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214)
  • 몇 시간째 변함이 없는 상태창을 바라보며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익숙한 햄스터 모양의 굴곡이 손가락의 피부를 눌렀다.

    〈1회용 호신용품이라고 생각해요. 위험할 때 반지에 마나를 주입하면서 시동어인 ‘파계’를 말하면 돼요. 그럼 내가 어디에 있든, 설령 며칠 전과 같은 침식 게이트 밖에 있더라도 세계의 경계를 부수어서 당신을 찾아올 수 있어요.〉

    여기에서 이 반지를 사용하면 그는 자신에게 올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반지를 자신이 정말 써도 되는 건지 자꾸만 망설여졌다.

    아무런 감정도 투영되지 않는 상태창이 지속되는 걸 보니 이 관계가 더욱 무서워졌다. 한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심지어 강제로 묶인 관계가 과연 온당할까. 해묵은 불안과 걱정이 뭉클거리며 영혼을 잠식했다.

    자신이 여기에서 죽는다면.

    인유신은 가정을 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즉시 테이밍은 해제되고 현규하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죽지 않고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거나 반지로 부른다면.

    하찮은 테이밍 능력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자신이 무력하게 구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현규하는 은징가와 마수들의 공격이 쏟아지든 말든 맹목적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에 중상을 당하거나 제 숨이 끊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은 부모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을지도 모르는 현규하.

    인유신은 힘겹게 얼굴을 감쌌다. 여기에서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못 찾겠다.

    차라리 그때 불길이 아니라 은징가의 창에 꿰여 죽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찍!”

    새된 울음소리가 정신을 날카롭게 관통했다. 퍼뜩 시선을 올리니 8세가 창문 쪽을 바라보며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무심코 그쪽을 본 인유신의 눈에 비친 건 무기를 들고 도열하는 전사들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영역에 입장했습니다.]

    [모든 능력이 20퍼센트 저하됩니다.]

    [모든 귀속 아티팩트와 일반 아티팩트의 효과가 20퍼센트 저하됩니다.]

    [고유 필드를 전개하지 못합니다.]

    [앙골라의 귀속 아티팩트 및 일반 아티팩트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포르투갈의 귀속 아티팩트 및 일반 아티팩트의 효과가 50퍼센트 저하됩니다.]

    게이트에 입장하자마자 디버프들이 끊임없이 메시지를 토해 냈지만 현규하는 보지 못했다. 스탯에 비례하는 능력치 저하가 걸린 탓에 평소보다 사지가 묵직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창날이 살을 후벼 파는 것도, 전투 코끼리의 울음소리로 인한 충격파가 전신을 휩쓰는 것도, 알지 못했다.

    “——!”

    제 입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유신. 유신. 인유신. 그 하나의 이름만이 그를 지배한다.

    히든 보스의 영역이 선포되며 ‘무닌의 눈’과의 연결도 끊어졌다. 아무리 좌표를 띄워도 보이지 않는다. 불안해질 때마다 ‘주인이 이곳에 있다.’라며 그를 안도하게 해 주었던 마음의 좌표가 텅 비었다.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시야가 뒤집히고, 찢어지고, 엉겨 붙는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다. 찾을 수 없다. 찾지 못한다.

    어째서 반지를 쓰지 않는 거지. 그걸 썼더라면 게이트 밖에서도 단번에 갈 수 있었는데. 반지를 쓸 수도 없을 만큼 의식이 없거나 부상을 당했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필요 없기 때문인가.

    〈오, 히든 특성이 뱀파이어라고 멋진데〉

    트로트를 흥얼거리는 지긋지긋한 콧노래가.

    〈나에게, 우리의 세계로 오려무나. 내 아들아.〉

    태어날 때부터 뇌리에 인으로 박혀 있던 나직한 음성이, 그 저주가.

    단단히 다지고 메워 동요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마음의 장벽이 흔들리자마자 그 틈을 비집고 나타난다.

    “아아아아아아!”

    목을 찢는 것은 비명인가. 절규인가.

    울부짖음의 끝에서 그는 애걸한다. 내가 필요 없더라도 좋으니, 쓸모없다 여겨도 좋으니, 귀찮아서 버리고 싶다고 해도 좋으니.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힘겨워하지 않기만을. 제발.

    네가 그곳에 있기만을.

    네가 없는 세계 같은 건 멸망해도 상관없어. 멸망하는 세계를 지탱하는 왕의 자식은, 그렇게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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