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9/214)
  • 밖으로 나가자마자 집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은징가가 있던 거처도 마찬가지였다. 웃자란 풀들이 무성한 초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창을 든 은징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유신 씨, 뒤로 물러나 있어요.”

    인유신이 뒷걸음질을 하자 등 뒤로 우산아카시아나무 한 그루가 높이 솟아났다. 마치 그곳이 안전지대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은징가가 자신을 인질로 삼거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바라는 정당한 전쟁이 아닐 테니까.

    현규하와 은징가는 초원의 한가운데에서 마주 보고 섰다. 인사를 나누거나 한담을 입에 담는 일 따위 없이, 시작되었다.

    미미하기 그지없던 은징가의 마나가 인유신마저 느낄 정도로 폭증했고,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꺼낸 대물 저격총을 즉시 발포했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몹시도 큰 발포음에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으며, 파우치 안의 8세도 파르르 경련했다.

    총탄은 바로 은징가에게 명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대지가 울렁거리며 마수들이 솟아났다. 총탄은 마수들과 함께 폭파했고, 총연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창이 날아왔다.

    “쯧.”

    현규하는 짧게 혀를 차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투창을 피하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발밑에 있던 무성한 수풀들이 자라나며 촉수처럼 다리를 휘감아 행동을 봉쇄했다. 현규하는 재빨리 사이코키네시스로 투창을 붙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간 자체가 변했다. 현규하는 아까 그들이 나왔던 것보다 훨씬 좁은 흙으로 된 집에 갇혔고, 잠깐 평정이 흐트러진 틈을 타 창이 매섭게 집 안으로 쇄도했다.

    밀폐된 곳이어서 어떤 상황인지는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요란하게 울리는 소음만이 인유신의 심장을 콩닥거리게 했다. 현규하가 얼마나 강한지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아까 모습을 보니 경매장 이후 전혀 쉬지도 않은 것 같은데 괜찮을까.

    뿌연 흙먼지와 함께 집의 벽을 무너트리며 밖으로 나온 현규하가 부러진 창대를 내던졌다. 인유신은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흙바닥으로 스르르 흡수된 창은 다시 은징가의 손에서 솟아났다.

    “고유 영역이라는 거, 정말 귀찮군.”

    “필드를 펼치겠다면 기다려 주지. 아, 여기에서는 불가능했던가.”

    “가능했어도 필요 없어.”

    말을 끝맺는 즉시 아공간에서 꺼낸 수십 정의 대전차 화기들이 포탄을 퍼부었다. 은징가의 앞으로 마수의 방벽이 생겨났고, 대지가 뒤흔들렸다. 수풀밖에 없던 초원에 솟아난 나무들은 포탄의 진로를, 갑자기 나타난 건물들은 현규하의 행로를 방해했다.

    눈을 깜빡할 때마다 풍경이 어지럽게 뒤바뀌며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아서 인유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도 이해했다. 은징가가 헌터들과 싸우던 힘을 거두어들인 모양이다. 은징가의 영역으로 선포된 이 장소는 그녀가 생전에 다스렸던 두 개의 왕국과 백성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수없이 바뀌는 풍경은 두 왕국의 파편일 터였다. 이 대지 자체가 현규하의 적이었다.

    “그렇군. 화력은 이 정도인가.”

    낯선 무기의 위력을 파악한 은징가가 발을 쿵 하고 구르자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는 일단의 마수들이 그녀의 그림자와 대지로부터 솟아났다. 전사의 형상을 한 마수들이 부러지지 않고 무뎌지지 않는 무기를 휘두르며 마치 하나의 육체처럼 일사불란하게 현규하를 공격했다.

    새로이 나타난 기관총들이 마수들에게 총알을 난사했지만 이곳은 그에게 자유롭지 못한 땅이었다.

    불쑥불쑥 시야각 밖에서 나타나는 건물이며 나무들이 착탄과 그의 비행을 방해했고, 마수들은 총에 맞기 직전에 땅에 흡수되어 사라졌다가 현규하의 등 뒤에서 솟아나 공격했다. 추격을 뿌리치고 높이 솟아 총을 쏘면 이번에는 전투 코끼리가 등장했다.

    연이어 총을 드르륵 난사하는 소리와 마수의 외침, 전투 코끼리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진동했다. 초조하게 응시하던 인유신은 문득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현규하의 행동이 이전에 전투할 때에 비해서 어딘가 둔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피로가……. 아, 디버프!’

