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데 어떤 놈이 전화를 걸어.”
휴대폰 벨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던 한준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터치해서 받았다.
“누나! 벌써 귀국하셨어요”
- 아니. 아직 독일이야.
전파 건너편에서 외국에 나가고도 맥없는 민끝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함부르크에서 헤어 리프만을 소개받았는데, 네가 말했던 게 생각이 나질 뭐니. 태성이는 여전해
리프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힐러다. 주로 저주를 비롯한 정신 오염 계열의 치유에 능하지만, 일반적인 정신 질환 치료에도 탁월한 각성자였다.
두 사람의 재결합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한준수는 지나가듯 던진 말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에 신났다. 6촌 누나에게 신나게 떠벌리는 그의 머릿속에는 라이벌 길드 관련자에게 길드장의 근황을 누설하는 중이란 자각은 없었다.
“요즘에는 딱히 들은 적이 없는데, 예전에도 막 티 나도록 대화 같은 혼잣말을 하신 건 아니어서요.”
- 조현병이면 어떡하지
“그렇지는 않으실 거 같습니다. 정신 공격이라거나 일종의 텔레파시를 받으신 것 같기도 한데……. 저에게도 숨기시는 걸 보면 개인적인 용무가 아닌가 싶어요.”
- 흐음.
“아! 따로 만나는 여자라는 건 절대 아니고요. 태성이 형에게 여자 흔적은 절대 없습니다.”
공태성이 여자를 만나든 남자를 만나든 외계인을 만나든 알 바 아닌 민끝녀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살포시 웃기만 했다.
- 그럼 네 판단을 믿고 헤어 리프만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건 보류해 둘게. 태성이가 언제부터 그랬었니 함경도 사투리가 들린 적이 있다고 했었지 북쪽 지방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정확히는 육진 사투리 같았습니다.”
- 구분이 확실한 거니 함경도 사투리랑 비슷한 거 아니야
“아이, 누나도 제 전공 아시잖아요. 당연히 비슷하긴 한데, 육진 사투리는 옛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보니 제주도 사투리만큼이나 독특해서 아는 사람이 들으면 어느 정도 구분이 갑니다. 한 가지 이상한 건 목소리가 꽤 앳되었거든요. 아무리 시골 출신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그만큼 강한 사투리까진 안 쓸 텐데…….”
- 남자였어
“소년에 가까웠는데, 중성적인 목소리의 여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뜻 들은 한마디로 꽤 많은 걸 추론한 한준수였으나, 그 섬세함이 직장 상사가 아니라 6촌 누나에게 발휘되고 있다는 게 공태성에게는 유감인 일이었다.
“가끔 혼잣말을 하시는 낌새가 보였던 게 재작년부터였던 거 같긴 한데……. 누나 말 듣고 생각이 났는데요, 아무래도 회령에 다녀오신 이후 같습니다. 백두산 게이트 닫으러 가신 김에 부탁을 받고 며칠 들르셨던 적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꺼림칙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현규하를 길드에 영입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뭔가 연관성이 있는 걸까.
떠오른 의문에 한준수가 갸웃하는 사이에, 캐낼 건 다 캐낸 민끝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 만약 저주나 병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으니, 변화가 생길 때 말해 주렴.
“그럼요.”
- 선물 사 갈까 필요한 거 있니
출장 선물로 마수의 부산물을 가공한 무구 관리용 오일까지 받기로 한 한준수는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사이에 홍보팀에서 새로운 업무 메일까지 한 통 보내왔다. 나르샤 길드도 검수를 했던 던전 연수 브이로그의 최종 편집본이었다.
‘무난하네.’
이능부로부터 최종본을 받은 홍보팀에서 검토를 했지만, 다시금 꼼꼼히 확인한 한준수는 공태성을 찾아 1층의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문을 여니 막 공태성과 대련하던 헌터 네 명이 공중을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으므로 놀라지 않고 다가갔다.
“이능부에서 최종 편집본 보냈는데 확인하시겠습니까”
방금 사람 넷을 날려 보내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공태성이 칼을 납검하며 되물었다.
“먼저 보니까 어떻지”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홍보팀에서도 따로 코멘트는 없었고요.”
“네가 봐서 문제없었다면 그냥 오케이 해라.”
처음부터 영상 자체에 큰 관심이 없던 공태성은 손을 내저었으나 대련을 구경하던 다른 헌터가 팔을 번쩍 들었다.
