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214)

다시 초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강석우가 정부와 어떤 합의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규하에게는 가짜 신분증이 주어졌다. 머리를 염색하고 컬러 렌즈를 끼니 유독 해사한 얼굴의 아이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9살짜리 천재란 사실을 학교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기초 수업은 훈련소에서 다 뗐지만, 평범한 학교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학원으로 갈 시간에 현규하는 게이트를 드나들었다.

〈아무래도 정서상 안 좋을 거 같은데…….〉

강석우는 꺼림칙하게 여겼지만 마수를 사냥하고 싶다는 현규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대신 어른들과 꼭 같이 다녀야 한다며 연구소와 계약한 석호 길드를 연결해 주었다.

각성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마수를 사냥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소년을 움직이는 건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나에게, 우리의 세계로 오려무나. 내 아들아.》

머릿속에 새겨진 저주와 진배없는 아버지의 부름과.

《규하야, 미안해. 엄마는 네 아빠가 걱정되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어. 정말 많이, 외로운 사람이거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현규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아드와 연결된 던전의 히든 보스를 사냥하면 결정석이 나온다. 그 결정석에 제 마나를 주입하면 극히 낮은 확률로 이아드로 가는 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일곱 개의 열쇠를 모아야 했다. 아마도 평생. 어쩌면 평생이 지나도 모으지 못할지도 모르는 열쇠를.

의무이자 목적을 위해 소년은 달음박질쳤다. 그 끝에 지독한 권태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현규하는 열심히 마수를 사냥했고, 능력을 다듬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강석우는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꽤 많은 시간을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보냈지만 현규하를 데려온 후에는 시간을 많이 내 주려 노력했다.

집안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청소도 하고 어설프게나마 요리도 시도했다. 공부를 도와주는 게 좋아서 어렵지도 않은 걸 일부러 물어봤다. 바쁜 와중에도 휴일에는 꼬박꼬박 시간을 빼내서 같이 보냈다. 등산도 하고, 축구도 구경했다. 먼지로 엉망진창이 되어서 대청소도 했고, 나란히 목욕탕에도 갔다.

아드님이 참 훤칠하게 잘생겼네요. 마주치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강석우는 그저 웃었으며, 현규하는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주 많은 시간을.

그 덕에 현규하도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늘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트로트라는 것. 아내가 병으로 죽은 지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리워한다는 것. 후원을 받는 대기업은 양사라는 것. 주된 연구는 히든 특성 중 특정 종족의 특질이라는 것.

〈특질이라는 거, 굉장하지 않냐. 이건 분명히 평행 세계를 증명하는 거라고!〉

술이 한잔 들어가면 강석우는 잔뜩 흥분하여 떠들었다. 재미있게 들으면서도 현규하는 입이 근질거렸다. 평행 세계 맞아요. 우리 엄마랑 아빠도 거기에 있어요.

하지만 하지 못할 이야기다. 강석우라면 미친놈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믿어 주겠지만 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머릿속에 각인된 아버지의 음성이 가로막았다. 훈련소에서 꺼내 주고 마치 친아버지처럼 보살피는 그에게도 하지 못할 말.

친아버지.

그 단어를 떠올린 현규하는 크게 놀랐다. 맞다. 그랬다. 책이나 TV에서나 보던 ‘아버지’는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그에게 피와 유전자를 주기만 했을 뿐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

〈아저씨는 저를 왜 훈련소에서 데리고 왔어요〉

〈애가 고생하는 걸 뻔히 보고도 모르는 척하면 그게 인간이냐.〉

그 말을 하며 캔 맥주를 하나 더 비운 강석우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우리 마누라가 말이야. 먼 길이 힘들었는지 배 속의 애랑 같이 갔어. 아들이었지.〉

〈…….〉

〈규하야. 너, 나랑…….〉

강석우는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아주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쓰게 웃으며 현규하의 머리칼을 거칠게 쑤석거렸다. 소년의 입 안에 대롱대롱 매달린 한마디가 힘겹게 감돌았다. 아빠.

다음 날부터 현규하의 일상에는 강석우를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연구소가 녹아들었다. 연구소에서는 강석우가 흥겹게 부르는 트로트가 더욱 자주 들렸다.

  

“삐이이이…….”

8세가 코를 쫑긋거리며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위로해 주려는 걸까. 애써 웃으며 보드라운 8세의 몸을 보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사람들로 꽉 찼던 거리는 조용해졌고 대다수의 건물들이 사라졌다. 도시를 구성하던 힘을 거두어서 전투에 쏟고 있다는 뜻이겠지.

반지.

인유신은 내내 만지작거리던 반지를 꽉 눌렀다. 이 반지의 힘을 써야겠다. 맹목적으로 묶여 있는 그를 보게 되는 건 두렵지만, 자신을 찾느라 그가 다치는 건 더욱 무섭다.

반지에 손을 얹어 마나를 주입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파…….”

그렇지만 ‘파계’라는 시동어는 완성되지 못했다.

“삐익! 뺙!”

8세가 작은 몸을 손가락에 부딪혔다. 얼떨결에 손이 떨어지자 반지를 낀 약지 위에 엎드렸다. 언어로 전하지 않아도 의도가 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반지를 쓰지 말라는 거야”

“찍!”

“어째서 규하 씨가 다치고 있을지도 몰라. 8세야, 비켜 줄래”

“뻬엥!”

전투가 벌어지기만 해도 기절하는 심약한 녀석이 처음으로 완강하게 버텼다. 들어 올리려 했지만 짧은 다리에 힘까지 꽉 주어 손을 붙잡았다.

“너까지 진짜 왜 이래…….”

결국 8세를 억지로 떼어 내지도 못한 인유신은 울적하게 고개를 숙였다. 턱 막힌 가슴이 뒤집혀서 요동치는 것만 같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현규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난하게 마수를 사냥하고, 히든 보스를 공략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텐데. 모든 걸 다 갖고 태어난 사람이 무엇 하나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얽매여서,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왜 너 같은 게! 하필 네가 살아서!〉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시리게 울린다.

역시 나는 14년 전에 죽었어야 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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