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와 굽슬굽슬한 머리칼을 드러낸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은 엎드린 시녀의 등에 앉아 있었다. 오연한 시선이 불길과 마수로 인해 아비규환으로 변한 경매장 안을 주시했다.
“유신 씨.”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여 멍하니 보던 인유신을 현규하가 잡아끌었다. 불에 덴 것처럼 흠칫하여 고개를 든 인유신의 시선이 그의 손에 있는 펜던트로 향했다. 펜던트의 액체는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그거……. 어떻게 된 거예요”
“알림창이 떴어요”
“네……. 규하 씨가 가진 무슨 혈계가 히든 보스의 결정석을 주시했다고…….”
현규하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당신에게는 숨길 수가 없겠네요. 본래 ®ÀÇ와 관계없는 결정석이었는데, 이 펜던트에 깃든 힘이 세계선을 옮기게 했고 그 탓에 히든 보스가 재생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팔을 뻗은 현규하가 날아오는 불티를 튕겨 냈다.
“이런 현상을 보는 건 나도 처음이에요. 저 히든 보스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유신 씨 절대 안 데려왔습니다. 일단 나가죠.”
“사냥하지 않고 그냥 나가시게요”
히든 보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은 가만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고, 경매장 안에서 고통스레 포효하는 건 마수 하나뿐이었다.
고작 마수 한 마리지만 던전의 보스 몬스터다. 화염을 일으키는 능력 때문에 장내는 더욱 혼잡해졌다. 밀폐된 공간에 일반인이 많아서 헌터들의 공격도 여의치 않았다.
살이 타들어 가는 역한 노린내가 연기에 뒤섞여 호흡이 답답해지고, 홧홧한 열기가 피부를 달구었다. 이윽고 화염 속에서도 마수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문으로 허겁지겁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넘어져서 깔린 사람들의 비명. 화마에 먹힌 사람들의 비명. 이제 거기에 마수에 공격당한 사람들의 비명이 더해졌다. 인유신은 피부가 희게 질릴 만큼 양손을 세게 깍지 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앗아 간 불길로 시야가 어지럽다.
“공태성이나 다른 상위 헌터들도 여럿 있으니까 내가 없어도 어렵잖게 제압될 거예요.”
다른 때였다면 현규하는 인유신을 동행하고서 여유 있게 주변을 정리했을 것이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는 어딘가 굉장히 초조한 눈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이…….”
“유신 씨, 부탁입니다.”
간절한 그의 눈빛 앞에서, 차마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 경매장, 아니 그가 인지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보다 자신 하나가 더 중요하다 강변하는 눈빛 앞에서 무슨 말을 할까.
현규하가 잠자코 고개를 숙인 인유신을 한 팔로 안고, 번져 오는 화염을 역장으로 짓뭉개며 빠져나오려던 때였다.
[각성자 공태성이 귀속 아티팩트 ‘동쪽에서 피어나는 접시꽃’을 일부 해방합니다.]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웅웅 울리는 칼날이 화형당하는 남첩들이 군집한 형태인 마수를 양단하고, 하얀 불길이 몸체를 살라 먹었다.
“끼아아아아!”
그러고도 완전히 죽지 않아 단말마의 비명이 경매장의 천장으로 치솟았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엎드린 시녀의 등에서 일어났다. 뻗은 손 안으로 기다란 창이 형성되고, 그녀가 창대를 바닥에 세게 꽂은 순간.
[히든 보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고유 영역을 선포합니다.]
주변이 일변했다.
직전까지 불길이 타오르던 경매장의 바닥은 너른 초원으로, 마수의 단말마가 후려치던 그을린 천장은 지평선과 맞닿은 광활한 푸른 하늘로, 건물을 지탱하던 골조는 흙으로 지은 전통 가옥으로 변했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입을 열었다.
“나의 땅이며, 나의 백성이다. 나는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이 기억하고 경배하는 왕이니라.”
죽어 가던 마수가 소생했다. 경매장을 나가는 출구가 사라졌다. 절망한 사람들의 비명이 비산했다.
“젠장!”
현규하가 욕설을 씹으며 왼손의 반장갑을 이로 물어 벗었다. 부러진 십자가 문신이 휘황한 빛을 발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전체 해방합니다. 고유 필드가 전개됩니다.]
쿠구궁!
세상에서 가장 위력적이며 가장 거대한 포탄에도 쉬이 허물어지지 않은, 황제들이 천 년에 걸쳐 쌓은 성벽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높이 솟아났다.
뻗어 나가는 성벽이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고유 영역을 으깨듯이 짓뭉갰다. 두 영역이 팽팽하게 부딪힐 때마다 천지가 뒤흔들리고 마나가 폭풍처럼 날카롭게 몰아치며 우짖었다.
현규하가 두 번째 귀속 아티팩트도 마저 해방하려던 찰나, 공태성도 고유 필드를 전개했다. 접시꽃 문양의 깃발을 높이 든 병사들의 함성과 함께 피비린내를 자욱하게 풍기는 전쟁터가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영역에 거세게 부딪혔다.
이 자리에 귀속 아티팩트를 지닌 헌터가 그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히든 보스의 고유 영역을 깨트릴 엄두를 내지 못하던 다른 헌터들의 필드가 그들을 따라 하나둘씩 펼쳐졌다.
잿더미가 된 숲 위로 아수라가 지어 바친 황금의 궁전이 찬란하게 빛났다. 하룻밤에 완성된 혁명가를 부르며 병사들이 행진했다. 성화(聖火)를 지키는 왕녀와 사랑에 빠진 노예의 이야기가 하시시처럼 달콤하게 감돌았다. 외딴섬에 홀로 남은 어린 해녀가 구슬피 울었다.
영역과 영역이, 세상과 세상이 부딪혔다.
인유신은 아찔한 현기증 속에 눈을 감았다. 부딪히고, 깨지고, 으깨지며, 비산하고, 뒤섞인 세계들의 균형이 기울었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영역이 가장자리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거세게 우짖었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긴 창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창날의 끝이 전방을 향했다. 불현듯 심장을 쓸고 가는 듯한 열기를 느낀 인유신은 눈을 떴다. 투명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것 같다는 감각이 날카롭게 스친 순간.
“유신 씨!”
창날에서 뻗어 나온 화염이 영역과 영역을 격하여 그를 휘감았다. 눈앞에서 인유신을 빼앗긴 현규하의 평정은 완전히 붕괴했다. 천 년의 성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영역을 반 이상 받아치던 그의 필드가 흩어지자, 다른 헌터들의 필드들도 속절없이 깨졌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창대를 다시금 바닥에 내리꽂았다.
“나머지는 보내 주마. 나의 땅에서 모두 물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