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214)
  • 경매는 VIP들만 초청된 IA옥션의 강남센터 프리미엄관에서 진행되었다. 아이템과 아티팩트만 다루는 옥션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보는 것처럼 떠들썩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경매라기보다는 사교 모임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핑거 푸드가 테이블마다 준비되어 있었고, 응찰객들은 느리게 진행되는 경매를 구경하며 담화를 나누었다.

    현규하가 내 남친을 귀찮게 하거나 데이트를 방해하면 척추를 뽑아 버리겠다는 오라를 사방에 보내고 있었기에, 그들을 힐끔거리기는 했어도 가까이 다가오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어느 헌터는 현규하를 보더니 기겁해서 경매장을 빠져나가기까지 했다. 일전에 인유신에게 러브 콜을 보냈다가 건물이 뽑혔던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머리 위의 살벌한 기운을 알 리가 없는 인유신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블랙스미스나 연금술사 등 제작 스킬이 있는 사람들이 만든 아이템을 먼저 경매하고, 메인인 아티팩트들은 그 뒤에 이어서 할 예정이었다.

    “경매장은 정신이 없을 줄 알았어요.”

    “원래 그렇긴 한데, 분기마다 한 번씩 이런 걸 열더라고요. 뭐, 돈 많거나 상위 헌터거나 하는 사람들만 모였으니 어깨에 뽕이라도 채우란 뜻이겠죠. 아, 답문 왔네요.”

    빠르게 문자를 확인한 현규하는 휴대폰을 넣었다.

    “공태성이 어제 길드원들과 훈련하면서 아티팩트 썼다는데 알림 떴어요”

    인유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거리상의 문제인가도 싶군요…….”

    “근데 나르샤 길드에 지인 있었어요 길드장님 근황을 바로 알려 주는 거 보면 많이 친한가 봐요.”

    “끝녀 누나요.”

    이혼한 전처가 전남편의 정보를 흔쾌히 넘기는 관계란 뭘까……. 민끝녀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친한 사이구나, 라고 넘겼는데 생각 이상으로 친한 관계 같았다.

    괜히 신경 쓰인다. 어쩌다 친해진 건지, 얼마나 친한 건지.

    묻고 싶은데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인유신은 한숨을 삼키며 과일과 크림치즈를 올린 카나페를 우물우물 씹었다. 이 와중에 맛있다. 8세도 정신없이 새로운 요리를 탐닉 중이었다.

    금실처럼 털이 아주 곱고, 반려동물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도 와구와구 갉아 먹고 있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햄스터다. 그 햄스터를 내려다보는 현규하의 시선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침식 게이트에서 받은 선물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그때 두 사람이 휘말렸던, 보스 몬스터가 없는 침식 게이트는 이아드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이아드와 철의 시대라는 두 개의 평행 세계를 잇는 가교라 할 수 있으리라.

    현규하가 9살에 겪었던 게이트이기도 하다. 제 뒤를 졸졸 따라오던 어린아이를 자연히 연상한 그는 한숨과 함께 상념을 지웠다. 그렇지만 마음처럼 쉽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바랄 뿐이었다.

    순하고 착한 아이였으니 무사히 잘 크고, 잘 살고 있기만을.

    ‘그러고 보니 유신 씨와 나이가 비슷하겠군…….’

    어쨌든 현규하가 9살 때 보스가 없는 침식 게이트에서 만난 이는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와 삼승, 두 신이었다. 그리고 인유신과 함께 휘말렸던 침식 게이트에는 커프크니뿐이었다.

    이아드에서 건너온 유일한 사자(使者) 커프크니가 ¦°ø¾Îð인 인유신의 존재를 확인했다면 선물을 주기는커녕.

    ‘즉시 죽이려 들었겠지.’

    당시 커프크니에게 제 짝에 대해 물은 건 놈이 곧 소멸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을 줄 존재 따위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따로 의도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신과는 달리 흑암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커프크니가 유신 씨에게 접근할 방법은 없었어.’

    생각을 거듭해 봤지만 진짜 모르겠다.

    ‘정말 공태성의 이상 행동과 관계가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연결 고리라는 자각은 있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으니 그거라도 캐내고 싶어진다. 회령에 한 번 다녀오는 게 좋을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저놈을 조져서 털어 보는 건데.’

    살기를 느꼈는지 8세가 파르르 몸을 떨면서 슬금슬금 인유신에게 밀착했다.

    “어.”

    둘 사이에 오가는 심상찮은 기류를 눈치채지 못하고 경매를 구경하던 인유신이 낮은 탄성을 뱉었다. 현규하도 시선을 움직였다. 검붉은색의 깃털 부채였다.

