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14)

[히든 보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사망했습니다.]

[고유 영역이 해제됩니다. 모든 강화 및 약화가 사라집니다.]

[리셋까지 남은 시간  24시간 00분 00초]

“후우.”

주검조차 남기지 않고서 허공으로 녹아 흩어진 히든 보스의 앞에서 현규하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때였으면 마음대로 인유신을 들어 올려 자신에게 오게 했을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말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수런거리며 모여 있던 헌터들이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섰다. 넓게 갈라지는 틈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리고 그보다 고통이 더욱 짙게 밴 눈동자가 인유신을 향했다.

“미안해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무능력한 주제에 당신을 옭아맨 나인데. 당신에게 구해지고도 무참한 생각을 품고 있는 나인데. 인유신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피로 흠씬 젖은 그의 손을 망설임 없이 꼬옥 잡았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현규하가 인유신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불규칙하게 들썩거리던 현규하의 숨소리가 차츰 일정한 울림으로 잦아들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살의. 애정. 불안]

11.

시스템은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사라지자 이 게이트의 내부를 던전의 일종으로 판별한 모양이었다. 고유 영역이 해제되었다는 메시지와 더불어 리셋 시간까지 출력되었다.

초대형이니만큼 자원 채취를 하기에 24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몬스터 웨이브였으니 마수들의 사체도 발에 차일 만큼 많았고. 우선 사체부터 게이트 밖으로 옮긴 뒤 채취를 해야겠다고 판단한 이혜연은 게이트 밖으로 연락을 취했다.

이혜연이 인솔하는 공무 헌터들은 분주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규하도 원칙적으로는 내부 정리를 해야 하지만 히든 보스를 혼자 사냥한 공적에 더하여 인유신의 일도 있고 하니 그냥 보내 주었다.

무엇보다 던전에서 제일 값진 자원은 보스의 결정석이다. 이 경우는 물론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고. 하나의 결정석으로 두 번의 히든 보스가 나타난 셈이니 에너지의 함축량이라든가 효율성 등에 대한 부분이 연구자가 아닌 이혜연도 궁금했다.

설마 세 번째가 나타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현규하가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을 쓰러트린 자리를 뒤지던 이혜연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이어 비명처럼 외쳤다.

“결정석이 없잖아!”

히든 보스의 결정석은 크기도 큰 데다가 광채도 밝으니 어디에서든 눈에 뜨인다. 다만 이번에는 웃자란 수풀이 무성하여 잘 보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결정석은 보이지 않았다.

“규하야!”

이혜연은 저 먼 곳에서 생수통의 물로 손에 묻은 피를 씻고 있는 현규하에게 단번에 달려갔다.

“아까 히든 보스를 사냥할 때 결정석 안 나왔냐 없는데!”

“결정석이 없을 리가 있나요. 잘 찾아봤어요”

“없어! 눈이 빠지도록 뒤져 봤는데 없어!”

“그러면 나도 모르겠는데요.”

“와, 미치겠다. 결정석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현규하가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 헌터가 한둘이 아니다. 분명히 그가 결정석을 따로 갈무리한 낌새는 전혀 없었다. 돈 때문에 결정석을 몰래 챙길 녀석도 아니었고.

“히든 보스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전례 없던 일이었잖아요. 두 번 나타나면서 결정석의 에너지를 전부 소모한 거 아닌가.”

“……으으으음. 그럴듯하긴 하네. 하긴 이런 경우가 처음이니까 예전처럼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 다시 남을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지.”

“의심스러우면 내 아공간 전부 깔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라도 너한텐 푼돈밖에 안 될 텐데 설마 그걸 쌔비겠냐.”

“그렇죠. 그까짓 거 몇 푼이나 한다고.”

이혜연은 심란한 표정으로도 그의 추측을 납득하는 눈치였고, 현규하는 거리낄 것 없다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서 인유신은 몰래 진땀을 흘렸다.

‘……결정석, 빼돌렸구나.’

현규하는 대체로 얄미울 만큼 뻔뻔하였기에 표정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는 게 어렵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시간 그와 부대끼며 누구보다 짙은 감정을 공유한 인유신은 확신했다.

