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214)
  • 〈사실은 저한테 뱀파이어 특질이 있어요.〉

    6학년이 되었을 때 고백했다. 연구소를 들락거리면서 강석우가 상상 이상으로 특질 연구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뱀파이어라는 특질이 제 아버지를 유추하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봐 염려되어 그간은 쉽게 말문을 떼지 못했다.

    강석우는 우뚝 굳었다. 왜 이제 말했냐고 화를 내면 어쩌지. 소년의 작은 심장이 연신 콩닥콩닥했지만 기우였다.

    이내 환한 미소가 강석우의 얼굴을 점령했다.

    〈오, 히든 특성이 뱀파이어라고 멋진데〉

    그가 반겨 주자 마냥 기뻐서 같이 웃던 현규하는, 강석우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이 지나칠 정도로 과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광적인 희열이었다.

    피를 뽑아 갔다. 제 몸으로 각종 실험을 했다. 때로는 약물이 주입되어 한참이나 의식을 잃었다가 강석우가 즐겁게 부르는 트로트 노랫소리에 깨어나곤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빠’에게 도움이 된다면.

    1년 하고도 수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이는 어려도 A급의 육체는 갖은 실험을 어떻게든 버텨 냈다. 몇 번 쓰러졌던 건 굳이 강석우에게 알리지 않았다.

    〈특질을 가진 각성자도 만나기 힘든데 심지어 뱀파이어 특질이라니! 규하야, 너는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복덩이구나.〉

    〈연구에 진척이 있어요〉

    〈그럼! 네가 도와준 이후로 순풍을 만난 배가 따로 없어. 이러다가 불로불사의 뱀파이어라도 부활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강석우는 껄껄 웃으며 벌써 그와 신장이 비슷해진 현규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론은 잘 모르겠지만 제 피로 뱀파이어를 부활하게 한다면 그건 이아드에 있는 아버지의 복제 인간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 무의미한 상념을 흘리면서도 현규하는 강석우에게는 하지 못할 냉소를 곱씹었다.

    불로불사 따위. 뭐가 좋다고. 기껏해야 도시의 주춧돌이나 되겠지.

    〈규하야.〉

    문득 강석우가 헛기침을 하며 현규하의 손을 붙잡았다. 처음 맞잡았을 때처럼 여전히 크고, 따스한 어른의 손이었다.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다만……. 너와 나. 우리 진짜 가족이 되지 않겠니〉

    기다렸던 말이었다. 흥분한 심장이 동당거리며 뛰는 소리가 어지럽게 머릿속을 울린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어요〉

    〈당연하지! 나는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후회하지 않도록 충분히 고민하려무나.〉

    현규하의 손을 토닥거리던 강석우는 깜빡했다는 듯 뒷말을 덧붙였다.

    〈만약 네가 거절하더라도 널 내쫓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고. 하하하.〉

    〈쫓아내도 버틸 건데요. 내가 아니면 아저씨의 맛없는 요리는 누가 먹어요.〉

    〈그래도 옛날보다 좀 나아지지 않았냐〉

    〈이젠 내가 더 잘할걸요.〉

    바로 ‘좋아요, 아빠.’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건 이 기쁨과 설렘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어서였다. 유치한 어린애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어떤가. 자신은 14살짜리 어린애가 맞는데.

    그때라도 깨달아야 했다.

    즉시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어린애의 유치한 감상이 아니라, 위험을 감지한 본능의 경종이었다는 것을.

    그때라도 깨달아서, 아주 멀리 떠났어야 했다.

    강석우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아주 멀리.

    계절은 빠르게 흘렀고, 교복이 하복으로 바뀌었다.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하얀 팔을 본 같은 반의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이 자식은 무슨 팔까지 피부가 하얗냐.〉

    〈규하는 몸이 약해서 밖을 잘 안 다니니까 그렇지!〉

    실험이나 후유증 때문에 수업을 종종 빠졌고, 강석우는 온갖 병명을 갖다 붙여서 핑계를 만들었다. 그 덕에 현규하는 툭하면 입원하는 병약한 미소년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병원으로 바로 가냐〉

    귀에 익은 트로트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는 그에게 반 아이가 물었다. 하교하고 연구소에 갈 때마다 늘 병원에 간다는 말을 했었다.

