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214)

‘KTS……. 설마 공 길드장님 이니셜은 아니겠지 설마……!’

심지어 그냥 이니셜만 새긴 것도 아니고 꽃과 식물로 디자인된 서체였다. 오레이칼코스를 쓰는 면적을 넓혀 용량을 늘리려는 의도인 거 같긴 했지만.

‘재벌 3세와 위장 결혼한 게이’라는 가설이 새록새록 기억의 밑바닥에서 솟아났다. 설마, 설마 하는 사이에도 한준수는 기회가 생기자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공태성의 찬양을 시작했다. 거의 자신에게 늘어놓는 현규하의 헛소리 급이었다.

어쨌든 듣다 보니 정말 순수한 의미로 공태성을 좋아하고 동경한다는 걸 느끼게 되어서 진정할 수 있었다. 일종의 우정 타투라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공태성의 몸에는 한준수와 관련된 타투가 절대 없을 거 같긴 해도…….

인유신은 하필 한준수의 문신이 공태성의 귀속 아티팩트 문신이 새겨진 위치와 같은 곳에 그려졌다는 건 기억에서 지우기로 했다.

“우리 길드장님 성격이 지랄맞긴 하지만 자기 사람한테는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이 문신도 우리 길드 돈 없던 시절에 사비 털어서 해 주신 거예요. 그 전에는 무구를 관리하는 도구들이나 겨우 넣고 다녔거든요.”

“우와.”

“어렸을 때 엄마랑 단둘이 살아서 형편이 많이 안 좋았거든요. 친척 누나랑 길드장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사람 패고 경찰서 들락거리거나 잘해 봤자 깡패 새끼나 됐겠죠.”

“오오.”

“너는 하고 싶은 공부 하라면서 대학원까지 지원해 주셨는데 그만 각성을 해 버렸지 뭡니까. 바로 대학원 때려치우고 길드장님 밑으로 들어갔어요.”

“와아.”

“친척 누나와 길드장님이 내 은인입니다. 평생 두 분을 따를 거예요.”

“근데 대학원까지 가셨는데 공부 그만둔 거 아깝지는 않으셨어요”

“공부보다 길드장님이랑 같이 일하는 게 더 좋으니까요.”

어느 틈엔지 권성길과 그의 도제도 흥미롭게 한준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녀석은 그 사연을 만나는 사람마다 알려 주고 다닌다니까. 아주 귀에 못이 박히겠다. 하여튼 태성이가 세상 예민한 얼굴인데다가 성격까지 까칠한데 은근히 마음이 약해.”

권성길의 평가를 들으며 인유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으니까. 8세의 케이지도 사 줬고.

‘규하 씨랑 사이가 안 좋아 보이긴 해도……. 핫!’

현규하 옆에서 공태성 얘기를 들으며 동조해 버렸다는 걸 떠올린 인유신은 급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뒤에서 그의 어깨를 짚고 있던 현규하는 인유신의 표정까지는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키가 작은 게 좋을 때도 있었다.

인유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현규하가 턱짓했다.

“그쪽은 대학원에서 뭐 전공했는데요”

“드럽게 돈 안 되는 거요. 언어학과 방언 전공이었거든요. 동북 방언으로 진로 잡아서 공부하다가 각성한 바람에 전혀 상관없는 직장을 다니게 됐네요.”

“흐음.”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현규하가 어째서인지 조금의 흥미를 비쳤다. 다시 슬쩍 올려다보자 이번에는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싱긋 올리며 허리를 낮추더니 인유신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냥 전공이 궁금했을 뿐이에요. 내 눈에는 주인님밖에 안 보입니다.”

자신의 귀에만 겨우 들릴 만큼 낮은 속닥거림에 왠지 뺨이 빨개졌다. 인유신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에 둘러진 현규하의 손가락을 살짝 쥐었다.

신나게 얘기를 늘어놓던 한준수는 늦었다면서 주문을 완료하고 돌아갔다. 인유신과 현규하도 권성길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지금 당장은 재료 수급이 안 돼서 시간이 걸릴 거야.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마나 주입하러 한 번 들러.”

“넵. 그때 뵐게요!”

꾸벅 인사하고 공방을 나왔다. 처음 보는 신기한 아이템들이 많았는데 바쁠 시간에 찾아간 것이기도 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인유신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현규하가 물었다.

“뭐 빼놓고 온 거라도 있어요”

“그게 아니라……. 오늘 형님이 많이 바쁘셨잖아요. 다음에 한가하실 때 찾아가서 공방 구경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근데 왜 그렇게 찜찜해하는 얼굴이에요”

찜찜해하는 표정이었나. 인유신은 제 얼굴을 문질렀다.

“형님처럼 대단한 분을 대상으로 제가 너무 뻔뻔한 생각을 한 거 같아서요.”

“집에 놀러도 가기로 한 사이인데 공방 구경하는 게 뭐 어때서요.”

현규하가 엷게 미소하며 인유신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성길 형도 혜연 누나도 유신 씨를 좋아하니까 좀 더 뻔뻔해져도 돼요. 둘이 좀 일찍 만나서 눈 맞았다면 유신 씨만 한 애가 있었을 나이 차인데.”

조금 더 가까이 여겨도 되는 걸까. 인유신은 다시 제 얼굴을 문질러 보았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주인님은 맨날 까먹고 있는데, 내가 더 대단합니다.”

“그야 규하 씨는……. 규하 씨니까요.”

“무슨 의미죠, 그거.”

현규하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쳐다보자 인유신은 시치미를 뗐다.

“당연히 좋은 의미예요.”

“그렇게 안 들렸지만 애완쥐의 미덕 5조에 따라 넘어가 주겠습니다.”

나머지 조항들은 대체 무슨 내용일까. 그런 상념 속에서 라이딩 재킷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순간, 현규하는 걸음까지 멈추며 흠칫했으나 인유신이 의아하게 올려다보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다시 걸어갔다.

재킷의 소매를 잡은 손가락을 감아 오는 손이, 어쩐지 창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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