저 뻔뻔함은 분명히 시치미를 뗄 때 보이는 태도였다. 어떻게 빼돌렸는지는 짐작도 안 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관련 내용으로 길게 얘기를 나눌수록 현규하의 거짓말은 더욱 당당해질 것이고, 듣던 자신은 괜히 제풀에 찔려서 안절부절못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이혜연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결론을 내린 인유신은 휘청하며 쓰러지는 척했다.

“유신 씨!”

“유신아!”

드라마였다면 움짤로 박제되어서 비웃음을 당할 만큼 형편없는 연기였으나 다행히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놀란 표정을 보니 양심이 사정없이 따끔따끔했지만 현규하의 거짓말을 무마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뻣뻣한 혓바닥을 움직였다. 결과물은 국어책 읽기였다.

“잠깐 현기증이 나서요. 계속 굶어서 그런가 봐요.”

“119! 119! 119! 아, 아니! 에, 에, 에, 에너지바 남은 거 있으니까!”

“야, 현규하. 진정해. 계속 굶었는데 일반인이 헌터용 고열량 에너지바 먹으면 속 버려. 빨리 밖에 데리고 나가서 애 밥 좀 먹여라. 애가 그사이에 볼살이 홀쭉해졌네, 에구.”

“한우 먹으러 가요!”

현규하는 대뜸 인유신을 양팔로 들어 올려 안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빈속에 너무 자극이 강한 건 안 좋으…….”라는 이혜연의 외침이 아련하게 등 뒤에서 울리는 걸 들으며 인유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누님! 누님도 형님도 좋아하지만 규하 씨가 더 중요해요! 죄송해요!’

거짓말의 대가였을까.

그날의 한우 구이와 후식으로 나온 된장찌개는 무척 맛있었다.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는 하루가 훌쩍 지난 일요일 오후였다. 생각보다 게이트 안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 중간에 기억을 이어받느라 기절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전날에 떡볶이만 먹고 쫄쫄 굶었던 인유신은 정신없이 한우를 흡입했고, 현규하는 몇 인분을 먹어 치웠는지 적혀 있는 계산서를 안 보여 줬다. 대신 그가 빵빵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는 인유신을 데려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긁힌 상처도 없는데…….”

“하루 넘게 굶었잖아요. 자칫하면 죽어요! 빈혈이나 영양실조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몰라요!”

현규하의 과민 반응에 인유신은 그냥 다른 말 없이 따라갔다. 그의 상태창에는 여전히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해 봐도 여전히 멀쩡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현규하는 경과를 살펴봐야 한다면서 인유신을 입원시키려 했다. 솔직히 주말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몹시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혼자 집에 돌아가서 자리에 누우면 잠을 잘 자지 못할 거 같았다.

인유신은 슬금슬금 현규하의 표정을 살피면서 부탁했다.

“주말 내내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이런 말을 해서 진짜 죄송한데……. 밤에 같이 병원에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허벅지도 못 만지게 했던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진도를 빼다니 꿈만 같군요. 나는 적극적인 주인님도 좋습니다. 벌써 짜릿해.”

“병원에는 저 혼자 있어도 돼요!”

일요일 밤이었으나 VIP 병동에 바로 입원할 수 있었다.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는 더 많은 돈이면 해결된다는 진리를 인유신은 새롭게 배웠다.

입원할 때 필요한 용품을 챙기기 위해 잠깐 집에 들렀다. 주말 동안 옥탑방의 6세는 주인집 할머니가 봐주고 있었다.

침식 게이트를 겪으면서 언제 불시에 게이트에 휩쓸릴지 모른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할머니에게 부탁했었다. 만약 자신이 말도 없이 하루 이상 집을 비우면 하루에 한 번씩 6세의 사료와 물만 챙겨 달라고.

할머니는 무슨 쥐새끼를 집에서 키우냐며 못마땅해했다. 그래도 해바라기씨나 호박씨 같은 씨앗을 얻으면 쥐새끼나 먹이라면서 한 봉지씩 주곤 했다.

예전의 부탁을 잊지 않은 할머니는 6세의 사료 통을 채워 주었다. 굶지 않고 별일 없이 주말을 잘 보낸 6세는 평소처럼 뵤 한 얼굴로 주인을 맞았다.

“찍!”

“6세야! 보고 싶었어!”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 안녕.”