    서둘러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고유 영역이 선포될 때의 디버프 효과가 여전히 발휘되는 중인 게 보였다. 능력치의 저하가 절대치가 아니라 상대치로 적용되는 만큼 안 그래도 바닥인 자신이야 별 차이를 못 느끼고 있지만, 현규하는 다를 것이다. 팔다리에 무거운 쇠 추라도 달고 움직이는 기분일 거 같아서 더욱 염려스러웠다.

    인유신의 예상대로, 현규하는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화력으로 밀고 나가는 건 때려치워야겠군.’

    그의 공격으로 마수들이 소멸하고 있으니 착실하게 히든 보스의 여력을 깎아 내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마나가 20퍼센트 저하된 상황에서 총알에 마나 코팅을 하는 가성비 최악의 공격은 오래 지속할수록 손해였다.

    대지를 움직이고 마수들을 지휘하는 데 집중하던 은징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 힘은 이 정도가 아닐 텐데.”

    “워밍업이야.”

    현규하는 필요 없어진 총들을 내던지며 뒤를 곁눈질했다. 거리가 멀지만, 그에게는 인유신이 짓고 있을 표정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입술을 세게 짓깨물었다.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

    무엇으로도 이 게이트에서 그가 겪은 아픔을 갈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은 그 시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끝내야만 했다.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프라가라흐(켈트 신화에 나오는 무기)를 꺼냈다. 그의 마나가 주입된 검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귀속 아티팩트 ‘계승자 파디샤의 영원한 정복’을 일부 해방합니다.]

    오른손 손등의 문신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현규하의 손에는 칼날이 가위처럼 두 개로 갈라진 샴쉬르, 줄피카르(4대 정통 칼리파의 무기)가 잡혀 있었다.

    그와 연결된 영혼의 환상에서 인유신은 보았다. 일곱 개의 언덕에서 시작되어 바다를 호수로 품은 영원불멸의 제국. 이를 무너트리고 계승한 젊디젊은 술탄. 숭고한 나라를 불멸의 제국으로 번창하게 한 최초의 파디샤(이슬람 국가 등에서 황제를 뜻하는 칭호). 정복의 아버지라 칭송받은 위대한 정복자. 세계 역사의 변곡점이 된 그의 전쟁.

    눈을 깜빡인 순간, 현규하는 단번에 은징가의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쿠아아앙! 칼과 창이 부딪혔을 뿐인데 땅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두 왕국의 백성이 깃들어 있는 손으로 휘두른 창. 정복자라는 찬사를 받는 파디샤의 힘이 깃든 칼리파(이슬람 국가의 최고 통치자 또는 종교적 수장)의 칼. 창과 칼이 아닌, 왕으로 살아온 자들의 거대한 운명과 운명이 부딪힌다.

    은징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이것은 정복하는 자의 힘인가!”

    “싸우는데 조잘조잘 시끄러워!”

    “나 또한 정복과 전쟁에서라면 뒤처지지는 않는다!”

    한 호흡 만에 참격이 수차례 부딪히며 교차했다. 대지가 웅웅 진동하고 공기가 회오리바람처럼 요동쳤다. 번뜩이는 도광과 창광이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살을 사납게 부수었다. 거친 파동이 구름을 찢고 땅을 갈랐다. 깊이 갈라진 땅의 틈으로 용암처럼 마수들이 솟아나며 현규하를 물어뜯으려 했다.

    인유신의 눈으로는 어떤 공방이 오가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가까스로 포착한 건 무방비하게 노출된 현규하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 도끼를 휘두르려는 마수들이었다.

    “아……!”

    외마디 비명이 터지려는 순간, 허공을 부유하던 프라가라흐가 등을 방어했다. 챙! 푸욱!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와 마수가 꿰뚫리는 파육음이 겹쳐 들렸다.

    프라가라흐는 반격하는 칼. 모든 방어를 무시하며 모든 공격을 되받아친다는 절대 명제를 지닌 칼은 섬전보다 빠른 속도로 공격을 되돌렸다. 현규하를 공격한 수십 체의 마수들은 동시에 결정석이 파괴되어 절명했다.

    인유신은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자신에게 똑같이 프라가라흐가 쥐어져 있어도 그의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은징가와 매서운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감각만에 의지하여 배후의 프라가라흐까지 운용하는 것은.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뼈저리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치밀어오르는 자신의 무능력함이 못내 쓰라렸다.

