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소년을 대하는 듯한 강석우의 문자를 피식 웃으면서 읽었다.
명함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그에게 사소한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기라고 했던 강석우의 조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명함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현규하는 오늘 목격한 공태성의 전투를 복기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더 센 거 같은데…….’
공태성은 곧 S급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규하는 허공에서 벌떡 일어났다.
까짓거, 해 보면 되지. 안 되면 말고.
만약 승급이 확실히 된다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강석우에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불러야지. 아빠, 하고.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특별한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저녁 식사를 배달시켜서 먹고, 잠깐 눈을 붙였다.
S급으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리셋이 완료된 대형 이상의 던전을 홀로 클리어해야 한다. 마침 석호 길드가 소유한 대형 던전 중 오늘 저녁에 리셋되는 곳을 알고 있었다.
‘던전을 일찍 클리어해서 생긴 손해는 나중에 갚으면 되겠지.’
승급 과정에는 이능부의 헌터를 비롯한 관련 공무원이 참관해야 하지만, 현규하는 클리어 영상을 녹화할 캠코더만 챙겼다. 일단 이걸 증거로 제시해 보고, 안 된다고 하면 정식 절차를 밟아 다른 던전을 클리어할 작정이었다. 한 번 한 거 두 번을 못 할까.
캠코더를 허공에 띄워서 녹화한 영상을 확인해 보는 것으로 준비는 다 끝났다. 현규하는 등교하거나 연구소에 놀러 갈 때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왔다.
던전에 있다가 타이밍을 못 맞춰 리셋에 휘말려 죽으면 시체조차 못 찾는다. 그 때문에 리셋 전후에는 헌터들도 휴식을 취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리셋이 늦은 시각에 일어나니 내일까지는 출입자가 없을 것이다.
〈하필이면 리셋되는 날 경비를 맡냐고.〉
〈이럴 때가 제일 심심하다니까.〉
상가 건물 뒤쪽에 열린 게이트를 지키던 길드원들이 따분하게 하품했다.
〈감악산 게이트는 리셋 타이밍이 언제였지〉
〈거긴 브레이크 터트리려고 방치하는 데라서 다들 잘 모를걸〉
〈근데 그 밑에 펜션들도 많은데 무작정 브레이크 터트려도 되나〉
〈보스 몹이 화염 공격을 할 거라는 추정이 있어서 연구소에서 뭘 조사하려는 모양이더라고.〉
수다를 흘려들으며 허공으로 마나를 주입한 스크롤을 몰래 날려 보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찢었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졸음에 저항하는 듯하던 길드원들은 곧 쿨쿨 곯아떨어졌다.
현규하는 가볍게 길드원들을 넘어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122시간 19분 07초]
리셋 시간은 던전마다 다르고 이 던전은 대략 5일 주기다. 현규하도 사냥을 하러 몇 번 드나들었던 던전이었다. 그의 뱀파이어 특질을 알게 된 강석우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던전이기도 하다.
던전의 풍경은 옛 동유럽의 작은 마을이었다. 시간은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 환영이 일렁거렸다.
좁고 깊은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강가의 낡은 물레방앗간에 숨어 사는 뱀파이어가 곡식을 빻으러 오는 사람들을 몰래 죽이고 피를 흡혈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애꿎은 사람을 뱀파이어로 몰아 죽였다. 무덤을 파헤치고, 들장미와 산사나무 가지를 걸고, 겨자씨를 뿌렸지만 뱀파이어는 퇴치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죽어 갔다.
마을 사람들은 돈을 갹출하여 뱀파이어 헌터를 초빙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인 담피르, 그리고 담피르와 대대로 운명을 함께하며 같은 이름의 신으로부터 마법을 배워 하얀 동물로 변신하는 크르스니크가 마을을 방문했다. 보통 서로 연관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다던데, 이 배경에서는 이부자매였던 듯했다.
그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담피르와 크르스니크라…….’
신비가 존재하지 않는 이 철의 시대에는 뱀파이어가 없다. 담피르와 크르스니크 또한 태어나지 않을 자들이었다. 태어난다고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현규하는 불현듯 떠오른 상념을 거칠게 지웠다.
이어 마수들이 나타났다. 캠코더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한 뒤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현규하는 조금 후회했다.
‘역시 방수되는 옷을 장만한 뒤 싸웠어야 했어.’
마수의 체액과 피로 물들어 본래의 색을 상실한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계곡물로 들어갔다. 던전 안의 계절이 늦가을인 데다 산속 깊은 곳을 흐르는 강이라 몹시 차가웠다. A급 헌터의 육체가 아니었다면 뼈마디까지 시렸을 것이다.
‘아니다. 이제 S급인가.’
현규하는 언덕처럼 쌓인 마수들의 시체 옆에 널브러진 보스 몬스터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보스 몬스터는 뱀파이어 사바 사바노비치였다. 던전의 배경인 자로졔가 어느 평행 세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아는 자로졔는 현재도 인구가 수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 작은 마을에 숨어서 사람들을 사냥하던 뱀파이어 따위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대형급이라 이어진 산맥까지 전부 던전의 영역이긴 했지만.
