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들이셨어요”
“그때 처음 만났고, 그곳에서 헤어진 사람들이라 나도 잘은 모릅니다. 참고로 던전의 보스는 화형당한 사람들이었어요.”
“헉.”
“여장한 남자들이었습니다.”
“헉…….”
“여하튼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두 분을 만난 덕분에 내 인생이 변했어요. 세상의 인간들이 쓰레기인 건 맞는데 그중에 덜 쓰레기도 있고, 아주 아주 가끔은 쓰레기가 아닌 사람도 있더군요.”
그 말을 하며 현규하는 김말이 튀김에 떡볶이 국물을 잔뜩 묻혀 인유신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유신 씨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과 인간들 사이의 유일한…….”
“각성제요”
김말이를 우물거리면서 먼저 말을 가로채자, 그가 눈가를 접으며 소년처럼 천진하게 미소했다.
“그래요. 각성제로 해 둬요. 명칭이 뭐든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일찍 점심을 먹었던지라 가게를 나왔을 때는 12시 반도 되기 전이었다. 무슨 쇼핑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넉넉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본 현규하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슬아슬할 거 같기도 하고……. 뭐, 매번 초대장 보내면서 좀 늦었다고 입뺀하지는 않겠죠.”
“초대장이요 어디 가는 건데요”
“내가 말 안 했어요”
“그냥 쇼핑이라고만…….”
“으음.”
현규하는 목뒤를 문지르더니 일단 인유신을 바이크에 앉게 했다.
“야. 팔.”
“찍”
양껏 떡볶이를 먹고 한껏 만족하여 늘어져 있던 8세가 파우치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나 증폭, 이중으로 가능하지”
“찍!”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인유신을 사이에 둔 두 형제는 한마디만으로 뭔가 의사가 통한 모양이었다. 현규하는 얼굴을 주억거리며 아공간에서 천을 하나 꺼냈다.
화려하며 섬세한 문양이 수놓아진, 폭이 넓고 긴 황금색 비단이었다.
“우와, 엄청 고급스럽고 멋지네요. 근데 뭐예요”
“허리에 두르는 천이요. 허리띠.”
“허리띠가 이렇게 커요”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받으니, 현규하가 천을 톡톡 두드렸다.
“아이템 감정해 봐요.”
살면서 아이템 감정을 해 본 경험은 문짝과 햄스터 반지가 전부였다.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봤다.
[만두카이의 부스]
아이템을 제작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떴다. 그렇다는 건 제작한 아이템이 아니라 던전에서 보스를 사냥하고 획득한 아티팩트라는 뜻이었다. 히든 보스가 드롭하는 아티팩트와는 달리 귀속되지 않는 일반 아티팩트다.
“만두카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 위에 물음표만 더 생겨나자 현규하가 힌트를 주었다.
“키잡.”
“아! 연하의 남편을 키워서 잡아 먹…… 아니, 이게 아니잖아요!”
“내 말이 틀렸어요”
“……딱히 틀린 건 아닌데.”
15살 연하의 어린 남편을 카간(몽골계, 튀르크계 등 유목 민족 국가에서 황제를 뜻하는 칭호.)으로 훌륭히 길러 내고, 몽골 부흥의 한 축이 된 만두카이 카툰(칸이나 카간의 정실.)의 일생을 키잡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하다니 틀린 건 아닌데 뭔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마나를 증폭할 수 있는 아티팩트예요.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었다면 지능 스탯이 올라갈 거 같은 아이템은 마나 상승 효과가 있거든요.”
“으음, 확실히 만두카이 정도 되는 똑똑한 사람의 템을 갖고 있으면 머리가 좋아질 거 같긴 해요.”
“유신 씨의 F급 마나는 증폭해도 F급이겠지만, 저놈이 자기 마나를 공유한 상태에서 증폭하면 꽤 좋은 효과를 얻을 거 같군요. 확인도 해 줬으니 거의 확실할 거라고 봅니다.”
“아하.”
“그리고 마침 ‘만두카이의 부스’와 같이 사용하면 효과가 더 좋을 듯한 상성의 아티팩트가 나왔길래 그걸 사러 가려고요.”
“근데요, 규하 씨.”
인유신은 조상필과 같은 오류를 범한 현규하의 실수를 되짚어 주었다.
“제 마나를 증폭해 봤자 얻다 써요”
“…….”
“던전에서 사냥할 때 규하 씨에게 버프를 팍팍 걸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걸 쓰면 다른 의미로 위험해지잖아요.”
잠시 침묵하던 현규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나가 증폭되면 근육의 회복 속도가 빨라지며, 3 대 100씩은 가뿐히 더 칠 수 있는 효험이 있고, 단백질 보충제가 맛있어지는 데다가, 근손실 속도가 현저히 느려집니다.”
무안단물인가. 근데 왜 효과가 전부 운동 관련이야.
인유신의 눈이 가늘어지자 현규하가 한숨을 폭 쉬며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그에게 얼굴을 부볐다.
“어쨌든 마나는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오…….”
아무래도 마나는 다다익선이라는 거에만 골몰하느라, 다른 스킬이 없는 인유신에게 별 효용이 없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현규하가 어리광 비슷한 뭔가의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거였다. 아티팩트를 받아 달라면서 바짝 붙어서 비비적거리는 현규하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힘껏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현규하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떠오른 후였다. 필요 없으니 안 받겠다며 되돌리기엔 늦었다.
“저희 쇼핑하러 백화점 가요”
현규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님 블랙마켓”
“주인님에게 선물할 건데 출처도 모르는 블랙마켓 템을 어떻게 주나요. 그럴 바에는 정정당당히 정문으로 쳐들어가서 강탈해 오겠습니다.”
