 포함하는 후발해를 건국했다. 후발해는 고려와 동맹을 맺고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탈환했다고 추측되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으음, 하필이면 회령이네.”

현규하가 턱을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회령이 왜요”

“이따가 얘기해 줄게요. 우선 싸움부터 말리러 가죠.”

입구 근처에 설치된 크고 작은 전진 기지들을 지나 성벽을 넘어 안으로 진입했다. 헌터들이 쓸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인부들이 분주하게 마수들의 사체를 해체하거나 자원을 채취하고 있었다.

분쟁이 일어난 곳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성벽 바깥의 군영 자리에 헌터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거 같은 두 길드장과 함께.

“자, 자.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 씨발놈이 한두 번 스틸하는 게 아닌데!”

“스틸은 누가 했는데!”

“알겠으니까 차분히…… 현 팀장님!”

공무 헌터가 당장에라도 무기를 뽑을 듯한 길드장들을 말리며 진땀을 뻘뻘 흘리다가 현규하를 보고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다투던 이들의 언성이 조금 낮아졌다.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두 길드장은 학창 시절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는 라이벌이었다. 그 관계가 각자 길드를 이끄는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고. 다툰 원인도 던전 안에서 흔히 발생하는 사냥터 문제였지만, 현규하까지 올 정도로 크게 불거진 건 사이가 안 좋은 라이벌이었다는 오랜 관계 때문일 것이다.

현규하는 해묵은 골을 쉽게 해결했다.

“둘 다 맺힌 게 많은데 말로 해 봤자 해결은 안 될 거 같네요. 판 깔아 줄 테니까 주둥이만 털지 말고 그냥 싸워요.”

“……”

“대신 나도 여기까지 외근 나온 대가를 받아야겠으니 이긴 사람은 나랑 다시 붙죠.”

“…….”

잠깐 침묵하던 두 길드장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활짝 웃으며 서로 악수했다. 현규하와 인유신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들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외근 나온 보람이 없을 만큼 순식간에 끝났다. 그래도 던전 안에서 다투는 헌터들은 현규하가 다리를 잘라 버린다는 괴소문이 덧붙여질 거 같지는 않아서 안심했다.

산길을 내려오며 현규하가 던전에서 못다 한 화제를 이었다.

“비번인 날이랑 휴가 하루 붙여서 1박으로 회령에 다녀오려고요. 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회령이 배경인 던전에 방문하게 되었네요. 이럴 땐 그냥 흐름을 타는 게 낫겠죠”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저는 별 일정 없어서 언제 가도 상관없어요.”

“이번에는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장거리에 길도 험한데 유신 씨까지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커튼을 젖혔더니 창문 밖에서 현규하를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인유신은 놀랐다.

“혼자요 규하 씨가 혼자요 던전도 혼자 못 가는 규하 씨가 회령까지요 그것도 이틀이나”

“……듣다 보니 유신 씨가 없으면 내가 금치산자라도 되는 거 같군요.”

“앗,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팩트입니다.”

현규하가 울적한 한숨을 폭 쉬었다.

“그나마 ‘무닌의 눈’으로 계속 유신 씨의 흔적을 좇을 수 있으니 다행이에요.”

“저도 비슷한 거 있어요.”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인유신은 가방에서 현규하의 솜 인형을 꺼내 들었다.

“주무관님한테 선물받았어요. 진짜 귀엽죠”

갑자기 웬 인형인가, 싶어서 물끄러미 솜 인형을 훑어보던 현규하는 이내 세상에 둘도 없는 괴이한 형태의 마수라도 목격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