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214)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히든 보스로 인해 게이트가 형성된 직후.

“큭!”

고유 필드가 무너진 데다가 히든 보스의 영역에서 튕겨 나오면서 체내가 진탕 쳤다. 공태성은 엉망진창으로 들끓는 마나를 통제하며 붉은 피를 한 모금 토했다. 그 정도만 해도 아주 양호한 상태였다.

장범도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났으며, 한준수처럼 등급이 낮은 각성자 중에는 아예 기절한 이들도 있었다. 마나가 없는 일반인들이 오히려 내상이 없었다. 튕겨 나오며 쓰러지기만 했을 뿐 부상이 없었던 일반인들이 헌터들을 부축하는 드문 일이 벌어졌다.

재난이 발생한 건 프리미엄관인데 강남센터 전체의 공간이 뒤틀렸다. 마나의 흐름으로 볼 때, 명시적인 입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대신 뒤틀린 공간 전부가 히든 보스의 영역으로 통하는 문인 듯했다. 이 재난이 전해진다면 새로운 게이트의 패턴으로 등록될 터였다.

히든 보스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도망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현장은 벌써 경찰과 게이트관리국의 공무원들이 통제하는 중이었다. 앰뷸런스도 곧 도착하여 중상자들을 이송했다.

“망할. 존나 어지러워.”

피를 왈칵 토한 장범이 손등으로 입술을 대충 문지르고는 흐느적거리며 공태성의 어깨에 기댔다.

“긴장 풀지 마라.”

“밖으로 튕겨 낸 거 보면 당장은 안전할 거 같은데. 저거 공략한 길드 어디야 뒤처리를 저렇게밖에 못 해”

장범의 불만을 흘려들으며 공태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히든 보스가 재생성되기 전에 고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었다.

〈죽은 왕의 혈계야!〉

죽은 왕이라면, 주춧돌 아래에 묻혔다는 쌍둥이 중 누이. 굳이 혈연관계를 따진다면 현규하의 고모였던가.

공태성도 분명히 보았다. 재생되는 환영의 마지막에, 신의 자취에서 비롯된 신앙이 기록되는 것을.

‘그렇다면 혈계가 히든 보스를 재생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평행 세계의 히든 보스를 ®ÀÇ의 세계선으로 덧씌울 수 있다는 건데. 현규하는 그래서 어디에 있…….’

쿠아앙!

눈으로 그를 찾기 전에, 귀가 먼저 파악했다. 버스 한 대가 하늘을 날아올라 뒤틀린 공간에 거세게 부딪혔다. 당연히 버스는 뒤틀림을 뚫지 못했다. 한데도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처럼 다시금 부딪쳐 온다.

쾅! 콰앙! 쾅!

“미친.”

장범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12톤의 쇳덩이가 뒤틀린 공간에 부딪힌 충격으로 공기가 웅웅 진동했다. 얼마나 세게 들이받았는지, 버스는 캔을 압축한 것처럼 세로로 납작하게 우그러졌다.

쿠웅!

쓸모없어진 버스, 였던 쇳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무게를 버티지 못한 바닥의 아스팔트가 쩌적 갈라지며 깨졌다.

이어 자동차가 허공을 날았다. 콰아앙! 버스보다 중량이 가벼운 자동차는 몇 번 만에 찌그러졌다. 이어 다른 자동차. 트럭. 자동차. 자동차.

“미친놈. 뭐 하는 거야”

“지금은 그냥 놔둬.”

이변이 발생하면서 도로에 급히 정차하여 사람들은 전부 대피한 빈 차들이다. 밖에서 물리적으로 아무리 충격을 줘 봤자 뚫지 못한다는 걸 현규하도 모르는 건 아니리라.

눈앞에서 인유신을 빼앗겼으니 속이 말이 아닐 터. 이렇게라도 분이 풀린다면 히든 보스의 공략은 비교적 냉정하게 임할 수 있겠지. 사람이 다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판단하고 주의를 돌렸으나, 오산이었다.

“어, 어어”

막 부상자를 카트에 눕히던 구급대원이 당황했다. 앰뷸런스가 기우뚱 허공에 떴다.

“뛰어내려! 빨리!”

운전석에 있던 대원이 급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가 차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1미터 이상 뜬 채였다. 뛰어내리기도 전에 앰뷸런스가 빠르게 날아갔다. 콰앙! 쾅!

