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은 아니었다. 마나의 뒤틀림이 느껴졌다. 거기에 보스 몬스터를 비롯한 마수들의 기척.
‘던전 브레이크라도 터졌나.’
현규하는 별 감흥 없이 불길을 바라보았다. 파주에 적을 둔 길드들과 공무 헌터들이 불길을 잡으며 마수를 사냥하고 있지만 수에서 턱없이 부족했다.
〈서울에서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마수들은 펜션 쪽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다. 펜션에서 간신히 탈출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현장은 더욱 혼란했다.
잠깐 보다가 서울로 다시 걸어가려던 현규하는 가슴을 불쾌하게 자극하는 기시감에 문득 발을 멈췄다. 감악산. 게이트. 화염.
《감악산 게이트는 리셋 타이밍이 언제였지》
《거긴 브레이크 터트리려고 방치하는 데라서 다들 잘 모를걸》
석호 길드와 연구소가 뭔가 실험을 하려다 실패한 게 분명했다. 자신을 가지고 실험을 하던 것처럼.
〈……씨발.〉
난생처음으로 거친 욕설이 잇새에서 씹혔다. 길드 하나를 거의 궤멸시킨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몸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으며, 상처도 겨우 피가 멎었을 뿐이다. 하지만 ‘실험’이라는 단어에 의식이 미친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능력을 끌어올려 전면의 마수들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놀라는 헌터들의 머리 위로 현규하는 몸을 날렸다.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하려면 보스 몬스터부터 시급히 처리해야 했다.
〈살려 줘어……!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바알!〉
군체로 이루어진 보스 몬스터는 오히려 그들이 피워 올린 불길에 괴로워하며 수십 겹의 비명을 지르고 애걸했다. 뜨거운 불길을 피하며 현규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인데 입은 옷이 아무리 봐도 여성용 같았다. 여장 변태들이라서 화형당한 건가.
보스 몬스터의 불꽃이 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마수들이 형성되어 육체를 일으켰다. 벌써 크게 번진 불길이다. 거기다가 자신의 부상도 가볍지 않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하이드로키네티시스트 있어요〉
〈있, 있긴 한데 D급이라…….〉
〈그럼 보스 몹의 불도 못 끄겠네.〉
헌터들에게 기대를 접은 현규하는 계곡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금방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는 잡을 엄두도 못 내고 방어선만 간신히 지키는 이 헌터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도 많이 지쳐 있었으나 대신 안가에서 싸운 헌터들에게서 수거해 온 무기들은 잔뜩 있었다.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무기를 꺼내어 한꺼번에 보스 몬스터에게 사출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무기들이 일제히 격중했다.
〈끼아아아아……!〉
외마디 비명과 거친 파육음이 동시에 불길을 찢었다. 창이 육체를 관통하며 바닥에 푹 박히고, 도끼가 다리를 잘랐다. 칼날이 등을 꿰뚫고 낫이 목을 절단했다.
바닥까지 깊이 박힌 무기들에 꿰뚫린 보스 몬스터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비명만 질러 댔다. 그 비명 또한 수십 명의 음성이 겹쳐 들렸기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사이에 현규하는 불이 붙지 않은 커다란 천막들을 들고 계곡에서 물을 가득 퍼 왔다. 공중에서 연이어 물을 거꾸로 쏟자 그제야 보스 몬스터의 몸에 붙은 불길이 잦아들었다. 물을 뒤집어쓴 군체는 더욱 괴롭게 몸을 비틀었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면 멱을 따는 건 시간문제다. 현규하는 아까 죽인 S급 헌터가 갖고 있던 용두검(태조 이성계의 검.) 두 자루를 사이코키네시스로 허공에서 휘둘렸다. 수십 번의 휘두름이 빛살처럼 빠르게 짓쳤다. 매섭게 몰아치는 한 쌍의 칼날에 난도질당한 보스 몬스터의 숨이 마침내 끊어졌다.
하지만 한번 번진 불길은 여전히 펜션을 태우고 있었고, 마수들은 건재했다. 저 안에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사람 구하면 던질 테니까 잘 받아요.〉
〈……아, 알겠습니다!〉
마수를 상대하던 것도 멈추고 멍하니 그의 싸움을 쳐다보고 있던 헌터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현규하는 이글거리는 불길을 넘어갔다.
〈지원아아!〉
누군가의 애타는 절규가 등 뒤를 울렸다.
불길 너머는 아비규환이었다. 아직도 생존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마수들에게 쫓기고 먹히고 비명을 질렀다. 헌터나 각성자는 불길 안까지 도달하지 못한 듯했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하고.
〈아, 아까 저희를 구, 구해 준 헌터님이……! 다시 안으로! 마, 말렸는데 가, 가족이 있다고…….〉
무너진 담벼락 안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그분을 구, 구해 주시면 아, 아, 안 될까요.〉
현규하는 말없이 그들을 불길 너머로 내던졌다. 지금까지 구한 사람들처럼 숲길의 나무 위로 떨어지도록 조정해서. 엉덩이에 멍이 좀 들거나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생존자들이 말한 헌터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용모를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피와 마수의 체액을 뒤집어쓴 여자 한 명이 마수들의 사체 사이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한 손으로 무기로 보이는 소방 도끼를 굳게 쥐고서.
화마의 열기 속에서 현규하는 잠자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죽지는 않았는데 밖으로 구출해도 의미는 없었다. 밖으로 옮겨지는 그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할 테니까.
의식이 없는 것 같았던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부, 탁이…….〉
〈기절 안 했어요 어차피 못 살아요. 더 아프지 않도록 바로 죽여 줄까요〉
〈가족……. 안에…….〉
여자는 부서진 턱과 망가진 성대를 가까스로 움직여 그르륵거리는 목소리를 끓어 냈다.
가족.
가족.
그따위가 뭐라고. 현규하는 입술을 짓씹으며 조소했다. 이 여자가 목숨까지 걸고 구하려 했던 가족은 벌써 도망쳤을 거다. 여자가 구하러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배신하고, 버려서.
〈가족이 아직도 있기나 할 거 같아요〉
〈아들이……. 남편……. 기임, 정훈…….〉
여자는 중얼거렸다. 아마 청각까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고막이 터지기라도 했나. 현규하는 피범벅인 여자의 귀를 내려다보고,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뿌연 동공을 응시했다가, 대답했다.
〈알았어요. 어차피 헛수고겠지만 마지막 소원이라면.〉
여자가 듣지 못할 거 같아서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 모습만큼은 어떻게든 눈으로 본 모양이다. 대답을 확인하자마자 여자의 눈동자에서는 빠른 속도로 빛이 사라졌다. 마치 그 부탁 하나만을 위해 필사적으로 생명을 붙잡고 있던 사람처럼.
〈…….〉
모르겠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좆같았고, 짜증 났으며, 구역질이 났다.
현규하는 부릅뜬 여자의 눈을 감기고, 시체가 마수들에게 더 손상되지 않도록 제 옆에 띄우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의 압력으로 불길을 조금 가라앉히며, 마수를 사냥하고, 사냥하고, 사냥하고, 사냥하며 들어간 그는 보았다.
〈김정훈 씨〉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을 지킨 아버지와, 그 품 안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된 아이를.
그가 원했으나 갖지 못한 것.
그러나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