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대충 옷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는 거겠지. 인유신은 그렇게 납득하면서 다른 옷도 걸쳐 봤다.
현규하와 주말 데이트를 약속하고 서둘러 인터넷에서 쇼핑한 옷이었다. 나름대로는 박승기의 조언까지 들어 가며 열심히 골랐지만 예산과 패션 센스의 한계 탓에 거기서 거기처럼 보였다. 평소 입는 옷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방에는 거울도 없어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거울을 보느라 진은 더 빠졌다. 11시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조급하게 달음박질친다.
인유신은 어느 틈에 또 케이지에서 탈출해서 식탁에 둔 꽃병에서 꽃향기를 맡고 있는 6세를 살살 손으로 보듬었다. 따스하게 스며드는 익숙한 온기가 다급하게 뛰어놀던 심장을 가라앉혔다.
“나 이래도 되는 걸까”
그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설레어 하고, 기다리는 것이.
“찍.”
6세는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해 주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어 가볍게 볼을 부볐다.
딩동.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갔다 올게. 케이지 밖은 위험하니까 되도록 나오지 마, 알겠지”
“찍!”
6세를 케이지 안에 넣어 주었다. 그 옆의 케이지에 8세도 넣으려고 했는데, 파우치에 먼저 쏙 들어가 있었다.
“외출하고 싶어”
“뀨.”
“알았어. 같이 가자.”
파우치를 걸고 휴대폰을 드는 것으로 외출 준비의 마지막은 끝났다. 인유신은 가볍게 심호흡하며 문을 열었다. 오늘도 꽃향기가 담뿍 밀려들었다.
“매일 안 가져오셔도 되는데.”
“오늘은 데이트니까요.”
그래도 번거롭거나 부담스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달콤한 향기는 기분이 좋고, 귀가하고 문을 열었을 때 꽃향기가 맞아 주면 마치 그가 맞아 주는 거 같아서 또 좋다.
오늘의 현규하는 캐주얼한 하늘색 세미 정장이었다.
“맘에 들어요”
“규하 씨는 전생에 얼굴로 나라 여러 개 말아먹었을 거예요.”
스리피스 슈트보다는 심장에 덜 해롭지만 심플하게 떨어지는 날렵한 핏도 계속 바라보기 곤란했다.
“정략결혼한 북부 대공의 나라를 말아먹는 영애라니 멋진데요.”
“그 콘셉트 아직 유지하는 거였어요”
꽃다발을 놓고 나오려던 인유신은 멈칫했다. 세미 정장이라지만 정장은 정장이다. 그리고 현규하가 정장을 입고 왔다는 건…….
“수리 맡긴 차는 어떻게 됐어요”
“한정판이다 보니 부품 사는 것보다는 그냥 폐차하는 게 낫겠다던데요.”
“아하. 그럼 바이크를…….”
“하지만 색을 바꿔 재탄생한 유춘 No.2가 밑에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즉시 문을 닫으려 했지만 현규하가 더 빨랐다. 사이코키네시스에 붙잡힌 문은 아무리 낑낑거리며 용을 써도 꿈쩍하지 않았다.
“주인님과 함께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유춘이를 미워하지 마세요.”
“뜨거운 시간은 규하 씨 혼자 보내면 되잖아요!”
“주인님이 보는 앞에서 해야지 혼자 무슨 재미로 해요.”
“뭘요! 뭘 하겠다는 건데요!”
“삐이이익!”
인유신이 발버둥을 치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그를 번쩍 들어 안고서 3층 높이 옥탑방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쿵!’ 하는 소리도 없이 바닥에 사뿐 착지한 현규하의 품에서 고개를 든 인유신이 목격한 건 유춘 No.2……가 아니라, 버건디색 스포츠카와 바이크였다.
“갑식아!”
부르는 사람이 창피해지는 작명이라서 한 번도 육성으로 말한 적이 없는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의 바이크가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출근하는 날에는 차를 타고 가도 사무실에서 쉴 수 있지만 오늘은 데이트니까요.”
역시 이 사람은 ‘사무실=일터’라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유춘 No.2든 갑식이든 유신 씨가 타고 싶은 거로 골라요.”
“갑…….”
