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14)

“……14년 전의 던전 브레이크에서 만난 헌터와 각성자가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었죠.”

“어째서 그분들이 규하 씨의 인생을 변하게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현규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둠에 잠겨 희미한 형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어째서인지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처음 14년 전의 이야기를 했을 때처럼.

“조금 긴 데다 지루한 이야기라서 유신 씨에게는 자장가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피곤할 테니 억지로 듣지 말고 잠들어도 됩니다. 9살에 침식 게이트를 공략한 뒤에 바로 훈련소로 가게 되었는데…….”

그러며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훈련소의 생활. 그곳에서 만나게 된 강석우. 아버지처럼 따르게 되었던 수년의 나날. 뱀파이어 특질. 연구소. 그리고 연구소. 14살. 배신. 불로불사.

건조하게 읊는 과거의 토막들이 인유신의 머리 위로 흩어졌다. 감정이 깃들지 않은 사실의 나열인 옛 시절의 잔흔이 인유신의 가슴에 시리게 스미었다. 겨우 14살이었던 소년이 제 아픔을 담담히 술회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상처를 후벼 파야 했을까.

“딱 중2병에 걸릴 나이이기도 했잖아요. 그냥 이딴 세상 멸망해도 상관없으니까 마주치는 사람들 다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을 때 그분들을 만났어요.”

건조하던 현규하의 음성에 다시 온화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는 어떻게 김지원과 김정훈을 만났는지, 그리고 그날의 참변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울 것 같았던 14살 소년만을 인유신의 앞에 다시 살아나게 했다.

“내 어머니는 오직 아버지를 위해 나를 낳았고, 정작 아버지는 얼굴도 보지 못했죠. 친아버지처럼 생각했던 남자는 내 머리를 쪼개서 뇌를 끄집어낼 궁리나 하고 있었고요. 내가 알고 겪은 부모들이란 전부 그런 사람들뿐이었는데 그분들은 그렇지 않더군요.”

“…….”

“그분들을 보고, 나는 그제야 사랑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실존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현규하가 맞잡은 손을 올리며 인유신의 손등에 천천히 입술을 내리눌렀다. 김지원과 김정훈에게 전하지 못한 경의를 그에게 대신 바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그분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틀림없이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으로 자랐을 거예요.”

“……부모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자식까지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난 아닌데.”

깊은 어둠 속인데도 자신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 현규하의 표정이 선하여 인유신은 눈을 감아 버렸다. 나 말고 부모님이 살아남으셔야 했어요. 해묵은 감정이 목 안에 깔끄럽게 자리하여 괴롭게 그것을 삼켰다.

현규하가 잘 자라는 듯이 이불을 덮어 주며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현재 상태  살의. 애정. 불안.]

정말 불안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유신은 온기에 매달리듯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밖에 없던 시린 과거를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전한 현규하처럼, 그와 같은 용기를 자신 또한 얻는 날이 올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는, 그의 불안 또한 감싸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붙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빠지고, 불안정하게 흩어지던 숨소리가 고르게 잠겼다. 그제야 현규하는 거의 짓누르고 있던 숨을 가늘게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늘어진 손을 세게 쥐었다가는 그가 깰 수도 있다는 게 우려되어, 다만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보듬을 뿐이었다. 온화한 체온을 감싸듯이 품은 채, 현규하는 속엣말을 소리 없이 속삭였다.

당신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까, 그럴 테니까.

“……어머니처럼 나를 버리지는 말아 주세요.”

  

결정석에서 던전 보스가 재생성된 사태로 여전히 세상은 시끄러웠다. 결정석이 감쪽같이 증발했으니 더 소란스러울 터였다.

대중은 히든 보스의 결정석을 사용하는 발전소를 우려하면서도 단신으로 히든 보스를 사냥한 현규하에 대해서도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외국에서도 주목받는 뉴스라 그런지 외국인의 댓글도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야, 야. 남친이 납치됐었다는 것까지 다 까발려진 모양인데 형님이 단신으로 사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래. 이렇게 된 거 고대 그리스처럼 애인들로 구성된 헌터 부대를 만들자고 하네.”

몹시도 창피해진 인유신은 ‘파워 오브 러브’ 따위의 영어 댓글을 씨부렁거리는 박승기의 주둥이를 베개로 퍽퍽 때렸다. 장범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던 공태성의 심정이 절실히 이해되었다.

경과를 살핀다는 명목으로 입원 중인 인유신과 친구의 병문안을 온 박승기에게 현규하가 접시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열심히 깎던 사과였다.

“형님. 감사히 잘 먹겠…… 대박.”

“……헉.”

시간이 걸리기에 혹시 토끼 모양으로 깎나 싶었다. 한데 그보다 더 공들인 백조와 공작새 모양의 사과들이 플레이팅까지 완벽하게 된 채로 접시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박승기는 탄성을 흘리며 얼른 휴대폰을 꺼냈고 인유신도 카메라 어플을 터치했다. 찰칵, 찰칵, 찰칵. 얼마간 사진을 찍는 소리만이 병실 안에 울렸다.

“형님은 언제 이런 걸 다 배우셨어요”

“아침에 잠깐 유튜브 보면서 연습했어요.”