“길드장님! 현규하가 인솔했다던 그 던전 연수 맞지요 꼭 보고 싶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솔자는 최진혁이었고 그놈은 한 일도 없었다만.”
“그래도 화면에는 자주 나올 거 아닙니까!”
목적이 따로 있었던 헌터는 뒤늦게 번드레한 용건을 붙였다.
“그리고 손수 보스를 사냥하신 우리 길드장님의 활약도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유 갖다 붙인다고 용쓴다.”
공태성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한준수에게 영상을 보여 주라고 지시했다.
“뭐야, 뭔데”
“저번에 우리 길드가 참여했었던 던전 소풍.”
“오, 길드장님이 아가씨한테 차이고 진혁이한테 끌려갔던 그날 야, 장범! 네가 보고 싶다고 한 게 이거 아냐”
훈련이나 운동을 하던 헌터들도 볼거리가 생기자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왔다. 공태성은 다혈질이었으나 위계질서에 엄격한 이는 아니었고, 그의 성격이 반영된 나르샤는 전반적으로 퍽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한준수는 아예 훈련장의 벽에 걸린 대형 TV에 노트북을 연결해서 브이로그 편집본을 재생했다. 헌터들은 옹기종기 TV 앞에 앉아서 본인, 그리고 동료들이 나오는 화면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인유신은 정말 확실하게 편집했군.’
듣기로는 인유신이 이능부의 공식 매체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노출되면 즉각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던가. 이능부에서 이용해 먹지 못하도록 싸고도는 걸 보면 정말 애인인 것 같기도 하고.
현규하가 연애를 할 정도로 사람을 신뢰한다는 걸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14살짜리 어린애가 친아버지와 같았던 이를 포함한 숱한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현장을 확인하기도 했고, 민끝녀에게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맹한 얼굴의 꼬맹이를 현규하가 죽이는 꼴을 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손바닥에 그 불알만 징그럽게 큰, 마수인지 햄스터인지를 올려놓은 꼬맹이가 겁도 없이 현규하 옆에 붙어 있던 모습을 상상하니 실소가 다시금 흘렀다. 공태성은 머리를 내저으며 방송에 몰두한 훈련장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 고래를 호출했다. 또 졸고 있었는지 고래는 커다란 입을 쩍 벌려 하품하며 나타났다.
“알아보겠다고 한 건 어떻게 됐나”
『어떤 거』
“현규하와 그놈의 애인인지 하는 꼬맹이.”
『아아, 그거.』
일전의 던전에서 인유신을 가까이에서 관측할 수 있었던 고래는 눈꺼풀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공태성은 침묵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고래의 말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에 변동이 생길 것이다.
붉은 살덩이가 뇌리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누구의 심장인가.
현규하인지. 또는 인유신인지. 공태성의 이성은 후자를 원한다. 그게 쉬우니까. 하지만 동시에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죄 없는 그 꼬맹이를, 쉽게 죽일 수 있는가.
고래가 대답했다.
『아니야.』
“아닌가”
『응, 아니야. 왕자님 애인은 ®ÀÇ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철의 시대의 인간이 확실해.』
“그렇군.”
공태성은 실망인지 납득인지 스스로에게도 모호한 감정을 떨어트리며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인유신의 정체를 확인하느라 약간 일탈했으나 계획엔 변함이 없다.
‘아니지. 오히려 성과인가.’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현규하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건, 동시에 약점이라는 뜻일 터이니.
그에 답하듯, 고래가 머릿속으로 전언했다. 흘러드는 속삭임은, 갈망의 구현이다.
『우리에겐 왕자님의 심장이 꼭 필요해.』
현규하의 유일한 약점 인유신이, 얼마나 큰 약점이 될 것인가. 어디까지 내놓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재산. 명예. 지위. 능력. 팔 하나. 눈 하나. 다리 하나.
혹은 목숨. 심장.
기왕이면 쉽게 진행할 수 있도록 현규하가 진심인 방향이 좋으리라. 공태성의 머릿속에서 인유신은, 이제 한 손에 햄스터 대신 현규하의 심장을 저울질하듯 올려놓고 있었다.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도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준비하느라 바빴다.
“8세야, 이 옷 어때”
“꾸이잉.”
어쩌면 조만간에 ‘왈왈’이라거나 ‘에옹에옹’ 하고 울지도 모르는 8세는 희한한 울음소리로 대답했다. 기니피그 소리 같기도 하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8세]
[현재 상태 기쁨. 안정. 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