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쓸 만한 무구가 영 안 나오는구만.”
장범이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며 투덜거리는 사이에 경매는 재개되었다. 이번 경매의 메인인 히든 보스의 결정석은 가장 마지막에 나올 테니 관심 없이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공태성에게 한준수가 속삭였다.
“길드장님, 아니 태성이 형. 아니죠”
“뭐가.”
“유신 씨요. 남자한테 관심 가지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해도……. 걔는 너무 어리잖아요. 형 나이가 몇 갠데.”
걱정스레 주절거리던 한준수는 사나운 시선을 느끼고는 찔끔했다. 이 자리가 경매장이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혀서 10미터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너까지 그 좆같은 소문을 나불거리는 건가”
“크흠, 흠. 아니, 뭐……. 형이 잘 모르는 사람한테 신경 써 주는 거 처음이잖아요. 진혁이 형이 유신 씨를 은근히 챙겨 주는 건 동생 생각나서 그렇다고 쳐도, 형한테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 하긴 애가 좀 맹한데 하필이면 사귀는 게 시한폭탄이니까 내버려 두기 힘든 느낌이긴 하죠. 없는 동생도 유신 씨를 보면 갑자기 생겨나는 기분이라고 할까.”
혼자 알아서 중얼거리고 알아서 납득한 한준수를 무시하는데, 무시하기 힘든 얘기가 들려왔다.
“형이 유신 씨 조사한 걸 끝녀 누나도 은근 마음에 걸려 하…… 헙.”
말실수를 깨달은 한준수는 입을 꽉 다물었지만,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던 장범이 건수를 놓치지 않았다. 직장 상사와 엑스 와이프는 언제나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아닌가.
“오, 뭐야. 부회장님이 설마 우리 파파가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해하는 거야 넌 촉새같이 꼰지르던 거고”
“지나가다가 나온 말이었어요. 지나가다가. 일부러 누나한테 일러바친 건 아닙니다.”
공태성은 허둥지둥 변명하는 한준수에게 손을 내저으며 남은 칵테일을 홀짝거렸다.
“뭐, 됐어. 끝녀한테 전하는 거라면.”
민끝녀에게 들어가는 제 소식이 현규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걸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대답이었다.
“끝녀를 소개한 게 너라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우리가 재결합할 일은 없으니까 꿈 깨라.”
“넵…….”
고유 능력이 무기 연마가 아니라 수다가 아닌가 의심될 만큼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한준수지만, 개중에서 가끔 건져 낼 만한 건 있었다.
‘없던 동생도 생겨난 느낌이라고.’
굳이 정의하자면 꽤 비슷한 감정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다른가. 그는 인유신을 처음부터 현규하 대신 쓸 수 있는 심장의 대용품으로 보았으니.
막상 보고 겪은 인유신은 어쩌다 현규하의 마수에 걸렸는지 안쓰러울 만큼 순한 반면 은근히 다부진 면도 있어서, 여차하면 심장을 뽑을 작정으로 접근했던 그를 씁쓸하게 했다. 이를 일종의 죄책감이라고도 칭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공태성은 인유신이 하나의 방법이 된다면, 망설임 없이 심장을 뽑아 사용할 것이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하며 절박한 염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공태성은 나른한 한숨을 뱉어 내며 휴대폰을 열면 언제나 바로 보이는 외동딸의 사진을 어루만졌다.
지루한 경매가 이어지고, 마침내 가장 마지막 경매품이 등장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희가 참 어렵게 확보한 물품이라 마이크를 잡고 아주 길게 썰을 풀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아주 호된 컴플레인이 올라올 것 같네요, 하하. 많은 설명은 필요 없겠죠 지난달에 획득한, 안동 인근 던전의 히든 보스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의 결정석입니다!”
극적인 외침과 함께 케이스를 덮고 있던 공단이 걷히며, 양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울 크기의 결정석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휘황한 광채에 놀라워하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장범도 한준수도 눈을 떼지 못하는 가운데, 공태성은 미간을 좁히며 주시했다. 저 결정석이 과연 현규하의 심장과 더불어 필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가.
그때.
“뭐, 뭐야! 저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경매장 안을 울렸다.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각성자들은 더욱 경악했다. 평온하게 고여 있던 마나가 폭풍처럼 쇄도했다. 환영이 뭉클거리며 일어나고, 결정석에서 핏빛의 운무가 뿜어져 나왔다.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 나왔다고요”
선물로 줄 아티팩트 외에는 정말 아무것에도 관심을 안 가졌었나 보다. 시장에 풀리는 일이 극히 드문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라는 말에 현규하도 그제야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
“규하 씨가 찾고 있는 결정석일 확률이 있을까요”
“으음……. 없다고는 말 못 하겠죠. 하지만 던전의 환영을 내가 본 게 아니니까 확신은 할 수가 없네요.”
