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습막이 어린 시야는 불투명하게 흐려진 채였다. 그렇지만 그 앞에 누가 있다는 건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유신은 엉엉 울면서 아빠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빠가 혼자 가서……. 혼자…….〉
〈…….〉
소년의 대답은 없었다.
〈아빠랑 같이 가게 형아가 도와주면 안 돼요〉
한참이나 우뚝 굳어 있던 소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유신을 덮고 있던 아빠를 조심스럽게 공중에 눕힌 그가 허리를 굽혔다. 소년의 손은 유신의 얼굴 위를 더듬거리다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몹시도 어색하고 서툰 손짓이었다.
숨통을 틀어막을 정도의 열기가 점령한 공기로 인해 소년의 손도 홧홧하게 뜨거웠다. 하지만 불쾌감이 들지는 않았다.
소년은 눈물이 글썽글썽 고인 유신의 눈물을 닦아 주고는 마치 깨지는 유리병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올려 안았다.
〈밖에 나가자. 무서운 거 많으니까 눈 꼭 감고 있어.〉
〈아빠한테 가요〉
〈……응.〉
그럼 됐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빠랑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빠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유신은 고사리손으로 소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작은 몸을 전부 품어 줄 것처럼 넓은 가슴이었다. 맞닿은 몸으로 불규칙한 심장 소리가 울렸다. 소년의 심장은 유신보다 더욱 거칠게 뛰고 있었다.
눈을 꼭 감았다. 빠르게 스쳐 가는 공기. 조금은 내려간 온도. 마수의 울음소리. 암전은 없었다.
저 밑의 깊은 곳으로 스르르 잦아드는 의식의 끝에서 유신은 되뇌었다. 괜찮아. 이제 곧 만날 테니까. 엄마랑 아빠를 만나면 2세를 쓰다듬어 주면서 꿈에서 깨도록 도와준 형아에 대해서 말해야지.
인유신은 꿈에서 깼다.
“……신 씨! 유신 씨!”
흐릿하게 무뎌진 인상으로 남아 있던 소년의 모습이 또렷한 상이 되어 망막에 맺혔다. 앳된 얼굴에는 시간의 흐름이 깃들고, 그때도 몹시 크다고 생각했던 키는 더욱 커졌고, 어깨도 넓어져 다부진 몸이 완성되었지만,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그 표정만은 변하지 않은 채로.
절박하게 쏟아지는 감정의 격류 속에서 인유신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었구나. 그때도, 당신이었어.
뱉어 내지 못하는 무참한 한마디가 심장을 찢는다.
당신이 그때 나를 구해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
가느다란 흐느낌이 뜨겁게 흘렀다.
“……유신 씨.”
습하게 올라오는 갈라진 목소리가 인유신을 감쌌다. 언제나 얄미울 만큼 뻔뻔하고, 당당한 궤변을 길게 늘어놓던 현규하가 내뱉은 단어는 겨우 그의 이름이 전부였다. 그것 하나만을 필사적으로 붙잡은 채,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을 만큼 세게 끌어안겨서 가슴이 탁 막히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 압박감에 안도했다. 제 얼굴이 일그러진 게 안을 헤집는 무참한 한마디가 아니라 압박감 때문이라 착각하게 되어서.
인유신은 팔을 뻗어 넓은 등을 안았다. 벌벌 경련하는 등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살살 등을 쓰다듬다 손이 젖은 느낌에 흠칫해서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피였다.
“규하 씨! 어디 다친 거예요”
“……아.”
그 말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만 있는 현규하의 등을 급하게 쓸었다. 왼쪽 옆구리 부근에서 유달리 젖은 느낌이 많이 났다. 바로 힐을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거 같아서 원기와 마나를 회복하는 버프도 주었다.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 현규하가 인유신을 내려다보았다. 산산이 부서진 눈동자가 천천히 재조립되며 인유신의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게.
“내가…… 내가 당신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잖아요.”
현규하의 얼굴이 더욱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말 하지 마요. 그 사람들 전부 죽든 말든 상관없었어. 당신을 놓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내가 모조리…….”
인유신은 그의 입술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그의 목숨이 숱한 사람들의 목숨보다 훨씬 더 귀하다는 생각을 품었으므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현규하의 어깨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14년 전처럼. 그때처럼 넓은 품은, 그때보다 더욱 거칠게 요동하는 심장의 울림으로 인유신을 품었다.
그 온기에 안긴 주제에, 왜 나를 구했냐는 한마디가 새록새록 감도는 자신이 무척 끔찍하게 여겨졌다. 인유신은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내 심장을 할퀴는 소리를 듣는다면 당신도 나와 만난 걸 후회할까.
“안 다쳤어요”
“진짜요.”
“진짜”
“진짜.”
인유신은 생채기 하나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안심하지 못해서 거듭하여 살피고 살피고 살피는 현규하에게 끈기 있게 대답해 주었다. 굶은 거나 다름없어서 허기진 거 말고는 멀쩡했다.
“진짜, 진짜,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히든 보스도 보내 준다고 했는데 마수가 무서워서 제가 못 나간 거고…….”
“히든 보스는 어디에 있죠”
그 말에 흠칫해서 주변을 둘러본 인유신도 겨우 이곳이 아까 있던 집이란 걸 깨달았다. 기억이 전해질 때 은징가가 옮겨 놓은 듯했다.
한숨을 삼키며 가슴을 살짝 눌렀다. 멀쩡하게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밖에 사당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요.”
현규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나가 미약해서 일반 마수 중 하나인 줄 알았더니…….”
“규하 씨는 다른 데 다친 곳 없어요”
“모르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몇 시간 전까지는 멀끔했던 슈트가 얼룩덜룩했다. 인유신이 치료했던 상처는 둘째 쳐도 어깨나 바짓단에도 활에 맞거나 불에 탄 흔적이 보여서 속상했다. 그쪽의 상처는 치료된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서 힐을 했다.
인유신은 그에게 보이지 않게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가 이렇게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뀨…….”
반지를 못 쓰게 했기 때문인지 인유신의 다리 뒤에서 눈치를 보던 8세가 다가와서 현규하의 구두에 슬쩍 제 얼굴을 가져갔다.
우윳빛의 힐이 감싼 제 어깨를 문지르며 현규하의 시선이 낮게 기울어졌다. 힐을 하는 인유신의 왼손에는 반지가 분명히 있다. 주인의 힐과 보살핌을 받자 짙은 안도감과 기쁨이 반사적으로 부추겨지고, 동시에 뇌리를 깊이 파고든 불안감이 스멀스멀 번지기 시작한다.
“옷이 찢어진 곳이 있는데 여기는…….”
조급하게 느껴질 만큼 인유신을 안으며 입술을 겹쳤다.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머뭇머뭇하면서도 가늘게 열리는 입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달콤하게 감기며 섞이는 온기는 몇 시간 전에 탐한 향기와 같은데, 수런거리는 불안감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현규하는 다만 필사적으로 인유신을 그러안으며 몇 번이고 깊이 혀를 섞고 그의 온기를 갈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