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214)
  • 〈전화할 때부터요.〉

    현규하는 여상하게 답하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타인이 된 것처럼 제 안을 헤아리던 현규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감정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가던 날에.

    평상시나 다름없는 모습에 연구원들은 더욱 벌벌 떨면서 주춤거리며 문 쪽으로 물러났다. 14살밖에 안 된 소년이지만, 저 소년은 그 자체로 살인 병기나 다름없는 상위 등급 헌터다.

    놀라는 듯했던 강석우는 이내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규하야, 너는 인류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커다란 성취가 될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나 다름없는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거야!〉

    〈얼굴도 모르는 내 친아버지가 불로불사인 건 맞는데……. 그래 봤자 인신 공양으로 신들한테 바쳐진 대가거든요. 그 뒤에는 주춧돌로 이용만 당하던데요.〉

    〈뭐〉

    흥분에 차서 외치던 강석우는 진실을 듣자 오히려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규하는 실없이 웃었다. 아아, 고작해야 이런 인간이었구나. 나의 ‘아빠’는.

    〈히익!〉

    그의 웃음에 겁먹은 연구원 하나가 허겁지겁 도망치려 했다. 쾅! 손짓 한 번으로 문을 닫은 현규하는 연구원들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으아악! 규하야! 우리는 그, 그냥 강 박사님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전부 강 박사님이 시킨 거야! 나는 정말 하기 싫었어!〉

    〈미안해! 미안해!〉

    연구원들의 아우성을 무시하며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한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겁에 질린 연구원들의 반응에 제정신이 돌아온 강석우가 뒷걸음질했다. 그 등은 이내 벽에 부딪힌다.

    〈규, 규하야. 네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차분하게 얘기부터 해 보자꾸나.〉

    현규하가 인간에게 살의를 느낀 건 9살 때부터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소년의 치기 어린 반항에 가까웠다. 미숙한 살의는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다. 현규하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욕심만 가득한 어른들이나, 경원시하며 질투하는 어른들을 보아도 살의를 품지는 않았다. 사람에게 기대를 품지 않으면 원망할 이유도 없는 거니까.

    그러니 지금 소년의 작은 가슴에 비로소 날카롭게 다듬어지며 맺히기 시작한 살의는 상대에게 기대감을 품었다는 방증이었다. 마음을 기대었다. 의지했다. 아주, 아주 많이 좋아했다.

    〈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 사이로 피 분수가 천장까지 튀었다. 더운 김이 나는 새빨간 선혈에 젖은 손을 보며, 현규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방금 갈아입은 새 옷인데 또 더러워졌네. 역시 방수 기능이 좋은 옷을 사야 해.

    내가 특질을 밝힌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훈련소에서 처음 데려올 때부터 이용할 생각이었던 걸까. 불현듯 궁금해졌지만 이제는 답을 듣지 못할 의문이었다. 그리고 굳이 캐내고 싶을 만큼 절실하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현규하는 비명을 지르며 애걸하는 연구원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까 통화한 회장님이 누구예요 누가 내 특질을 더 알고 있어요〉

    수면실에서 쉬다가 돌아온 두 명의 연구원들은 문을 열자마자 바닥에 즐비하게 널린 주검들을 보고는 발을 멈추었다. 철퍽. 피가 바짓단까지 튀었다.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 있던 뇌는 한순간에 눈앞으로 들이닥친 비일상적인 상황에 바로 대처하지 못했다.

    툭, 하고 떨어진 머리가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며 더운 피를 왈칵 쏟아 냈다.

    〈아아아악! 아악!〉

    얼굴에 피 분수가 쏟아진 연구원이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 머리가 터져 죽었다.

    허무한 죽음이었으나 반향은 있었다. 연구원의 비명은 연구소 내에 비상벨을 울리게 했으며 경비를 비롯한 석호 길드의 헌터들이 달려오게 했다. 홀로 대형급 던전을 클리어한 피로와 상처가 회복되지도 않았다. 저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창문으로 빠져나와 연구소에서 도망쳤다. 어느새 상처가 터져 번지기 시작하는 피로 옷이 붉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걸리적거리는 명함들을 찢어 버렸다.

    도망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연구 자료는 전부 파기했다. 다른 직속 팀원 한 명은 오늘까지 집에서 쉰다고 했다. 뱀파이어라는 특이 형질을 알고 있는 외부 인물은 양사의 민 회장을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뿐이다…….