    〈오늘은 안 가.〉

    〈그럼 PC방에 같이 갈래 생각해 보니까 너랑 같이 간 적이 한 번도 없더라.〉

    〈야, 규하가 너네처럼 맨날 공부도 안 하고 PC방에나 가는 줄 아니〉

    PC방을 안 갔을 뿐 아니라 게임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던전에서 직접 마수를 사냥하는 거에 비한다면 게임으로 조작하는 건 밋밋했다. 딱히 흥미도 일지 않았고.

    삐이이이이이!

    평소처럼 그를 둘러싼 아이들과 버스 정류장 근처까지 왔을 때, 갑자기 청각을 불쾌하게 자극하는 새된 재난 경보가 울렸다.

    〈뭐, 뭐야!〉

    〈이거, 더, 더, 던전 브레이크라는 사이렌 아니야!〉

    〈돌발 게이트.〉

    현규하는 정정해 주었다. 일반인에게는 돌발 게이트든 던전 브레이크든 딱히 차이가 없겠지만.

    사이렌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당황하면서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 근처의 대피소로 달렸다.

    〈현규하! 인마! 빨리! 빨리 와!〉

    현규하도 잠깐 고민하다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곧 헌터들이 도착할 테고, ‘병약한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비록 자신이 그 생활에 의미는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하지만 헌터들보다 마수들이 더 빨랐다.

    끼아아아!

    건물 뒤로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비교적 질서 정연하게 대피하던 행렬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 내달렸다. 거기에 휩쓸린 반 아이 중 한 명이 넘어졌다.

    〈안 가〉

    〈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넘어진 아이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흐어어엉 하고 겁에 질린 울음을 터트렸다. 그 아이만이 아니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넘어지고 부딪히며 다치는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현규하는 음, 하고 목뒤를 한 번 긁적이고는 마수들이 몰려오는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규하야! 가면 안……!〉

    패닉에 빠져서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는지 넘어진 아이가 애타게 외치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인파를 거스르며 걷는 게 번거로워진 현규하가 그냥 허공으로 몸을 띄운 탓이다.

    하늘로 날아오른 현규하는 마수들에게 양팔을 뻗었다. 새된 기성을 울리며 몰아치던 일단의 마수들이 우뚝 굳었다. 현규하는 그들을 인적 없는 넓은 도로에 내던졌다.

    쿵! 키아아아! 쿠궁! 크하아아!

    마수들의 울음소리와 그들을 도로에 쿵쿵 내던지는 소리가 마구 뒤섞였다. 3층 높이로 한곳에 탑처럼 쌓인 마수들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소리만 질러 댔다.

    현규하는 고민했다.

    ‘여기서 터트려 죽이면 나한테도 핏물이나 살점이 튈 거 같은데.’

    목만 부러트릴 세세한 컨트롤도, 장거리에서 능력을 조정하는 컨트롤도, 전신에 역장을 두르며 동시에 마수들을 죽이는 컨트롤도 아직은 미숙하다.

    새로 입은 하복을 피로 더럽히기 싫었던 그는 그냥 다른 헌터들이 올 때까지 붙잡아 두기로 했다.

    ‘역시 옷은 방수 기능이 좋은 거로 사야겠어.’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거기 교복 입은 학생! 조금만 더 붙잡고 있어!〉

    웬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전봇대와 건물의 벽을 걷어차고 도약하여 높이 뛰어올랐다. 하늘에 닿을 듯 뛰어오른 그녀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층층이 쌓인 마수들의 정중앙에 권격이 혜성처럼 내리꽂혔다. 묵직한 충격을 받은 도로가 한순간 지진처럼 뒤흔들리고, 단말마의 비명이 피 분수와 함께 높이 솟았다.

    재빨리 피를 피해 벗어난 현규하는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마수들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강체술사를 구경했다. 구경하다 보니 인터넷으로 봤던 이름이 생각났다. 공무 헌터인 이혜연이었던가.

    다른 구역의 마수들도 정리한 헌터들이 속속 도착하고, 남은 마수들은 곧 정리되었다.

    〈야, 성냥 대가리! 내 독 연기 태우지 말랬지!〉

    〈내 불에 타지 않도록 노력을 하면 될 거 아닌가〉

    〈워, 워. 진혁아. 네가 참아. 오늘 우리 파파가 아주 예민한 날이야.〉

    입으로 싸우는 헌터들은 남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자기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파파라고 부르다니 미친놈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수들의 체액으로 범벅이 된 이혜연이 치를 떨었다.

