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214)
  • “저 미친놈을 어떻게 진정시킨 건가”

    “으음, 사랑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공태성은 심각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현규하와 어울려 다니더니 결국 같이 미쳤군.”

    “사랑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니 이혼이나 당하지.”

    “…….”

    비겁하게 팩트를 날려서 공태성을 한 방에 넝마로 만든 이혜연은 게이트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살폈다. 게이트가 처음 형성되었을 때와 바뀐 건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한낮의 태양이 완전히 저물고, 이슥한 밤이 찾아왔다는 정도.

    도심 한복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주변의 건물에서는 빛 한 점 비치지 않았다. 게이트 주변에 밝힌 불이 없었다면 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로 어두웠으리라. 인적이 없는 도심의 풍광은 일전에 휩쓸린 침식 게이트를 연상하게 했다.

    게이트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헌터들은 게이트 근처에서 조별로 나뉘어 대기 중이었다.

    던전 안에서 나타나는 히든 보스는 내부의 생명체가 전부 몰살되기 전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다만, 이례적인 재난이니 과연 통상적인 규칙이 적용될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 규칙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히든 보스가 인유신을 죽였을 시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젠장.’

    이혜연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 가설은 일단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통상의 지속 게이트처럼 진입할 수 있을지, 아니면 웨이브처럼 안에서 마수들이 밀려 나올지 명확히 단정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마나 파동의 분석에 따르면 전자일 확률이 높긴 했다. 대응 본부는 전자를 우선시한 포메이션을 갖추도록 했다.

    히든 보스가 나타난 게이트가 장시간 잠잠하다는 건 힘을 비축한다는 의미다. 헌터들의 낯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야, 콩.”

    물론 그렇지 않은 헌터들도 있었다.

    “또 뭐.”

    “이게 뭘까”

    최진혁은 보란 듯이 팩 속의 한약을 쪽쪽 빨아 먹는 중이었다.

    “맨드레이크를 달여서 만든 한약이야. 빌어먹을 전남편 때문에 고생이 많다면서 끝녀 씨가 특별히 보내 줬다. 넌 끝녀 씨한테 이런 거 받은 적 없지”

    “…….”

    “파파. 파파 옆에는 범이가 있으니까 기운 내. 파이팅!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이혼 서류로 회사에서 싸대기 맞을 수 있어!”

    “네놈이 제일 힘 빠지게 하니까 닥쳐!”

    주변 헌터들이 랭킹 2위의 사생활을 듣지 않는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했다.

    ‘공태성 길드장이 그냥 합의 이혼 한 게 아니었구나…….’

    ‘뭐지, 바람이라도 피웠나. 내가 재벌 3세와 결혼했다면 조신하게 내조하면서 마나님 떠받들고 살 텐데.’

    반면 나르샤 길드원들은 감추지도 않고 킥킥 웃어 댔다.

    “이 팀장.”

    멀리에서 그 모습을 보는 이혜연에게 양사 그룹 산하인 안팡 길드의 부길드장, 허정현이 다가왔다. 한국의 S급 헌터 중 한 명이다.

    “아, 정현 언니.”

    “나르샤는 언제 봐도 사이가 참 돈독하단 말이야.”

    “괜히 범이가 파파라고 부르는 게 아니잖아. 망해 가던 길드를 태성이가 멱살 잡고 캐리해서 대형 길드로 살려 냈으니.”

    “태성이가 내 공대에서 처음으로 던전 공략을 할 때 새파랗게 질려서 손 떨다가 내 머리에 불을 질렀던 기억이 생생한데 참 많이 컸어.”

    “흑역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 알면 이번엔 언니 집에 불 지르러 올걸.”

    “시원하게 태우고 이참에 건물 새로 올리면 되지.”

    농담을 몇 마디 시시덕거린 허정현이 용건을 꺼냈다.

    “규하는 계속 안 보이던데”

    “저기.”

    허공에 팔을 쭉 뻗은 이혜연의 손끝을 따라 허정현이 시선을 움직였다. 강남센터 건물의 크기만큼 뒤틀린 공간, 즉 게이트로 통칭하게 된 곳의 위쪽이었다. 현규하는 상공에 뜬 채 하염없이 게이트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내 저 상태야.”

    허정현이 혀를 찼다.

    “저래서 회의에도 참석 못 한 거였나”

    “겨우 진정시켜 놨는데 회의까지 끌고 올 엄두를 못 내겠더라고. 회의에서 나왔던 얘기를 전하긴 했지만 듣기나 했는지도 모르겠어. 주의 깊게 들을 내용이 없긴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의에서 썩 영양가 있는 정보가 오가진 않았다.