차 문이 열렸던 탓에 날아가는 앰뷸런스에서 대원이 굴러떨어졌으나 다행히 큰 부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떨어지지 못했다면 저 찌그러진 앰뷸런스의 안에서 피 곤죽으로 변했을 터다.

그제야 공태성은 깨달았다.

현규하는 분을 해소하려고 뒤틀린 공간을 타격하는 게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뚫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할 이성조차 상실한 것이다. 날달걀을 던져 바위를 깨트리려는 시도와 다름없는 행위를 진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에 사람이 있든 없든, 죽든 말든 상관없이.

“저 새끼 당장 막아!”

도구가 부족해지자 현규하는 닥치는 대로 들어 올렸다. 대원들이 다급히 환자를 밖으로 빼낸 앰뷸런스. 전신주. 창고. 커다란 장식물. 가로수. 도구가 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도구가 전부 소진되면, 그다음은 인간이 될 것이다.

쿵! 쿠앙! 쾅!

현규하의 손끝이 무모한 파괴를 연주했다. 앰뷸런스와 장식물이 찌그러지고 전신주와 가로수가 부러졌다. 박살 난 창고에서 아이템과 기물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발밑에서부터 피어오른 하얀 불길이 자글자글 구두와 바짓단을 태우며 기어 올라와도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피할 거라 예상했었던 공태성이 당황하여 불을 거두었다. 장범이 쏜 두 대의 화살도 고스란히 어깨에 박혔다.

“파파, 지금이라면 쟤 모가지 따고 랭킹 1위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네놈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나 화살을 머리로 쏘아 봐라.”

“그러다 원 샷 원 킬 내면 내가 랭킹 1위인 거지”

장범이 시시덕거리면서도 2미터가 넘는 장궁, 간디바(인도 신화에 나오는 무기.)의 시위를 당겼다. 투명한 울림이 번지고, 화살이 저절로 시위에 메겨졌다. 공태성이 화살촉에 불길을 얹자마자 장범은 활을 쏘았다.

날카로운 바람과 불길을 동반한 화살이 현규하의 뒤통수로 쇄도했다. 저에게 오는 공격까지 도외시하며 뒤틀린 공간을 깨트리려던 현규하였으나,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까지 방기하지는 못했다.

날아오던 화살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거꾸로 뒤집혀서 역행했다. 카앙! 쏜살같이 되돌아오던 화살과 공태성의 칼날이 부딪히며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칼자루를 쥔 손이 저릿저릿했다.

“방해하지 마!”

현규하가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시뻘건 빛으로 물든 눈동자는 마치 피가 고인 듯했다. 뒤틀린 공간을 두드리던 그의 도구들이 일제히 공태성을 향했다.

“아예 뇌가 고장 난 줄 알았더니, 말을 할 정신머리는 남아 있었나 보군!”

모든 것을 살라 먹는 하얀 불길이 장벽처럼 공태성의 앞에 두껍게 솟아났다. 냉정한 판단력을 상실했다지만 현규하는 현규하다. 정말 죽일 작정으로 싸워야 저 미친놈을 막을 수 있다.

불의 장벽을 앞으로 밀어내며 공태성이 도약하려던 찰나.

“……!”

현규하의 무릎이 휘청하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허미.”

열 대의 화살을 동시에 간디바에 메겨 쏠 준비를 하던 장범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저편에서 가드 복장의 헌터 하나가 덜덜 떨리는 양팔을 현규하 방향으로 뻗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금 뭘 한 거지”

“저, 저는 정신을 어지럽히는 능력으로 C급 각성을 했습니다. 공 길드장님! 주로 기절시키는 데 쓰고 있고요. 당연히 현 헌터님에게는 안 통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약간 어지럽게 만들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에 써 봤는데 바로 먹혀서…….”

능력을 쓴 장본인이 제일 믿기지 않는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었다. 공태성은 한숨을 쉬며 불을 거두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S급 헌터의 정신 방벽이 겨우 C급 헌터의 공격에 뚫릴 리가 없다.

장범이 혀를 내둘렀다.

“쟤 지금 얼마나 맛이 간 상태인 거야”

“무사히 히든 보스 사냥을 하려면 현규하는 계속 기절해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공태성은 씁쓰레하게 중얼거리며 기절한 현규하를 어깨에 둘러멨다.

“잡혀간 유신이는 어쩐다”

“……지금은 방법이 없으니.”

인유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히든 보스가 게이트를 열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만이 빠져나오지 못한 공간의 뒤틀림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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