“쩐다. 지금까지 사과 깎아 본 적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인유신도 혀를 내둘렀다. 진짜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근데 왜 운전만 그따위로……. 더 깊이 생각했다가는 그날의 트라우마가 밀려올 거 같았기에 급히 상념을 비웠다.

한 번만 깎는 거 보여 달라는 박승기의 부탁과 인유신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현규하는 다시 사과와 과도를 들었고, 인유신은 열심히 촬영했다. 사과 껍질을 어쩜 저렇게 얇게 잘 깎을까. 껍질 뒤로 풍경까지 비칠 거 같았다.

‘혼자 보기 너무 아깝다. 규하 씨도 인스타 같은 거 하면 좋을 텐데.’

만약 현규하가 SNS를 시작하면 팬인 척하고 몰래 댓글을 달아야겠다.

병실에서 오랜만에 권성길도 만났다. 이혜연도 같이 오고 싶었지만 뒤처리가 너무 바빠 도저히 짬이 안 나서 미안해한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저녁에는 사무실을 대표해서 김 과장과 김지연이 방문했다. 엄살이나 다름없는 이유로 입원해 있는 상황이라서 몹시 찔리긴 했지만 찾아와 준 건 무척 기뻤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한결 조용해진 병실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병실 안에 몰카나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겠지

“히든 보스 결정석 어떻게 빼돌린 거예요”

수박에 장미꽃을 새기고 있던 현규하가 눈썹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훅 들어오네요.”

“손님들이 계속 들락거리는 바람에 물을 틈이 없었어요.”

“음, 뭐. 내 은밀한 스리 사이즈도 아는 주인님이라면 눈치챘을 거 같긴 했지만.”

“규하 씨 스리 사이즈 들은 적 없는데요.”

“만져 보고도 몰라요 그럼 다시 만져 보면 되겠네. 정확한 사이즈 측정을 위해 옷부터 벗겠습니다.”

“벼, 병원인데요!”

정말 벗으려고 하는 현규하의 손목을 급히 붙잡았더니 오히려 반대로 제 손목이 붙잡혀 버렸다. 그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으로 그의 숨결이 가늘게 닿았다.

“입술은 알 거 같아요”

인유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모르겠다고 하면 확인하라고 키스할 거 같고, 알겠다고 하면 확실한지 재차 확인하라고 키스할 거 같다. 어느 쪽이든 결과물은 키스일 게 뻔하니 눈만 살짝 내리감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입술에 살짝 스치는 듯했던 현규하의 숨결은 잠시 허공을 헤매다가, 멀어졌다. 대신 감은 눈두덩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왔다.

“…….”

눈을 뜨니 여전한 표정의 현규하가 앞에 있다. 왜 키스를 안 했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그는 여상히 말을 이었다.

“히든 보스 몸에서 결정석을 뜯어내는 동시에 내 마나를 주입했어요. 성인 할머니를 만나도 현실에서는 시간이 1초도 안 흐르니까요.”

“아, 그래서 그때…….”

인유신은 히든 보스의 등을 뚫고 나왔던 현규하의 손에 살덩이 같은 게 쥐어져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게 결정석이었나 보다.

“이번 할머니는 토요일이더라고요. 이참에 결정석 어떻게 했는지 볼래요”

아공간에서 현규하가 크고 작은 두 개의 붉은 살덩이를 꺼냈다. 핏기가 도는 두 덩이의 살점은 꿈틀거리면서 하나로 결합되었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삼켰다.

“이거 좀…….”

“징그럽죠”

“네…….”

“뭐, 그래도 앞으로 두 개밖에 안 남았어요. 경매장에서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유신 씨도 시스템에서 봤다는 è…… 아, 다시 발음 안 되네. 아무튼 그 어쩌고의 혈계가 바로 이건데.”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다른 물건을 하나 꺼냈다. 경매장에서도 봤던 바로 그 펜던트였다.

세공된 유리 안에 피처럼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펜던트를 차분히 살펴보자니 급박했던 경매장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기시감이 흐리게 신경을 긁었다. 이렇게 인상적인 펜던트를 봤다면 쉽게 잊었을 리가 없을 텐데…….

“저번에 성능 업그레이드를 했거든요. 가시적인 변화가 없어서 설마 히든 보스의 결정석까지 세계선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나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진짜 괜찮아요. 좀 굶은 거 말고는 다치지도 않았고.”

인유신은 서둘러 자책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의문 하나는 해소했으니 다른 걸 물을 차례였다.

“규하 씨는 아티팩트 많죠”

“싸움 걸어오는 걸 피하지는 않다 보니 죽여서 빼앗은 것도 있고 던전에서 득템한 것도 있죠.”

“그럼 GPS랑 비슷한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는 없어요 어, 그러니까 사람 추적용으로 쓰는 거요.”

“……갑자기 그런 건 왜요”

“저번처럼 제가 사라져서 규하 씨가 찾는 일이 없도록 저한테 썼으면 하고요. 꼭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저랑 떨어져 있을 때 위치를 알 수 있으면 규하 씨가 덜 불안하지 않을까요”

“…….”

혹시나 해서 물었을 뿐인데 왠지 현규하의 반응이 이상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