    “네 달 전, 천안 인근 게이트의 보스로 나타났던 양력대선(양의 정령인 요괴.)! ……이 기르는 냉룡의 비늘 하나에 유조(머리가 두 개, 다리가 네 개인 검붉은 새.)의 깃털을 세공한 부채입니다. 항상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는 데다가 팔랑팔랑 부치면 에어컨보다는 조오금 덜 시원한 온도의 한기가 불어온답니다. 마침 여름이기도 하니 보기에도 좋겠죠”

    경매사가 농담을 섞으며 아이템을 소개했다. 장식용으로는 예쁘지만 실용성은 없는 부채였다. 저걸 쓸 바에는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고 말 테니까.

    인유신이 관심을 가지는 눈치이자 현규하가 그가 앉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맘에 들어요”

    “예쁘긴 한데 그것보다는 비늘만 있어도 시원하다는 게 괜찮아 보여서요. 6세 여름 침대로 대리석보다는 저 비늘이 더 좋을 거 같거든요. 사이즈도 적당해 보이고요.”

    실용성도 없고 겨우 비늘 하나에 불과하다지만, 보스 몬스터의 부산물이니 몹시 비쌀 게 뻔했다. 과연 500만 원부터 시작했다. 빠르게 단념하고 초콜릿 퐁뒤나 찍어서 다시 먹는데 현규하가 패들을 올렸다.

    “으아, 꼭 사고 싶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누나에게 동생이 선물 하나 못 사 줄까요.”

    만류하는 인유신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리며 현규하는 경매에 참가했고, 부채는 870만 원에 낙찰되었다. 이 경매장에서는 매우 저렴한 축에 속했다.

    “고맙습니다, 규하 씨. 잘 쓸게요.”

    “감사 인사는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한테 받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음, 뽀뽀”

    아까 8세에게 볼 뽀뽀를 시켰던 걸 떠올린 인유신은 그냥 실없이 웃고 말았다.

    경매는 계속 진행되었고 애피타이저인 아이템이 끝나자, 메인 디쉬인 아티팩트가 소개되었다. 억대는 우습게 거론되는 경매가에 인유신은 금전 관념의 혼란을 느꼈다. 현규하가 노리는 아티팩트가 뭔진 모르겠지만 저렇게 비싼 걸 받아도 되는 걸까.

    “뭐 사려고 하시는 건데요”

    “순서를 보니까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 저기 올라오네요.”

    마침 단상에 새로운 아티팩트가 올라왔다. 정수리가 높이 솟아 있으며 정교한 수실과 진주들로 장식된 붉은색 모자였다.

    “이어 소개해 드릴 아티팩트는 ‘중긴 카툰의 벅특’입니다. 여수시 낭도의 던전을 닫으면서 획득한 아티팩트로 마나 스탯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익숙하시지 않을 이름이라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중긴 카툰은 사서에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여성입니다. 하지만 남편 알탄 칸의 사후 분열한 투메드 부를 재통합한 당대 몽골의 위인이기도 하죠.”

    말을 이으며 경매사는 ‘중긴 카툰의 벅특’을 다시 손으로 가리켰다.

    “몽골인, 특히 비슷한 업적을 이룬 여성 위인의 아티팩트를 소유하고 있으시다면 상성상 아주 좋은 효력이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하하, 다들 아시는 얘기겠지만요.”

    현규하의 소맷자락을 꾹꾹 당기며 속닥거렸다.

    “그래서 만두카이의 아티팩트를 먼저 줬던 거예요”

    “손자며느리잖아요. 딱이죠.”

    “어, 그게 그렇게 되네요…….”

    몽골인은 유목 민족이다. 당시는 과부의 재혼, 특히 시동생이나 의붓아들과의 결혼이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

    중긴 카툰도 평생 그렇게 네 명의 남자와 결혼을 했고, 족보를 세세하게 따지면 엄청나게 꼬이긴 하지만, 일단 만두카이의 손자며느리이기는 하다. 키잡에 이은 현규하의 요약 능력이 새삼 놀라웠다.

    “나도 유신 씨처럼 마나 증폭해 봤자 별 티도 안 나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드롭된 거 그냥 갖고만 있던 거였는데 이렇게 주인을 찾게 되는군요. 주인님과 나는 역시 천생연분입니다.”

    측정 불가의 EX급과 F급 마나의 공통점을 나열하는 그의 말에 인유신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바다에 또 물을 들이부어 봤자 티가 안 나겠지……. 그러다가 경매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경매가는 10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마나 상승 효과의 아티팩트는 비전투원이나 제작자들에게도 아주 유용하다. 비쌀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상황을 모르는 그의 착각이었다. 10억은 그나마 싼값이었다.

