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14)

“침식 게이트에서 내가 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유신 씨가 했던 말 기억나요”

“……네.”

“솔직히 나는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그 사람이 충분히 괴로워하고 고민하면서 내린 선택인데 다른 사람이 왜 방해해. 자기가 고통을 대신 겪어 줄 것도 아니면서.”

“…….”

“그래서 유신 씨가 그런 말을 했을 때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는데……. 나, 지금은 정말 당신을 붙잡고 싶어. 근데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핏기 없이 창백한 손이 인유신의 팔뚝을 붙잡았다.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는지 조금 아팠지만 인유신은 입술만 꼭 사리물었다. 현규하의 음성이 메마른 것은 오히려 격랑과도 같은 감정을 짓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알아요. 당신이 나를 붙잡지 못하겠다는 의미라는 건.〉

그렇게 말했던 남자는, 이제 인유신을 붙잡는다. 이 손을 놓으면 영영 잃고 말 것처럼.

“내가, 그때 당신을 구해 주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아들과 남편을 살려 달라는 유신 씨 어머니의 유언을 무시하고 지나쳤어야 했을까요”

전자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하지만 후자의 대답은…… 모르겠다.

“규하 씨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문제가 있는 건 저니까…….”

“나는 당신을 붙잡지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부모님에게 선물받은 14년 동안 유신 씨는 박승기 씨도 만났고, 절의 스님들과도 만났잖아요.”

“…….”

“14년 전에 부모님이 유신 씨를 버리고 갔어야 한다는 마음이 또 든다면……. 그분들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안 돼요”

그야 물론, 지금까지 수없이 생각해 봤다. 부모님의 희생을 딛고 연장된 제 삶에서 만나게 된 소중하고 좋은 인연들을.

하지만 그럼에도.

〈왜 너 같은 게! 하필 네가 살아서!〉

할머니의 울부짖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 볼게요.”

이 거짓말을 그는 믿을까. 믿는 척을 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유신은 눈을 감으며 현규하의 등에 팔을 둘렀다. 언제나 넓게만 보였던 남자의 등이 지금은 무척 연약하게 느껴졌다.

화를 내야 마땅한 사람이 오히려 힘들게 자신을 부여잡았다. 그 사실이 심장을 얽매어, 인유신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6세야. 잘 놀고 있었어”

“찍!”

“너도 같이 고기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치”

인유신은 6세를 살살 쓰다듬었다. 고기 냄새가 배었는지 6세가 평소보다 더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을 부볐다.

6세와 놀아 주고 매트리스에 드러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현규하는 지금쯤 귀가했을까

길고도 짧은 얘기가 끝나고, 옥상을 정리한 현규하는 쉬이 돌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치 자리를 비우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을 보는 얼굴이었으므로, 인유신은 짐짓 웃음을 지었다.

〈별일 없으면 저도 괜찮아요. 평소에 어떤지 늘 봐서 알잖아요. 그러니까 규하 씨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도 걸음을 떼지 못하던 현규하의 등을 억지로 밀어서 집으로 보냈다. 하늘 위로 사라지는 것까지 보고서야 인유신도 안으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하자. 평소처럼!”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한 뒤 ‘평소처럼’ 문자를 보냈다.

[잘 들어갔어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현규하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살짝 가라앉긴 했지만 현규하도 평소처럼 그를 대하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 1초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니까요.

아무리 하늘을 날아 움직인다고 해도 현규하의 오피스텔까지 1초 만에 간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지만, 그냥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허세도 귀엽다.

- 밤에 혼자 잠들기 곤란하다 싶으면 언제라도 불러요. 내가 필요하다면 바로 갈 테니까요.

“규하 씨는 안 자고요”

- 주인님이 호출하시면 설령 주인님과 영화관에서 은밀한 데이트를 하는 꿈을 꾸던 도중이더라도 당장 가야죠.

“그, 그게 무슨 꿈인데요.”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평소처럼 느긋하고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인유신은 귀에 남은 목소리의 여운을 느끼다가, 다시 휴대폰을 터치했다.

이런 게 그에게 보답이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알아 둔다면 혹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토야’는 다시 발음이 안 되었지만 동유럽계 이름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일단 스토야라고 휴대폰에 입력해 보려 했는데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막고 있기라도 한 듯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일전에 현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생각한 그건 이쪽 세계에도 있는 개념이지만, 세계가 인지하는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어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글자로도 쓰지 못합니다.〉

그럼 아예 ®ÀÇ의 스토야라는 인식을 버리면 가능할까. 인유신은 눈을 감고 머릿속의 상념을 비우려 애썼다. 나는 ®ÀÇ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철의 시대의 스토야를 찾으려는 거야. 그렇게 거듭 생각한 뒤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입력되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토야와 루마니아로 검색해 봤지만 유의미한 내용은 없었다. 거기에 은징가가 말했던 신이라든가 세계의 왕까지 추가해도 마찬가지였다.

‘상관없는 이름인 걸까…….’

자신의 추측이 잘못된 모양이다. 그냥 검색창을 닫으려던 인유신은 마지막으로 영문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한글로 검색할 때보다는 관련 페이지가 많이 떴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던 인유신의 눈이 커졌다. 옛 세르비아 일대에 전해지는 설화가 적혀 있는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왕이 쌓으려는 도시가 밤마다 무너지자 그는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요정을 찾아갔다. 도시를 완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요정이 조언했다.

스토얀과 스토야라는 이름을 가진 쌍둥이 남매를 주춧돌 아래에 매장할 것.

또는 왕의 형제 중 한 명의 부인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할 것.

왕은 고민 끝에 선택했다.

〈이 도시는 내가 다스리며 나를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오. 한데 그들을 죽여 도시를 쌓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인가.〉

요정의 조언을 거절한 왕은 무너지는 성을 끈질기게 쌓았고, 밤마다 왕의 도시를 무너트리던 요정들도 결국 물러났다. 왕은 그렇게 도시를 완공했다.

“으음.”

어쩐지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거듭하여 설화를 읽는데, 호기심을 느꼈는지 8세가 기어 왔다.

“삐익.”

“아, 뭐 읽는지 궁금한 거야 옛날이야기인데 들려줄까”

“뀻!”

인유신은 찬찬히 설화를 읽어 주었다. 어쩐지 붙잡고 가르치면 8세에게 한글까지 배우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념 속에.

설명을 다 들은 8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앙증맞았으므로 인유신은 팔불출다운 웃음을 지었다. 현규하만큼은 아니지만 8세도 매우 귀엽다.

그날 밤, 케이지에서 조용히 나온 8세가 곤히 잠든 인유신의 머리맡까지 살그머니 다가왔다. 뒷발로 일어선 8세는 주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마에 얼굴을 부볐다.

8세의 얼굴에서 번져 나온 희미한 빛이 인유신을 감싼 광경을 목격한 건 창가에서 스미는 달빛과 6세뿐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