첫 던전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ÀÇ는 신이 인간의 삶을 굽어보는 세계일 터였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환영을 확인해야 했다. 결정석만 덜렁 있는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고, 주인님과 있으면 운이 좋기도 하니 응찰은 해 볼까요.”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라니 어떤 히든 보스였을까요 엄청 잔인해 보이는 이명인데.”
“후대에 덧씌워진 이미지가 구현되기도 하니까요. 콜럼버스가 위대한 모험가이자 탐험가인 보스로 등장하는 던전도 있거든요. 뭐, 왜곡된 이미지보다는 본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더 잡기 어렵긴 하죠.”
거기서도 콜럼버스의 다리가 여섯 개였을지 궁금해졌다.
억대가 껌값처럼 거론되는 경매 분위기 때문에 금전 감각은 갈수록 박살 나고 있었지만, 신기한 아티팩트들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눈동자까지 빛내면서 몰두한 그를 보던 현규하가 피식 웃었다.
“다음번에는 시간 되면 박승기 씨도 데리고 같이 와요.”
“진짜요 승기도 엄청 좋아할 거예요!”
“유신 씨도 대학에 진학했으면 게이트학 전공을 했을 거 같네요.”
“아마도요. 규하 씨 옆에서 듣다 보니 재미있거든요.”
잠깐 생각한 인유신은 말을 덧붙였다.
“근데 막상 사정이 됐으면 연구 쪽보다는 취직 잘 되는 과로 갔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뭐든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현규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졌을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매사의 목소리에 흥분한 기색이 겹치며, 마지막 경매품인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의 결정석이 경매대에 올라왔다. 느슨하게 이완되어 있던 현규하의 기세가 날카로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소유한 ‘스토야의 혈계(血界)’가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를 주시합니다.]
……이게 뭐지
당혹감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결정석에서 핏빛의 운무가 짙게 일렁이며 환영이 꿈틀거렸다.
남동생과 어린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 왕이 아닌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화형당하는 후궁의 여장한 남첩들. 적의 머리를 자르고 피를 받아 마시는 왕. 인육으로 연회를 연 왕. 살육하고 식인하며 가학적인 흥분에 날뛰는 잔학무도한 왕.
“이건 던전의 환영이잖아!”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혼란을 가중했다. 장내의 공기가 요동치고, 결정석 주변으로 마나가 응집했다. 인유신도 알 수 있었다. 히든 보스의 생성이다.
“씨발, 막아!”
헌터들이 결정석에 공격을 퍼부었지만 소용없었다. 예리한 칼날은 헛되이 튕겨 나갔고, 몰아치는 원소계의 공격은 오히려 마나의 파동에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결정석도, 마나도 세상의 섭리이자 이치인 것처럼 심대하게 존재할 따름이었다.
던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상식을 무참히 박살 내는 사태에 경악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규하도 무섭게 경직된 얼굴로 아공간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 안에서 울렁울렁하는 핏빛의 액체가 마치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한곳으로 쏠렸다. 인유신은 무심코 손을 꽉 쥐었다. 직선거리에,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 있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소유한 ‘스토야의 혈계’가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를 관측합니다.]
환영이 변했다.
부왕의 총애를 받던 왕녀는 천한 노예가 낳은 딸이라는 이유로 왕좌를 남동생에게 빼앗겼다. 무능한 암군인 남동생은 누나가 갓 낳은 아들을 죽이고 강제로 불임 수술을 했다. 여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그녀는 사방이 적이었다.
적과 내통한 남첩들을 화형에 처했다. 적을 잔혹하게 죽여 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냈다. 왕의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감히 왕국을 넘보지 못한 하얀 피부의 인간들은 왕이 지독한 가학증이 있으며 식인까지 했다는 악담을 날조하여 퍼부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소유한 ‘스토야의 혈계’가 ‘심장을 씹고 피를 삼키는 가학자’를 기록합니다.]
환영에 새로운 기록이 덧씌워졌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했던 왕은 종교도 이용하기로 했다. 왕은 하얀 피부의 인간들의 종교로 개종했고, 바다의 신과 조상신들은 슬퍼하면서도 왕의 결정을 이해하고 보듬었다.
“끄아아! 뜨거워, 뜨거워! 왕이시여!”
화형당하는 남첩들의 비명은 곧 마수의 울부짖음이었다. 마수의 비명이 울릴 때마다 살이 타들어 가는 역겨운 내음이 일어나고, 마수가 고통스레 뒹굴 때마다 불길이 일어났다.
그 불길 속에서, 왕이 눈을 떴다.
[히든 보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이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