    아티팩트는 언제나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했고 부르는 게 값이었으나, 문제는 ‘중긴 카툰의 벅특’의 형태였다. 전투원들이 사냥 중에 착용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모양새였으니. 그 때문에 세트로 묶어 팔기 위해 몽골 위인의 아티팩트를 구하려던 것도 실패했다. 예상 낙찰가는 40억대였다.

    곳곳에서 패들이 올라오는 가운데, 현규하는 한 마디만 했다.

    “100.”

    인유신은 눈이 튀어나왔고, 경매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100억! 100억 나왔습니다. 호가는 1억 단위로 올리겠습니다.”

    패들들은 올라왔을 때보다 더 빠르게 내려갔다.

    이대로 낙찰되려나 했는데 헌터 하나가 패들을 들었다. 현규하를 지그시 노려보는 시선에서 추측하건대, 아티팩트가 탐이 나는 게 아니라 그를 싫어해서 훼방을 놓으려고 참여한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57번, 101억 나왔습니다!”

    “200.”

    “200억, 그리고 201억!”

    “300.”

    “300억! 더 없으십니까”

    헌터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패들을 내렸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중긴 카툰의 벅특’은 300억에 낙찰되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10억이 300억으로 뛰는 기적에 인유신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경매가 끝났다.

    “그럼 30분간 휴식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벼운 사교 모임도 겸하는 경매이니만큼 휴식 시간도 넉넉했다. 대리인이나 온라인, 서면 응찰을 허용하지 않는 경매장이었기에 응찰객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실상 경매보다는 인맥을 넓히기 위해 참여한 사람들도 있으니만큼 휴식 시간은 더욱 분주했다.

    인유신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현규하를 짤짤짤 흔들었다.

    “사, 사, 사사사사삼백……!”

    “진정해요. 콤부차 한 잔 줄까요”

    현규하가 콤부차를 입에 대 주는 게 아니라 제 입에 머금어서 키스로 옮겨 주려 했기 때문에, 인유신은 강제로 진정되었다.

    “사, 사, 사, 삼백억짜리를 쓰고 있으면 제 모가지가 똑 하고 꺾일 거 같은데요!”

    “모자라고 해서 꼭 써야 아티팩트가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신체에 접촉하기만 하면 돼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거의 울상을 짓는 인유신을 본 현규하는 “으음.” 하며 잠깐 고민하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요새 최저 시급이 얼마죠 5천 원인가”

    “1만 3천 원쯤이요.”

    “당신이 100만 원짜리 물건을 사려면 대충 100시간을 일해야 하잖아요. 근데 나는 그 돈, 10초도 안 돼서 몇 배로 벌어요.”

    “그야 규하 씨가 사냥해서 얻는 결정석만 해도…….”

    “그러니까요. 300억이야 며칠만 뺑이 치면 벌 수 있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요새는 사냥을 안 해서 백수이긴 한데 돈 맡겨 놓은 사람들이 알아서 불려 주고 있으니 유신 씨의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식하는 돈의 단위가 다르니 금전 감각도 다른 건 별수 없었다. 그러니 이해는 하지만, 300억이라는 단위에 소시민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라고 반박하지도 못한 인유신이 끙끙 앓기만 하자, 현규하가 틈을 놓치지 않고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정 마음에 걸리면 다음에 보스 사냥할 때 서포트해 줘요. 그거 주워서 팔면 오늘 쓴 돈은 얼추 충당되겠죠.”

    “저한테 버프 받으면 그게…… 그렇게 되잖아요.”

    “던전 넓으니까 혼자 어디 가서 금방 빼고 올게요.”

    “…….”

    “농담이에요.”

    어쨌든 그의 섹드립에 인유신은 정신을 거의 회복했다. 그래도 완전히 평정심을 되찾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아티팩트가 드롭이 안 되면요”

    “드롭될 때까지 같이 다니면 되죠.”

    현규하가 은근슬쩍 무기한 던전 데이트를 확정 짓는 걸 제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제지한다고 해도 먹히지도 않을 테지만.

    “현규하 헌터님. 잠깐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경매장의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낙찰받은 물품들에 대한 용건인 듯했다. 현규하가 그를 따라 자리를 비우자 다시 300억이라는 액수가 까마득하게 밀려와서 인유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300억. 300억이라니. 평생 숨만 쉬면서 일해도 벌지 못할 돈인데.

    “찍.”

    “아무것도 아니야. 좀 놀라서 그래.”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8세를 조물조물하고 있을 때,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공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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