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세상의 끝까지 도주한 어린 쌍둥이 남매의 꿈. 도시를 완공하기 위해 왕은 병사들을 보냈으며, 부모에게도 버림받은 남매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서 끝내 사로잡혔다.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 세상에 우리를 도와줄 사람 따위는 없어.〉
누이는 체념 속에 흐느꼈고 오라비는 증오를 사리물었다. 스토야와 스토얀. 쌍둥이는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지하에 파묻히는 스토야의 흐느낌 속에서 인유신은 잠에서 깨어났다.
“…….”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깬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꿈의 잔영이 가물가물하게 부유했다. 인유신은 느리게 눈썹을 깜빡거렸다. 방금 그 꿈은 뭐였을까.
‘설화를 찾아보다가 잠들어서 그런가’
하지만 왕은 주춧돌 밑에 산 채로 사람을 매장하는 인신 공양을 하지 않고도 끝내 성을 완공하지 않았던가. 괜히 신경이 쓰여서 개꿈을 꾼 건 아닌가 싶었는데 마냥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기에는 쌍둥이 남매의 외모가 마음에 걸렸다.
안개가 낀 듯 얼굴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색채는 명확했다. 옅은 아마 빛의 머리칼과 선명한 호박색의 눈동자. ……익숙한 색의 배합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출근 준비부터 하자는 생각에 선잠이 든 6세가 깨지 않도록 살살 커튼을 젖히던 인유신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거, 거기서 뭐 하세요!”
“찌익!”
결국 6세의 잠까지 깨우고 말았다. 6세에게 굽신굽신 사과한 인유신은 다시 창문을 돌아보았다. 기겁한 가슴이 아직도 콩닥거린다.
여름이라 방충망만 닫아 놓은 창밖에서 꿈속의 쌍둥이와 똑같은 배색의 남자가 무릎을 끌어안고 허공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현규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충망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새벽에 깼는데 주인님이 걱정되기도 하고, 너무 보고 싶어서요……. 그치만 곤히 잠든 주인님을 깨울 수는 없으니까…….”
“…….”
“숨소리라도 들으려고…….”
“……어, 그냥 도어 록 비번 알려 드릴게요.”
“스토커 아니니까 거기까지는 안 해도 됩니다.”
창문 밖에서 숨소리 듣고 있던 것과 스토킹이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무 놀라서 잠은 깼다. 수명도 4초 정도 줄어든 거 같긴 하지만.
밖에 계속 세워 둘 수는 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대리석 조각상이니까 무시하고 출근 준비해요. 방해 안 할게요.”
현규하는 정말 말 그대로 얌전히 6세의 케이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주인님 숨소리만 들어도 배가 부르네요. 아, 유신 씨 먹을 아침은 내가 만들어서 갖고 왔는데 먹을래요”
그가 가져온 음식이라는 말에 일전의 혀에 안 좋고 건강한 운동 식단이 생각나서 흠칫 긴장했으나, 다행히 평범한 통밀빵 샌드위치였다. 인유신이 좋아하는 에그마요다.
“금방 씻고 올게요.”
욕실로 들어간 인유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마 자다가 스토야라든가 스토얀이라는 잠꼬대를 해서 현규하가 듣지는 않았을 테지만, 꿈속의 색채가 선연하여 아까는 지나치게 놀라고 말았다. 마치 제 꿈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아서.
머리를 감으며 뇌리에서 뒤엉키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인유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스토얀과 스토야는 아마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스토얀과 스토야가 도시를 완공하기 위한 제물로 바쳐진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가 ®ÀÇ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현재는 통칭 루마니아라고 주로 일컫는 구 세르비아의 설화.
아버지가 왕이라던, 왕의 사생아.
스토야의 혈계.
스토야를 왕이라 부르던 은징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 스토야와 스토얀이 왕이라 가정하면 얼추 들어맞는 느낌이 있었다. 무엇보다 울프아이라 불릴 만큼 희귀한 앰버색의 눈동자가 추측에 무게를 더해 주었다.
현규하의 말처럼 신이 관여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천 년 전에 태어났을 평범한 남매가 현재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까. 남매 중 오빠가 다른 세계를 건너온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아이를 낳는 것도.
“…….”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릿속이 꼬여만 갔다.
‘이건 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단서가 꿈이라니 규하 씨가 들으면 황당해할 거야.’
일단 출근 준비부터 얼른 해야겠다. 인유신은 샤워기의 물을 세게 틀어 복잡한 상념을 비눗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현규하는 아침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앉혀 두고 혼자 식사하려니 마음이 쓰인다.
“진짜 아침 안 먹으실 거예요”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그는 금방 말을 바꿨다.
“그럼 어제 먹다 남은 된장찌개나 주세요.”
얼른 냉장고에서 조금 남은 된장찌개와 상추를 꺼냈고, 현규하는 밥을 비벼서 먹었다. 인유신도 그 앞에서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게이트에서도, 던전에서도, 병원에서도 현규하와 같이 아침 식사를 했었는데 배경이 집으로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낯선 기분이 든다. 인유신은 낯섦을 떨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밖에서 기다렸던 거예요”
“집에서 씻고 나온 후니까 얼마 안 됐습니다.”
“새벽이슬 맞지 말고 필요하면 그냥 집에 들어오세요.”
문짝을 떼고 들어온 적도 있는데 새삼 낯가릴 게 뭐가 있나. 인유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우유를 마셨다.
“사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넹”
“성길 형이 현관문 고치면서 유신 씨 마나 패턴을 인식하게 했을 때, 내 마나도 몰래 주입했어요.”
“…….”
“하지만 나는 스토커가 아니고 매너 있는 애완쥐니까 앞으로도 주인님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넵.”
인유신은 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침 식사나 맛있게 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