    〈쓰읍, 육아 휴직 끝나자마자 액땜 한번 거하게 하네. 강체술사는 하이드로키네티시스트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니까. 겁내 비싸지만 이 상태로 청사까지 귀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혼잣말로 투덜거린 이혜연이 스크롤을 찢었다. 머리 위에서 양동이를 기울인 것처럼 물이 쏟아지며 몸을 씻어 내렸다. 이어 하얀색 불길이 뱀처럼 그녀의 몸을 휘돌면서 물기를 말려 주었다. 체액의 흔적은 덕지덕지 남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오오. 공태성. 땡큐, 땡큐.〉

    공태성이라면 우라노스 길드의 젊은 길드장이었지. 현규하의 시선이 예민한 인상의 훤칠한 미남에게 향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솔플로 던전을 공략할 예정이라했던가. 그가 무사히 S급으로 승급한다면 최연소 기록이 경신된다.

    현규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싸우는 걸 직접 보니까 내가 더 센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도와줘서 고맙다, 야. 길원들끼리 무슨 모임이라도 있었냐〉

    〈파파가 여친이랑 깨진 걸 위로해 주려고 다 같이 영화 보러 가던 중이었어.〉

    〈아, 맞다. 양사가 딸내미랑 사귄다며〉

    〈과거형이야, 누나. 이제 새벽 2시에 술 처먹고 질질 짜면서 구여친한테 전화하는 일만 남았지.〉

    〈닥쳐!〉

    독을 쓰던 헌터가 이죽거렸다.

    〈여친한테 안 차이게 노오력을 했어야지.〉

    〈…….〉

    기운 내라며 공태성의 등짝을 팡팡 두드리던 이혜연이 다가오는 현규하를 보고 반색했다.

    〈학생! 아까 마수들 붙잡고 있는 솜씨 정말 대단했어. 고등학생이지 어느 학교야 각성자 아카데미 다녀〉

    〈중학생인데요.〉

    〈진짜 키가 그렇게 큰데〉

    〈중1이에요.〉

    중1이라는 말에 이혜연만이 아니라 주변의 헌터들까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나이에 이만한 실력이라면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이름이 뭐야〉

    〈현규하요. 던전은 아는 길드가 갖고 있는 곳만 다녀서요.〉

    〈……아! 그 침식 게이트 우와, 그 애기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한 박자 늦게 9살에 침식 게이트를 공략했던 그 현규하를 떠올린 그들이 감탄하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손을 내밀었다.

    〈줘요.〉

    〈응〉

    〈오늘 잡은 마수들의 결정석, 내 몫은 없어요 돈 모아서 방수 잘되는 마수 가죽으로 만든 옷 사려고요.〉

    〈참. 놀라서 깜빡할 뻔했네. 이번 주 안으로 정산될 텐데, 연락처 주면 담당 공무원한테 전해 줄게. 연락 오면 서류 작성해서 이능부에 우편으로 보내면 돼. 규하는 아직 어리니까 반드시 법적 보호자가 대리해야 하고.〉

    〈아빠 같은 아저씨랑 같이 살아요.〉

    현규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석호 길드에서 정산받는 것처럼 강석우가 대리하면 될 것이다.

    휴대폰 번호를 찍어 주자, 곁에 잠자코 서 있던 공태성이 명함을 건넸다.

    〈어른이 되고 길드에 가입할 의향이 생긴다면, 우리 길드로 와라. 그때라면 우라노스는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길드가 되어 있을 테니까.〉

    〈차마 돈 안 되는 공무원이 되어 달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공무 헌터도 고려해 줘!〉

    두 사람에게 받은 명함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넘어졌던 반 아이가 아직도 주저앉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이코키네시스로 가볍게 일으켜 주자, 몹시 낯선 사람을 향하는 듯한 목소리로 부른다.

    〈……규하야〉

    〈안녕.〉

    그 안녕이 첫인사의 ‘안녕’인지 작별 인사의 ‘안녕’인지는 현규하도 잘 몰랐다. 그는 한마디의 인사만 남기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내일부터는 병약한 미소년의 생활도 끝이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귀가한 집은 비어 있었다.

    [내일까지 연구소에 있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렴. 문단속 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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