게다가 적이 뱀파이어라면 상성상 절대적으로 유리하기도 했고.
‘그 덕분에 생각보다는 쉽게 잡긴 했지만……. 음, 다른 던전도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해도 솔플로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을 거 같아.’
오히려 확신이 생겼다.
머리카락에 밴 핏물까지 깨끗이 씻은 현규하는 몸 곳곳에 생긴 상처에 약을 바르고 지혈 패치를 붙였다.
뼈가 보일 정도의 부상에도 미간을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 끝내고 붕대를 감았다. 이럴 때는 사이코키네티시스트라는 게 편했다. 손이 닿지 않는 등 뒤의 상처도 조처할 수 있다.
‘게임에 나온다는 포션처럼 마시거나 뿌리기만 해도 상처가 회복되는 약물이 있으면 편하겠다.’
결정석은 그냥 놔뒀다. 던전을 무단으로 털어먹었으니 결정석 정도는 석호 길드에 보상으로 줘야 할 거 같았다.
트로트를 흥얼거리며 새 옷을 꺼내 갈아입은 현규하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폈다. S급이라는 게 증명되었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현규하였고, 엄마를 찾고 있었고, 강석우와 같이 살고 있었다.
가슴이 설레는 흥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기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할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뻐할 그를 떠올리니 S급이 된 게 조금은 기쁘고, 뿌듯해졌다.
그리고 그는, S급이 된 것보다 자신이 그를 부르는 한마디를 더 기뻐할 것이다. 현규하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연습해 보았다.
‘아빠.’
무척 기뻐졌다.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곯아떨어져 있는 헌터들을 슬쩍 지나쳤다. 하품이 길게 나왔다. 몹시 졸리고 피곤했다. 얼추 치료하긴 했다지만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는 상처들도 욱신거린다.
피로에 지친 몸은 당장 휴식을 취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현규하는 하늘로 몸을 띄웠다. 버스로 연구소까지 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당장 강석우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를 아빠라 부르고 싶었다.
자신과는 달리 감성이 풍부한 강석우다. 어쩌면 그 나이의 아저씨가 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놀려 줘야지. 웃음이 나왔다. 훈련소에서의 그 나날도 강석우, 아니 아빠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하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고 여겨진다.
새벽빛에 젖은 연구소는 고즈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비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 규하 왔냐 이 시간부터 웬일이야 오늘도 학교 가는 날 아닌가〉
〈강 박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죠〉
〈어. 연락해 줄까〉
〈됐어요. 깜짝 놀라게 해 줄래요.〉
〈기쁜 소식이라도 전해 주려는 거야 얼굴이 활짝 피었네.〉
현규하는 그냥 피식 웃고는 5층에 위치한 강석우의 연구실 쪽으로 몸을 날렸다. 새벽녘의 공기가 제법 선선하여 연구실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창문 가까이 다가가니 두런두런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바로 얼굴을 쑥 내밀어 인사하려다가,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벽에 붙어서 몸을 숨겼다. 이 시간부터 통화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업무 전화 같았다. 방해하면 안 될 것이다.
연구실 안에는 강석우 외에도 세 명의 연구원이 더 있었다. 전부 강석우의 직속 팀이며, 그의 뱀파이어 특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규하의 특질은 은밀히 연구되고 있었기에 직속 팀원 여섯 명 외에는 공유한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전화의 내용을 듣기 전까지는.
〈심려 마십시오, 회장님. 규하의 유전자에서 단서가 보이고 있습니다. 예, 예. 자세한 얘기는 직접 뵈었을 때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조만간에 확실한 진척이 될 실마리가 보이고 있으니까요. 그때 뒤처리만 잘해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강석우에게 연구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은 실험과 검증을 해 봤지만 규하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장담하시는 것처럼 확실한 단서가 될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규하의 부계 혈통 유전자가 그 증명 아닌가. 천 년 전 루마니아인의 유전자와 완전히 동일한데! 이만큼 유전자의 동일성이 보인다면 단순히 부계가 루마니아인이라는 뜻이 아니야. 부친이 적어도 천 년 전의 사람이라는 거라고!〉
흥분하여 외치는 강석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붉었다.
〈이게 불로불사의 증명이 아니면 뭐겠나〉
〈규하가 불로불사라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그 애의 텔로미어는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어요. 가뜩이나 회장님이 기대하고 있으신데 만약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면 후폭풍이 크게 닥치는 건 아닐지…….〉
〈그러니까 해부하여 뇌까지 뜯어봐야 한다는 거지!〉
얼굴이 검붉은 빛을 띨 정도로 흥분한 강석우의 눈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광기로 번들거렸다.
〈내 양아들로 호적 정리가 완벽히 끝나면 ‘불의의 사고’로 시체를 인도받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야. 그렇게 되면 인류가 드디어 불로불사의 비밀을 손에 넣게 되는 걸세!〉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의 기대감을 부추기는 건 섣부른……!〉
대화를 섞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연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더듬거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규, 규하야.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