6세가 쳇바퀴를 타다닥 돌리는 소리를 들으니 비로소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불이 다 꺼진 주인집의 문고리에 고맙다는 쪽지와 자두 한 봉지를 걸어 놓은 인유신은 후딱 짐을 챙겼다.

“8세야.”

“꾸이…….”

8세는 반지를 못 쓰게 한 이후로 소리도 안 내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아까 고깃집에서 고기도 안 먹었다.

“아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거지”

“삐이이…….”

“그럼 됐어. 괜찮아.”

자그마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느껴지는 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이 작은 온기가 있었기에 납치되었을 때도 어느 정도 기운을 낼 수 있었다.

“병원에 있을 동안 6세 좀 봐줄래 사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큣!”

믿고 부탁한다는 말에 8세는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

“기가 팍 죽어서 조용하니까 안 거슬리고 좋았는데 말이에요.”

“……큐이.”

“에이, 그래도 게이트 안에 있는 내내 많이 무서웠을 텐데도 기절 안 하고 잘 버텼어요. 규하 씨가 싸울 때도요.”

“언제부터 마수가 게이트 안에서 기절을 안 하는 게 칭찬할 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님의 뜻이 그렇다면 칭찬해 주겠습니다.”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말린 바나나를 꺼내 살랑살랑 흔들었고, 8세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길게 뻗어 말린 바나나들을 꿰어 왔다. 두 햄스터가 작은 입을 뇸뇸뇸 오물거리며 사이좋게 나눠 먹는 모습을 보니 입가에 저절로 팔불출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집이 좋다.

현규하의 짐도 챙기기 위해 오피스텔에 들르려 했으나, 그는 필요한 물건은 편의점에서 대충 사면 된다면서 바로 병원으로 돌아왔다.

사실 현규하와 병원에서 같이 지내려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규하 씨는 치료 안 받으셔도 돼요”

“주인님이 힐을 해 줬잖아요. 나머지는 침 바르면 나아요.”

“그러지 말고요.”

인유신은 옆에 딱 달라붙어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현규하의 등을 끙끙 밀어서 응급실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검사하고 치료하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예상대로 자신이 미처 찾지 못한 부상이 있었다.

이러지 않았다면 현규하는 상처가 덧나든 말든 내색도 하지 않고 내내 자신의 곁에만 머물렀을 것 같았다.

잘 때가 되어 불을 껐는데도 현규하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인유신은 살짝 긴장했다. 그의 집에서 같이 침대에 누워 잔 적도 있는데 왜 새삼스럽게 목이 깔깔해지는 걸까.

“유신 씨가 잠드는 것만 보고 보호자실로 갈게요.”

오늘은 왠지 혼자서 잘 수 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음, 그러면…….”

침대에 누운 채 그를 힐끗 올려다본 인유신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마수를 사냥할 때는 너무나 강인했던 손이 인유신에게 잡히자 저항 없이 쉽게 끌려 온다.

제 손도 딱히 작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현규하와 비교하면 무척 차이가 났다. 굳은살이 박여 단단한 손바닥을 쓸고, 크고 작은 흉터들을 살결로 느끼며 가만히 맞잡았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고 있던 현규하에게서 그제야 한숨처럼 깊은 호흡이 밀려 나온다.

“제가 잠들 때까지만 손잡아 주시면 안 될까요”

현규하니까 ‘다른 은밀한 부위도 잡을 수 있어요.’ 같은 농담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는 대답 없이 손을 세게 쥐었을 뿐이었다. 인유신은 병실의 불을 끈 게 조금 아쉬웠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14년 전에도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형아는 사람들을 구해 줄 만큼 강한 사람인데 왜 날 봤을 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렇지만 8살의 아이는 그 의문을 소화하기도 전에 부모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부딪힌 현실 앞에서 소박한 의문을 오래 품고 있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렇게 아이는, 인유신은 그 참혹했던 밤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 내며 색채를 거두었다. 퇴색하고 변질된 잿빛으로 기억의 늪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시간의 파편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나를 구해 준 형은, 규하 씨는 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그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유신 씨 앞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현규하는 아마 14년 전의 기억을 자신보다 먼저 떠올린 듯했다. 그렇지만 먼저 인유신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생명의 은인이라는 옛일을 들먹이며 젠체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인유신은 제 입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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