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14)
  • 창밖이 온통 붉은 화염이었다. 살을 녹이는 것만 같은 열기가 벽 너머까지 전해졌다. 화장실에서 보낸 잠깐의 시간 동안 일변한 풍광에 유신은 우뚝 멈췄다. 뭘까 왜 이런 걸까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살려 줘어……! 뜨거워어어어어!〉

    인간의 언어인데 인간의 목소리 같지 않은 소름 끼치는 기성이 창을 진동했다. 마치 수십 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만 같은 기괴함이었다. 흠칫 놀라서 보니 창밖으로 통이 넓고 긴 옷을 입은 검은 피부의 남자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유신아!〉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현실 같지 않아 멍하게 바라보는데, 아빠가 급히 유신을 끌어안으면서 바닥으로 굴렀다.

    쨍그랑! 거의 동시에 치솟는 열기를 버티지 못한 유리창이 깨지며 파편이 튀었다. 훅 밀려들어 오는 공기와 함께 날름거리는 불길이 드세게 번졌다.

    해가 질 시간이라서 창가에 두었던 2세와 케이지가 화마에 먹혔다. 순식간에 한 줌의 잿더미로 화한 그 모습에 공포를 느끼기도 전에 아빠는 유신을 안고 뛰었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감당하지 못할 공포에 직면한 작은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의 흡수를 차단했다. 단편적으로 스치는 광경은 불길에 휩싸인 펜션, 탈출하지 못하고 고립된 사람들, 숨이 막힐 것 같은 뜨거운 공기, 목구멍을 긁어내리는 매운 연기, 불, 불, 불……. 마수들.

    〈유신아, 답답하겠지만 이거 꼭 하고 있어.〉

    아빠가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씌워 주었다. 미약한 능력이라지만 각성자인 그는 딱 한 명을 응급조처할 수 있는 무게의 아공간을 갖고 있었다.

    아공간에서 꺼낸 산소마스크를 망설임 없이 아들에게 씌운 그는 과장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아빠 금방 올게. 우리 유신이 조용히 기다릴 수 있지〉

    그리고 다시 암전. 단편적인 광경들. 마수. 마수. 마수. 아빠.

    돌아온 아빠는 온몸이 피투성이였으며, 오른쪽 팔뚝 밑이 보이지 않았다. 숨을 거칠게 내쉬고 고통으로 얼굴을 온통 일그러트리면서도 밝게 웃으려 애썼다.

    〈유신아, 아빠가 이쪽 손에 무기를 들어야 해서 우리 아들 안아 줄 수가 없어. 잘 따라올 수 있지〉

    아빠의 성한 손에는 식칼과 부러진 밀대로 급조한 어설픈 창이 들려 있었다. 화염과 마수들이 끊임없이 감각을 어지럽혔다. 거센 불길이 날뛰는 펜션의 복도를 몇 미터 나아가지도 못했는데 아빠의 상처는 늘어만 갔다.

    끝내 어설픈 무기까지 버리고 자신을 안고 힘겹게 도망치는 아빠의 품에서 유신은 생각했다. 꿈인가. 꿈인가 보다. 무서웠다. 얼른 깨고 싶었다.

    쩍 벌어진 마수의 주둥이에서 인간의 피가 섞인 타액이 끈적끈적하게 흘렀다. 동시에 불길을 버티지 못한 천장이 우지끈 무너지며 마수를 덮쳤다. 접근했던 마수의 위험은 없어졌지만 유일한 탈출구마저 화마가 점령했다.

    아빠는 그래도 웃었다.

    〈유신아, 괜찮아.〉

    아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유신아. 유신아. 아빠는 다정하게 유신을 부르며 품에 안았다. 불길이 아이의 몸에 닿을 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작은 몸을 넓은 품에 꼭꼭 가두고 엎드렸다.

    〈아빠는 불이 하나도 안 뜨거워. 저번에 봤지〉

    지글지글 타들어 가는 살갗의 고통으로 인해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도 아빠는 웃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유신은 힘겹게 물었다.

    〈아빠……. 이거 꿈이지 빨리 깼으면 좋겠다.〉

    〈……응. 꿈에서 깨면 엄마가 우리 유신이가 좋아하는 소시지 굽고, 떡볶이도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할머니도 오셨을까〉

    〈그러엄. 이건 비밀이었는데 할머니가 유신이 주려고 장난감도 사 오신댔어. 저번에 아빠랑 엄마랑 같이 본 만화 영화에 나왔던 공룡 알지 그 장난감.〉

    〈우와, 진짜 아빠랑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갖고 놀래. 2세랑도!〉

    〈꿈에서 깨면 밤새도록 실컷 놀자.〉

    〈늦게 자도 돼〉

    〈멀리 놀러 나왔으니까 오늘은 늦게 자도 괜찮아. 아빠가 엄마한테 대신 혼날게.〉

    여전히 땀이 줄줄 흐르다 못해 가슴이 답답할 만큼 뜨거웠고, 산소마스크도 갑갑했으며, 불길에 타들어 가는 소리와 마수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번지고 있었지만, 유신은 말갛게 웃었다. 꿈이니까. 꿈에서 깨면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랑 2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빠도 다치지 않고 2세도 평소처럼 쳇바퀴를 돌리고 있을 테니까.