    일단의 헌터들이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건 그 무렵이었다.

    “유신아!”

    육체를 강화하여 가장 먼저 도착한 이혜연이 인유신을 덥석 끌어안았다.

    “무사했구나. 진짜 다행이야. 다치지는 않았고”

    걱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에 인유신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처럼 대꾸했다.

    “계속 굶어서 기운이 없는 거 빼고는 멀쩡해요. 누님은, 아, 여기 피가…….”

    “이건 그냥 생채기지, 뭐!”

    이혜연도 짐짓 크게 웃으면서 굵은 피가 흐르는 이마의 상처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마수의 피에 젖은 손이었기에 얼굴에는 외려 짙은 피 얼룩이 남았다.

    “갑자기 마수들이 사라졌길래 주변을 수색하던 중이었는데 역시 규하가 먼저 싸우고 있었구만.”

    당장에라도 합세하여 함께 히든 보스를 사냥해야겠지만 그의 성향을 아는 이혜연이 망설이는 사이, 다른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 능력을 썼다. 직후, 날카롭게 가다듬은 사이코키네시스의 파동이 그들의 공격을 전부 튕겨 냈다.

    “이자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끼어들지 마!”

    살기까지 깃든 사나운 일갈은 은징가가 아닌 현규하의 것이었다. 이혜연은 그저 헛웃음이나 지었고, 인유신의 납치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현규하를 떠올린 헌터들은 흠칫하여 물러섰다.

    “쉽게 패할 것 같은가!”

    땅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던 은징가가 수백 미터 밖의 초원에 나타났다.

    “가라!”

    그리고 그 사이의 거리를 빼곡하게 메우며 현규하를 겹겹이 포위한 건 바로 마수의 군단이었다. 삽시간에 마수들에게 에워싸인 현규하의 모습이 사라졌다. 헌터들이 경악하여 외쳤다.

    “아무리 현규하라도 군단 단위를 지휘하는 히든 보스를 혼자 잡겠다는 게 말이나 돼!”

    “저 새끼는 미쳤다고 같은 편한테 칼을 휘두르고 지랄이야!”

    헌터들의 아우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아아아아!

    산을 쪼개 버릴 듯한 기세로 발출된 파동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수들을 단번에 양단했다. 치솟는 피 분수와 마수의 단말마로 인해 세상이 온통 핏빛으로 물든다. 지평선을 담는 시야가 둘로 갈라졌다. 마치 이 던전 전체가 그의 칼에 베여 반으로 찢어진 것 같은 까마득함이 몰려왔다.

    무형의 기운이 유형의 형태로 발출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헌터들은 신음을 삼켰다. 누군가는 그의 별명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원 맨 아미. 군단을 지휘하는 히든 보스와 단신으로 맞서는 능력을 군단이 아니라면 무엇에 비하겠는가.

    현규하가 전방의 마수들을 공격하는 사이에도 등 뒤에는 프라가라흐에 꿰뚫린 사체가 쌓여 가고 있었다.

    “……저거 프라가라흐 아닌가”

    “프라가라흐를 방어용으로만 쓸 수도 있는 거였네…….”

    “손에 든 건 줄피카르 같은데…….”

    “몇 년 전에는 용두검도 봤었는데 대체 아티팩트를 몇 개나 들고 있는 거야.”

    “갖고만 있는다고 해서 되겠냐. 저 괴물 같은 놈이니까 자유자재로 다루는 거지, 씨발.”

    헌터들은 더 이상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방관자로 물러났고, 그 시간마저 몇 분 필요하지 않았다. 남은 거리를 단숨에 도약한 현규하의 줄피카르가 햇살을 눈부시게 반사했다. 칼날은 은징가의 창에 가로막혔으나 창에 실린 기세는 처음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졌다.

    재차 이어지는 도격이 거세게 부딪히고 마침내 창날이 박살 난 순간, 현규하의 손이 은징가의 가슴을 꿰뚫었다. 등으로 뚫고 나온 현규하의 피에 젖은 손아귀는 한 움큼의 살덩어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뒤로 크게 꺾인 은징가의 얼굴이 인유신에게도 보였다. 그 눈동자에는 푸르른 하늘과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태양이 비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심상이 만들어 낸, 부유하고 풍족한 나라의 모습이.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하였던 은징가는 자신의 마지막 전쟁에 만족했을까.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거리가 먼데도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띤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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