“대신 갑식이에게는 퀘스트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며 현규하는 제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거기에 머리를 들이받거나 손바닥으로 싸대기를 갈기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인유신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후 말했다.
“갑식이요.”
“오랜만의 퀘스트. 애완쥐 이뻐하기.”
인유신을 바이크에 앉힌 현규하가 허리를 스윽 굽혔다. 옆으로 돌린 얼굴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눈은 감아 주시면 안 돼요”
현규하는 즉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뺨으로 온기가 쪽 하고 내려왔다. 따스하고 촉촉한, 그리고 북슬북슬하고 작고 도톰한 것이……. 북슬북슬하고 도톰해
황급히 눈을 뜨자, 눈앞에서 금색의 통통한 햄스터가 수줍은 울음소리를 냈다.
“찌이익♡”
“…….”
“남매간의 우애만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도 중요한 게 아닐까요”
“…….”
그날 인유신은 현규하가 할 말을 잃게 한다는,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도전 과제를 깼다.
기깔 나게 빼입은 현규하와 점심을 먹으러 온 곳은 떡볶이 가게였다. 두 사람은 틈이 날 때마다 도장 깨기를 하듯이 떡볶이 맛집을 클리어하고 있었다.
“지금 햄스터가 떡볶이 먹고 있는 거 맞지”
“간도 먹는데”
테이블 한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식사하는 8세를 보며 놀란 주변에서 연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인유신은 개의치 않았다. 현규하와 다니면서 쪽팔린 소리를 하도 많이 듣다 보니 이 정도는 그냥 귀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얼굴 가죽이 두꺼워진 모양이다.
“이 집 튀김 맛있네요.”
“집에 가기 전에 시간 되면 튀김이랑 떡볶이 포장해 가죠.”
영화 보면서 떡볶이도 먹을 수 있으면 그냥 영화관으로 가져가면 될 텐데 아쉽다.
“아, 유신 씨.”
현규하가 문득 부르더니, 눈을 깜빡거리는 인유신의 입가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훔쳤다. 손수건에서 묻어나는 향이 연연하게 코끝을 스쳤다. 현규하는 따로 향수를 쓰는 일이 없어졌지만 손수건에는 조금씩 뿌렸다.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 남자가 자신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만으로.
가슴 안에서 낯선 뭉클함이 간질간질하게 일어, 인유신은 서툴게 말문을 돌렸다.
“어제 인터넷에서 강림 길드 전 길드장님의 인터뷰를 봤거든요. 젊었을 때 생고생을 하면서 클리어했던 던전 하나 때문에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는데, 규하 씨는 그런 경험 없으셨어요”
그냥 말문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던진 어설픈 말이었을 뿐인데, 현규하의 낯에 그늘이 드리웠다. 지금껏 본 적이 없던 깊은 감정의 울림에 실수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질문을 거두려 했으나, 그의 입술이 나직이 움직였다.
“헌터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요”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여상하여 인유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도 평소의 현규하였다. 아까는 잘못 본 걸까.
“어떤 일이었는데요”
“으음, 대략 유신 씨가 교복 입던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였을 때 생긴 일이었습니다. 정식으로 S급 되기 직전이었던 14년 전이요.”
“엄청 예전이었네요. 하긴 규하 씨는 어렸을 때부터 던전을 공략하셨으니까……. 그럼 그때의 어린 규하 씨랑 교복 입은 저 중에 누가 더 귀여웠어요”
현규하의 반응이 평소 그대로여서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그는 떡볶이를 우물거리는 것도 멈췄다. 그러고는 이마를 짚으며 한참이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5분은 족히 지나서야 인유신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교복 입은 유신 씨가 더 귀여워요.”
“고, 고맙습니다.”
“교복 입은 유신 씨만큼 귀엽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중2병이 심각해서 세상의 모든 인간은 쓰레기라는 단정을 내렸던 귀여운 시절이었죠.”
“정말 귀엽네요…….”
“근데 그때의 던전, 정확히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만난 두 명의 헌터가 있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그중 하나는 헌터가 아니라 그냥 각성자였지만요.”
인유신은 무심코 숨을 꼴깍 삼켰다. 처음이었다. 현규하가 자신을 보면서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마치 제 얼굴 위로 누군가의 얼굴을 겹쳐 보는 듯한 아득한 시선을 담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유신 씨 앞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