    암전. 또 암전.

    유신을 품에 안고 엎드려 있던 아빠의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아빠. 무거워.〉

    고사리손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렸지만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툭 떨어진 아빠의 팔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동공이 풀린 눈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아빠. 아빠아…….〉

    유신은 그저, 아빠를 부르면서 흔들었다. 같이 꿈에서 깨기로 했는데. 아빠만 혼자 깨 버렸다.

    〈나도 갈래. 나도 아빠랑 같이 갈래……. 유신이도 데려가. 아빠아.〉

    눈앞이 뿌옇다. 코끝이 아리고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만 같았다. 열기로 인해 흠씬 달아오른 양 뺨으로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무언가 다가오는 묵직한 기척이 들린다. 마수다. 불길을 헤치며 마수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유신은 엉엉 울며 움직이지 않는 아빠의 품에 매달렸다. 이 무서운 꿈에서 얼른 깨고 싶었다.

    〈김정훈 씨〉

    그때.

    사납게 이글거리는 화마와 이질적인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소년의 목소리가, 불길을 가르며 유신에게 닿았다.

    마지막 남은 직속팀의 연구원은 연구소의 참변을 듣자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해외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자를 처리하는 건 쉬웠다. 양사의 민 회장을 처리하는 건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했지만 역시 쉬웠다.

    민 회장의 후계자는 조카와 두 명의 조카 손자들이다. 조카 손자 중 차남은 유명한 망나니였다. 민 회장의 장례 날에도 몰래 클럽을 들락거리던 그를 제거하는 것 또한 쉬웠다.

    연구소의 참사에 이어 연이어 집안사람이 두 명이나 죽어 나가자 민 회장의 조카도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게다가 연구소의 일 이후 갑자기 종적을 감춘 사람은 A급 헌터다. 그는 민 회장이 쉰이 넘은 나이에 겨우 낳았으나 양사가 내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던 민끝녀를 끌어내어 전면에 내세웠다.

    현규하가 양사 그룹의 오너 일가 전체에 원한을 품었으리라 예상하고 민끝녀를 총알받이로 이용한 것이다. 뒤에 숨은 한편으로 양사 그룹 산하 길드의 헌터들로 경호를 철저히 하던 와중 장남의 비보가 전해졌다.

    외국으로 출장을 갔다는 거짓말을 하고 별장에서 보호받던 장남은 저를 죽이러 온 사신에게 애걸했다. 전부 아버지 탓이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실험은 아버지와 죽은 큰할아버지가 도맡아서 했다고.

    살아남기 위해 민끝녀를 내세운 조카나, 아버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장남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현규하는 업무를 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장남을 처리하고, 파주의 안가에 숨은 조카에게 갔다.

    S급까지 있던 양사 그룹 산하의 길드는 그날 현규하에게 거의 궤멸당했다. 그의 부상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으나 최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그였고, 비밀을 아는 사람들도 전부 처리했다.

    ‘……이제 뭐 하지’

    여전히 방수 기능이 좋은 옷을 사지 못한 현규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다시 던전을 돌고 사냥하고 히든 보스의 결정석을 얻어서, 이아드로 가는 열쇠를, 그렇게, 또 던전을 돌고 사냥하고……. 혼자. 그렇게. 평생.

    아, 그렇구나. 나는 혼자구나.

    현규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느리게 받아들였다. 당연했다. 어머니에게는 버림받았고 친아버지처럼 여겼던 사람에게는 배신당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혼자인 게 뭐 어때서.〉

    짐짓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던전도 혼자 사냥할 수 있다. 제 비밀을 터놓아 봤자 정신병자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의지해 봤자 버리고, 배신할 테니까.

    현규하는 천천히 계곡을 따라 걸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이능부에서 승급 신청을 하고, 그래, 빨리 옷을 사야겠다. 피가 튀어도 잘 묻지 않는 방수 기능이 좋은 옷.

    그다음에는 협박을 하든 돈으로 사든 적당한 법적 보호자를 구해야겠지. 미성년자란 건 상당히 귀찮음을 일으키는 요소였다.

    오너 일가가 떼죽임당한 양사 그룹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을 상대하는 건 미성년자란 것보다 더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았지만…….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전부 죽여도 될 거고.

    현규하는 비식거리며 조소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살인의 감각이 먼저 떠오른다. 뭐, 어떤가. 살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게 있나.

    제 욕심으로 핏줄을 버리고, 배신하고, 총알받이로 이용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그런 게 사람인데.

    그리고 자신 또한, 그다지 가치는 없을 것이다.

    가치 없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가치 없는 세상. 오물만이 가득한 역겹고 더러운 쓰레기 덩어리.

    현규하가 그 불길을 목격한 건 ‘그냥 마주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릴까.’라는 생각을 192번째 곱씹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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