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의 펜션은 아주 즐거운 곳이었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을 아쉬워하자 엄마는 ‘다음에 또 놀러 오면 되지.’라고 말해 주었다.
다음. 다음. 다음에.
유신은 몇 번이나 그 단어를 입 속으로 뇌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다음이 또 있다는 게 정말 기뻤다.
집에 혼자 두고 올 수가 없어서 2세의 케이지도 들고 왔다. 주인과 하는 여행을 2세는 안정감 있게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일이 바빠서 2일째 저녁에 합류하기로 했다.
첫날에는 매운탕도 끓여 먹고 계곡에서 신나게 놀았다. 페트병으로 손가락보다 작은 물고기를 잡으며 신기해하자 아빠는 다음에 낚시터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다음이 또 생겼다.
둘째 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숲길을 탐험하고 수영을 배웠다. 아빠의 손을 잡고 물장구를 치는 게 전부였지만 재미있었다. 물에서 놀고 난 뒤에 먹은 작은 컵라면도 맛있었다. 엄마와 아빠와 함께하는 모든 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장모님은 몇 시에 오신대〉
〈차가 밀려서 좀 늦으시나 봐. 먼저 저녁 먹으라고 하시던데〉
〈저녁은 뭐 먹어〉
〈우리 유신이는 뭐 먹고 싶어〉
〈고기.〉
수줍게 말하자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냈다.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저녁 식사는 펜션에서 조금 떨어진 바비큐장에서 먹기로 했다.
불판에 마수의 고기를 척척 올리는 아빠를 바라보다가 유신은 무릎을 꼬았다.
〈쉬 마려워.〉
〈화장실 같이 갈까〉
〈혼자 갈 수 있는데.〉
뭐든지 혼자 하고 싶은 나이인 유신은 짐짓 어깨를 폈지만 부모님의 눈에는 귀여워 보이기만 했나 보다. 엄마가 웃으면서 고기 집게를 가져갔다.
〈내가 굽고 있을 테니까 자기가 유신이 데리고 갔다 와.〉
혼자 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과 하는 건 더 좋다. 유신은 아빠의 손을 잡고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씩씩하게 부르면서 펜션으로 걸어갔다. 유신 또래의 딸과 바비큐장으로 가던 어느 손님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노래 엄청 잘 부르는구나. 아드님이 아빠랑 쏙 닮았네요.〉
〈아빠, 나 아빠랑 닮았어〉
〈우리 유신이가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닮았지.〉
아빠는 비행기를 높이 높이 태워 주었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절로 까르륵 터져 나왔다.
〈이건 유신이가 조금 더 크면 말해 주려고 했던 건데, 아빠랑 우리 아들이 닮은 게 또 있어.〉
〈뭐야〉
〈아빠도 한 번 입양되었다가 보육원으로 돌아간 적이 있거든. 그때 엄청나게 비뚤어져서 나쁜 사람이 될 뻔했는데 경찰 아저씨한테 호되게 혼나고 정신을 차렸어. 형사 아저씨 알지〉
〈응.〉
유신은 종종 부모님과 같이 만나서 식사했던 아저씨를 떠올렸다. 고아인 아빠의 형이나 다름없는 아저씨라고 했었다.
〈형사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아빠는 지금도 나쁜 사람이었을지 몰라.〉
〈그럼 엄마랑 결혼 못 했겠네〉
〈엄마한테 잘못 걸려서 두들겨 맞는 거로 만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아빠는 짓궂게 흐흐 웃고는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래서, 유신아. 아빠는 아빠처럼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온 아이와 만나서 형사 아저씨처럼 말해 주고 싶었어. 보육원으로 돌아온 건 유신이 잘못이 절대 아니라고.〉
말로 하고 나니 쑥스러운 듯 아빠는 코밑을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다시 한번 유신을 번쩍 들어 올린 아빠는 그대로 비행기처럼 숙소의 화장실까지 데려다주었다.
물에 젖은 듯이 아스라이 번지는 옛 기억의 끝자락에서 인유신은 외쳤다. 도망가라고. 지금 당장 엄마와 함께 펜션에서 도망치라고.
그렇지만 옛 기억이 자아내는 꿈은 속절없이 이어졌다. 펜션과 이어진 숲속의 작은 동굴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고, 마수들이 쏟아질 때까지. 유신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한순간에 창밖이 붉은 화염으로 물든 뒤였다.