정정당당이라는 단어와 강탈이라는 단어를 언제부터 한 문장에 연결해서 쓸 수 있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럼 어디 가는데요”
“경매요.”
“와.”
고등급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를 전문으로 다루는 경매장이 있다는 건 인유신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현규하의 선물도 선물이지만 경매 현장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신났다.
얼른 경매장으로 가자며 현규하가 준 헬멧을 쓰고 있는데,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경매장에 드레스 코드는 없어요”
“지금까지 평소 복장으로 가도 입뺀 안 당했는데요.”
“옷 잘못 입고 왔다고 규하 씨를 문 앞에서 돌려보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날이 바로 경매장 문 닫는 날이죠. 음, 인정.”
납득한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초대장을 하나 꺼내어 다시 훑어보았다. 드레시 캐주얼한 옷을 권유하는 내용의 작은 글씨가 정말 있었다.
“면접용 정장이 집에 있으니까 갈아입으면 되겠네요.”
“무슨 색깔이에요”
“홈쇼핑에서 투플원으로 산 거라서 쥐색이랑, 베이지색이랑, 네이비색이요.”
“그 색깔이면 나랑 깔 맞춤이 안 되니까 그냥 내 오피스텔에 가서 커플 룩으로 골라요.”
“예 제 옷이 왜 규하 씨 집에 있어요”
“일단 갑시다.”
뭐라고 더 물어볼 틈도 없이 현규하는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두 번째로 방문한 오피스텔엔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
“…….”
“안 들어와요”
인유신은 사방의 벽에 가득한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들로부터 힘겹게 눈을 돌리며 드레스 룸으로 따라갔다.
드레스 룸에는 인유신의 옷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일전의 햄스터 잠옷과 같은, 현규하와의 커플 룩들이었다.
“유신 씨랑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샀어요.”
여름이라서 그런지 수영복, 래시 가드, 서핑 웨어 등등이 현규하의 것과 세트로 준비되어 있었다. 겨울이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스키복 따위도 벌써 눈에 보였다. 등산복, 트레이닝복 등은 물론이거니와 정장 같은 평상복들도 줄줄이 걸려 있다. 산타와 루돌프 복장은 또 뭘까.
아직 확인하지 않은 다른 옷장에 어떤 이벤트용 옷이 준비되어 있을지 두려워진 인유신은 그냥 얌전히 정장을 골랐다.
옷장을 뒤적거리다 보니 이상한 게 눈에 뜨였다. 소맷단이나 안감 등 옷마다 한쪽에 귀여운 햄스터 캐릭터 자수가 있었다. 옅은 황갈색의 털에 역시 옅은 주황색 눈동자로 묘사된 햄스터 자수 패치였는데, 수작업처럼 보였다.
“…….”
설마 직접 만든 걸까.
그러고 보니 예의 그 커플 잠옷 중 자신의 잠옷은 이것과 같은 햄스터 디자인이었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햄스터와 똑같은 배색을 가진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빙그레 미소하던 현규하가 문득 고개를 깊이 숙였다. 츄.
방심한 사이에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혀가 입 안을 둥글게 핥았다. 아랫입술을 문지르는 혀에서 젖은 소리가 울린 뒤에야 인유신은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천연덕스러운 음성이 귓바퀴를 훑으며 귓불을 깨물었다.
“키스해 달라는 줄 알았어요.”
“아, 아, 아닌데요.”
귀까지 가리면서 급히 물러나자 현규하가 목 안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 옷으로 입을 거예요”
뒷걸음질 치다가 얼떨결에 붙잡은 정장이 마침 현규하와 같은 색의 옷이었다. 딱 커플 룩이다.
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으려던 인유신은 멈칫했다. 곁눈질하니 현규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돌아섰다.
“저번처럼 뒤돌아 있을게요.”
남자끼리 닳는 것도 아니고, 옷 갈아입는 걸 보여 주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인유신은 그의 등을 낑낑 밀어서 억지로 드레스 룸에서 내보냈다. 혼자 남게 되고도 입술과 귓가에 그의 감촉이 진득하게 남아 떨어지지 않아서, 몹시 곤란했다.
갈아입은 옷은 몸에 딱 맞았다. 설마 맞춤 정장일까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의문도 잠시, 인유신은 혼자 납득했다. S급의 눈썰미로 어떻게든 알아냈겠지.
팔을 붕붕 휘두르기도 하며 움직여 보았다. 맞춤 정장이 편하다더니 정말 편하긴 했다.
“으아, 이러다가 경매에 늦겠다.”
서둘러 문을 여니 앞에 현규하가 있었다. 느린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유신을 훑는다. 정수리부터 얼굴, 목선을 더듬으며 내려와 가슴팍, 허리, 애매한 위치의 손가락을 지나 양말에 이르기까지. 인유신은 발끝을 살짝 움츠렸다.
“그렇게 이상해요”
영 반응이 없었기에 슬슬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현규하가 묵직하게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왜 그러세요”
인유신도 놀라서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빈혈인가 상위 헌터도 빈혈 같은 소소한 질병을 앓던가
걱정스레 바라보는데 커다란 손이 뻗어 와 인유신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에 엎어져서 그의 품에 쏙 안겼다. 짧게 자른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의 감촉이 보드랍다.
“사실은 오늘 나랑 데이트한다고 유신 씨가 새 옷 입은 거도 좋았거든요.”
“어, 눈치챘었어요”
“유신 씨가 새 옷을 샀는데 왜 못 알아봐요. 근데 그 말 하면 좀 스토커 같을 테니까 모르는 척했었는데……. 역시 남자는 정장인가 봐. 혼자 멋지고 섹시하고 예쁘고 다 해 먹고 있어서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