    〈저희가 공략했을 때는 말이 통하기는커녕 이성이 아예 없었습니다. 형체도 사람이라기보다는 짙은 피 안개 안에 조각조각 난 시체들을 꿰어 붙인 듯한 본체가 숨어 있었고요. 사람을 말 그대로 맷돌처럼 갈아 버리더군요. 정석적인 차륜전으로 사냥했습니다.〉

    히든 보스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를 토벌한 건 대형 길드가 아니라 지방 군소 길드들의 연합이었다. 길드장들은 기꺼이 협력 의사를 전하며 공격 패턴까지 상세하게 알려 주었으나 히든 보스가 바뀌었으니 어디까지 통할지는 의문이다.

    비슷한 배경의 던전이어도 보스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하물며 등장 확률이 현저히 낮은 히든 보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은징가와 관련된 던전 몇몇이 국제기구인 게이트안보협력기구에 등재되어 있어서 그곳의 자료를 분석해 보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모습으로 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 자료들이 의미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확실한 건 게이트 안의 왜곡된 세상이 어지간한 도시와 비슷한 크기의 초대형 던전이라는 것.

    “히든 보스의 정보는 귀하니까 유출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니 별수 없지. 우리나라도 공식 등재한 것보다 비공식으로 숨긴 게 더 많을걸 그나저나 인질로 잡혔다는 사람이 규하 남친이라고 저 녀석이 게이였다는 건 둘째 쳐도 사람과 연애라는 걸 할 수 있었다는 건가”

    “언니는 어디 오지에 처박혀 있던 것도 아니면서 소식 못 들었어”

    “인간 불신에 걸린 애니까 좀 사귀다가 금방 헤어질 줄 알았지. 저만큼 진지한 줄 몰랐어. 어느 정돈데”

    이혜연은 고민하다가 한마디로 요약했다.

    “규하가 남친 눈치를 봐.”

    “오…….”

    허정현은 감탄했다. 저 녀석이 타인을 배려하는 날도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군. 그러려면 우선 게이트를 공략해서 무사히 구해야 할 텐데…….”

    “S급이 셋이나 되는데 설마 게이트 하나 공략 못 할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언니까지 참가할 줄은 몰랐어. 국장님도 안팡에 동원 요청하면서 언니까지 호출되리라고 기대한 건 아닌 거 같던데. 같은 급인 규하나 태성이야 관련자니까 그렇다 쳐도.”

    “헌터이자 국민으로서 당연히 위기 상황 앞에서 나라를 위해 이바지해야 하지 않겠냐.”

    “그 말 언니 스스로도 안 믿지”

    흐흐 웃으며 허정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독일 출장 중인 부회장님 요청이야. 남친이 납치돼서 애가 멘탈이 나갔다는 보고를 듣고는 최대한 도와 달라고 부탁하시더라고. 뭐, 겸사겸사 우리 길드나 양사도 좋은 이미지 쌓는 거지. 안 그래도 검찰에서 회장님 소환할지도 모른다는 카더라가 여의도에서 솔솔 돌고 있는 상황이라.”

    “부회장님이면 그럴 것도 같네.”

    이혜연은 수긍하며 끄덕거렸다. 십수 년 전부터 양사의 부회장 민끝녀가 안팡 길드원도 아닌 현규하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스폰서라는 건 유명했으니. 오죽했으면 현규하가 민끝녀의 이부동생이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 정도다.

    치직. 분석팀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 이 팀장님! 곧 게이트가 열릴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진입해야 하는 형태로 보입니다.

    “당장 드론을 띄워서 안을 관측하세요.”

    결정석을 동력원으로 하는 던전 관측용 드론은 게이트를 통과해도 전파가 연결된다. 던전 전체가 히든 보스의 영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큰 만큼 섣불리 진입하는 건 위험했다. 이능부에도 몇 대 없는 고가인지라 자주 쓰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같은 위급 상황이 아니면 언제 쓰겠는가.

    다행히 몬스터 웨이브처럼 게이트 밖으로 쏟아지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신중하게 공략할 작정이었다.

    “이제 곧 게이트가 열립니다. 내부 관측 후에 진입할 테니 준비하고 대기하십시오.”

    이혜연의 한마디에 좌중에는 다시금 긴장감이 차올랐다. 이어 불투명하게 일그러진 풍경이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한차례 조각조각 나서 비산했을 때.

    “야! 현규하!”

    대기하고 있던 드론보다 빠르게 현규하가 뛰어들었다.

    “배 안 고파”

    “꾸이.”

    8세가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었다. 지난번 던전에서는 나뭇잎까지 맛있게 갉아 먹더니 여기에서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실체가 아닌 허상이기 때문이리라.

    ‘8세도 배고플 텐데 어쩌지.’

    시계를 보니 벌써 늦은 저녁이었다. 원래 일정대로였다면 현규하와 저녁을 먹고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현재 상태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