살려 달라면서 오히려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보스 몬스터의 우짖음이. 보스 몬스터를 장작 삼아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화염이. 여자의 옷자락처럼 길게 늘어뜨린 옷을 입은 검은 피부의 젊은 사내들의 군집이.
……아.
인유신은 송곳처럼 뇌를 찌르는 기시감에 헐떡이며 의식을 회복했다.
“찍!”
눈을 뜨자마자 그를 맞은 건 8세였다. 몹시도 걱정하고 있었는지 가슴팍 위에서 안절부절못하던 8세는 인유신이 눈을 뜨자 온몸을 던져 부볐다.
“넌 괜찮아 안 다쳤어”
“뻬엥!”
울음소리도 씩씩했다. 변함없는 녀석의 존재만으로도 안정이 되는 듯하여, 인유신은 깊은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눌렀다.
‘옛날에 있었던 그 사고의 보스 몬스터가……. 설마 같은 배경이었나 그때 기억은 확실하지 않아서 짐작도 못 했어.’
그게 아니라면 똑같이 화염을 발하는 보스 몬스터라는 강렬한 경험을 겪은 탓에 기억이 왜곡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유신은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건 나무판자를 올린 지붕이었다. 어디일까.
‘아까 분명히 히든 보스의 화염에 휩쓸렸는데…….’
거기까지 떠올렸을 무렵, 굵게 울리는 한마디 음성이 그를 돌려세웠다.
“깨어났는가”
다른 사람이 있었다. 인유신은 기겁해서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도끼를 무릎에 올린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거기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 어어…….”
히든 보스이니 도망을 쳐야 하나 도망친다고 해서 달아날 수나 있나 임금님이니까 큰절이라도 해야 하나 아프리카는 임금님에게 인사하는 예절이 좀 다른가 바닥에 납작 꿇어야 하는 건 태국이었던가 온갖 상념들이 삽시간에 불어나 머릿속을 혼탁하게 어지럽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가볍게 고갯짓했다.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
필요한 살생은 서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하긴 죽일 작정이었다면 자신은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을 터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리가 저릴 텐데.”
“괘, 괜찮습니다.”
아무튼 임금님인 데다가 살아 있는 인간도 아니다. 긴장감으로 심장이 오그라들 지경인지라 차마 편하게 대충 앉을 수가 없었다.
“저어, 여기는…….”
“나의 영역 안이다. 숨 쉬는 생명체라고는 너 하나뿐이지.”
“설마 다른 사람들은 전부……”
급히 손목을 보았다. 문신은 건재했다. 박쥐 하나와 햄스터 둘.
“널 붙잡아 오는 대신 다른 인간들은 전부 보내 주었다.”
“다행이네요.”
현규하도 무사하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고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하나를 대가로 하여 그들이 살아났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심인 듯하니 별나군. 보통은 이런 상황에 처하면 두려워하거나 억울해할 텐데 말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의문이긴 해요. 그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별거 아닌 저 하나의 목숨이 등가라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검은색 눈동자로 그를 보던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대답했다.
“내 영역에 대적하는 자들 중 가장 큰 힘을 지닌 자의 약점이 너라는 게 명백했기에 받아 왔을 뿐이다. 역시나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지더군.”
“…….”
쓰라린 아픔이 심장 안쪽을 긁어내렸다. 끝내 그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자신과 강제로 떨어지게 된 그는 괜찮을까. 인유신은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게 애쓰며 무릎에 올린 양손을 세게 주먹 쥐었다.
“그자에게서도 나와 비슷한 운명이 보이긴 했다만.”
“무슨 말씀이세요”
“왕의 자식이 아니냐”
“예”
쉽게 이해되지 않아 눈썹만 깜빡거리자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오히려 의아해했다.
“말 그대로 부모 중 하나나 부모 양쪽이 왕이라는 뜻이다. 모르고 있던 것이냐 그자가 지니고 있던 왕의 혈계가 나를 다시 현계에 구성했는데도”
“아, 그게……. 예전에 아버지가 왕이라는 농담을 듣긴 했었는데…….”
“인간의 자식인 나와는 달리 그자의 부모는 진정 신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세계의 왕인 것 같다만. 나도 죽었으니 이제 와서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겠지.”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은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영역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다.”
“찍.”
혼자 남게 되자 8세가 작은 소리로 울며 손바닥에 파고들어 왔다. 8세를 쓰다듬으며 요동치는 마음을 찬찬히 가라앉혔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혼란스러웠으나 그가 누구의 자식이든 당장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유신은 눈앞에 상태창을 띄우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