    〈아.〉

    현규하는 제 심장이 불가해할 만큼 거칠게 뛰고 있다는 걸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쿵쾅거리는 왼쪽 가슴 위를 문지르다 못해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는다.

    빠악! 늑골에 금이 갈 만큼 세게 후려쳤다. 아까부터 연신 투두둑 쏟아지던 것이 제 눈물이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아 씨. 무슨 가슴 좀 때렸다고 울어.〉

    일부러 짐짓 자신을 탓하며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하지만 육체의 통증으로 인한 눈물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이 눈물은, 심장을 후벼파는 불안감은, 그때와 똑같았으니까.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가던 날.

    어머니에게 필요 없어진 아이가 되었던 날.

    〈……엄마아.〉

    부모를 잃은 아이는 끝내 갓난아기처럼 몸을 한껏 웅크리고서 숨 막히는 울음을 토해 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여기가 히든 보스의 영역이니까 반지를 쓰면 규하 씨에게 부하가 걸리기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이동될 때 다치기라도 해”

    머리를 쥐어짜서 여러 이유를 물어봤지만 8세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삐에에에…….” 하고 작게 울며 손등에 조심스럽게 얼굴을 부볐다. 저를 미워하지 말라는 부탁 같아서 인유신은 한숨과 함께 8세의 털을 쓰다듬었다.

    “나도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진짜…….”

    8세를 손안에 안고 집을 나왔다. 은징가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남아 있는 건물이 방금 있던 집을 제외하면 한 곳뿐이었다.

    그곳은 조상신을 모시는 일종의 사당 같은 분위기였다. 은징가는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전황을 살피며 마수들과 영역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머뭇거리고 있자니 이내 눈을 떴다.

    “할 말이 있는가.”

    “은징가 님이 저를 인질로 삼을 작정이 아니시라면 밖으로 보내 주면 안 될까요”

    “여기가 안전하다. 벗어나면 너도 생명체의 하나이니 마수들이 노릴 텐데 감당할 수 있다면 나가는 걸 막지 않으마.”

    그 말이 맞았다. 자신은 제 목숨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가치 없는 인간이었다.

    울적한 얼굴로 쪼그려 앉자 은징가가 다시 물었다.

    “너를 대가로 다른 사람들을 보내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오히려 안도하지 않았나”

    “……밖에 저를 찾고 있는 사람이 걱정되어서요.”

    붙잡혀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뒤늦게야 인유신은 후회했다. 그렇지만 경매장에서 도망쳤던 수많은 사람보다 현규하 한 명의 안위가 더 귀하게 느껴지는 건,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닐까.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은징가가 시선을 먼 곳으로 두었다.

    “내가 모르는 수백, 수천 명보다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목숨이 중한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마음이다. 나도 그랬으니.”

    “……은징가 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젖을 몇 번 먹이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살해된 내 아들이지.”

    “아……. 죄송합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니 되었다. 죽을 무렵에는 아들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몰렸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은징가는 다시 인유신을 바라보았다. 곧고 단호한 눈동자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동생과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내 백성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며 나라를 지켰을 것이다.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러며 그녀는 물었다.

    “너는 어떠하냐.”

    “……저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 사람과 엮이지 않을 거예요.”

    후회한다. 그를 인식한 것을. 그를 테이밍한 것을. 그의 운명을 자신에게 강제로 묶은 것을.

    보잘것없는 자신 때문에 부모님을 잃은 그때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반복되고 말았다. 인유신은 14년 전에 죽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은징가가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너는 14년 전에 화염을 발하는 마수와 마주친 적이 있구나.”

    “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일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혈계를 펼친 왕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네가 14년 전에 휩쓸린 그 땅이 품고 있는 기억이 바로 나의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의 결정석을 선택한 것인가.”

    아연히 그녀를 응시했다. 14년 전에 부모님을 비롯하여 많은 생명을 앗아 간 그 보스 몬스터가 정말 화형당하는 후궁들이었단 걸까.

    한데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던전의 배경이 중첩되는 건 흔하다.

    인유신이 되묻기도 전에 은징가가 창을 크게 내저었다. 화염이 날아와 그를 감쌌다. 타오르는 불길이 현재의 시간을 살라 먹으며, 의식을 아득한 과거로 추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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