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옆의 카페에 들렀다.
교복 인유신을 득템한 현규하의 기분이 던전에서 귀속 아티팩트를 획득한 헌터처럼 매우 들떠 보였다. 덤을 얻을 수도 있을 듯하다. 박승기는 손바닥을 비비며 거래를 시도했다.
“흐흐흐, 헌터님.”
“유신 씨 친구인데 언제까지 경칭 쓸 건가요. 편하게 형이라고 해요.”
들뜬 게 확실했다. 지금까지는 헌터님이라는 경칭을 자연스럽게 받던 그의 태도가 관대해진 걸 보니.
“아이고, 유신이도 아직 말을 편하게 안 하는데 소인이 어찌……!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됐으니 우리는 한 걸음 더 전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자기야.”
자기야. 그 단어 하나에 인유신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고, 박승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님에서 자기야가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거 아니에요”
“……그것도 그렇네요. 취소하겠습니다, 주인님.”
인유신이 뭐가 다른 사람 앞에서 듣기에 덜 창피한지 고민하는 사이에, 박승기는 은근슬쩍 덤을 부탁했다.
“이전에 공략하신 던전에서 기억에 남는 건 없으세요 기왕이면 그, 지난번에 형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신이나 종교의 영향이 큰 세계로요.”
“음……. 뭐가 있지.”
들뜬 현규하는 과연 단칼에 거절하는 대신 얘기를 시작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공략했던 던전이 있는데요.”
“앗, 녹음해도 될까요”
“하지 말라고 해도 박승기 씨는 몰래 녹음할 거 같은 사람이던데요.”
“흐헤헤, 들켰네요.”
이인칭도 그쪽에서 박승기 씨로 격상됐다. 솔직히 이름도 모르는 줄 알았다.
어쨌든 허락을 얻었으니 박승기는 녹음 어플을 켰고 현규하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진정한 인유신도 요거트 스무디를 홀짝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신화였어요. 유명한 얘기라서 알 텐데, 파리스의 심판이요. 파리스가 버려지던 신탁부터 세 명의 신들 앞에서 황금 사과를 선택하게 된 시간까지요.”
“오, 그럼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는 장면도 옛날에 그 장면 그린 화가들도 많은데 던전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겠죠”
“아뇨. 그냥 파리스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내미는 장면에서 끝났어요. 그 세계에서 어떤 신에게 황금 사과를 줬는지는 알 수 없죠.”
아예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거나, 그리스가 아닌 트로이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세계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무심결에 상상을 이어 가던 인유신은 한숨을 삼켰다. 상상만으로도 흥미로운데 직접 무수한 세계를 목격하며 겪었을 현소라가 매료되는 건 불가항력이었을지도. 그게 자식을 버릴 이유는 되지 못할 테지만, 인유신은 그보다 더 사소한 이유로도 제 자식을 버리는 부모들을 보육원에서 아주 많이 보았다.
그의 상념을 알 리 없는 박승기는 마냥 흥미로워하는 기색을 비쳤다.
“보스 몬스터는요”
“이명은 까먹었는데, 황금 사과가 나오던데요.”
“사과요 사과가 어떻게 몬스터가……”
현규하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빛나고, 작고, 빠르고, 존나 많았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황금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사과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데 하늘을 빠르게 날아다니기까지 했다. 그중에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제한 시간 안에 진짜를 찾아야 한다는 거였다. 빛나다 못해 눈이 부셔서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건드리면 대폭발하는 가짜를 피해.
별로 자랑하는 기색도 아닌 태도로 현규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니까 그냥 눈 감고도 전부를 쓸어버리면서 잡았지, 다른 헌터들이었다면 고생했을걸요.”
“좀 졸렬한 던전이네요.”
“파리스가 전쟁터에서는 졸렬했잖아요.”
가만히 듣던 인유신은 문득 걱정되어 물었다.
“그 던전에서는 히든 보스가 세 신들 중 하나였어요 그, 허신이요.”
허신 아타베이라를 사냥할 때처럼 중상을 입은 건 아니었는지 염려되었는데, 다행히 그는 고개를 저었다.
“히든 보스 없이 던전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신격은 아무리 허신이라도 그리 쉽게 히든 보스로 현현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마 히든 보스가 나왔다고 해도 파리스 본인이 아니었을까요 1페이즈는 목동 파리스, 2페이즈는 왕자 파리스였으면 사냥할 재미는 있었을 거 같네요.”
“허신이 히든 보스로 나오는 건 겁나 희귀한 사례인데……. 이쪽 잘 모르는 네가 그 얘기를 꺼내는 걸 보면 설마……”
박승기는 심장이 터질 거 같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점심시간이 끝났다.
다음에 꼭 얘기해 달라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기세인 박승기를 돌려보내고 두 사람은 청사로 천천히 돌아왔다.
“승기가 얘기해 달라고 하면 결정석이 변한 건 빼고 말할게요.”
“나한테 굳이 허락 구하지 않아도 돼요. 인터뷰로 떠들든 책을 내든 유신 씨 마음대로 해요.”
“책 내면 인세는 나눠야 하는 거죠”
“운명공동체로 묶이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군요.”
청사 근처의 식당이어서 바이크 없이 나왔다. 나란히 걸어가며 시시한, 그러나 늘 나누는 한담을 주고받던 현규하가 갑자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유신의 손을 잡는다. 흠칫해서 저도 모르게 빼내려던 손이 꽉 붙들렸다.
힘이 들어간 것 같지만 자신이 정말 빼내려 하면 놓아줄 그를 안다. 인유신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느슨히 힘을 뺐다. 앞을 바라보고 걷던 현규하의 입꼬리가 연한 빛으로 물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며 단단히 부여잡는 손의 안정감을 언제부터 낯설게 느끼지 않게 되었을까.
인유신은 냉장고 옆에 붙여 놓은, 나란히 서서 같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거의 머리 하나는 큰 장신의 남자는 항상 먼저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자연스럽게 시작되었기에, 언제부터 인식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이렇게나 그로 가득하다.
“유신 씨, 우리 토요일에 비번이죠”
맞잡은 손이 앞뒤로 가볍게 흔들렸다. 머리를 기울여 눈 맞춤을 한 현규하가 입술을 움직였다. 예쁜 입술이었다. 당연히 고등학생 때의 자신보다 더 예쁜 입술일 거다.
“데이트해요. 플랜을 짜 봤는데 낮에 점심 먹고, 쇼핑하러 갔다가 저녁까지 먹고, 심야 영화를 보는 건 어때요 유신 씨와 영화 한 편을 같이 본 적도 없다니 슬프네요.”
“제 체력이 일정을 다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운동합시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어떤 영화요”
“아무거나 좋아요. 목적은 어둑한 분위기니까.”
퍼뜩 경계심이 올라왔다.
“……영화관에서 뭐 하실 건데요”
“허벅지만 만질게요.”
“안 되는데요!”
“왜요.”
“안 되니까요!”
“그럼 공평하게 해요. 유신 씨도 내 허벅지 만지면 되잖아요. 참고로 나는 보통 왼쪽으로 수납합니다.”
알고 싶지 않았던 TMI였다.
현규하가 제 허벅지를 만지는 것보다, 제 손이 그의 왼쪽 허벅지에 있는 그……걸 만지게 되는 게 더 무서웠다. 엉덩이로 그……걸 눌러 버렸던 과거의 감각이 오싹하게 되살아났다. 인유신의 절박한 항의 끝에 두 사람은 영화관에서 손만 잡기로 타협했고, 현규하의 어깨는 아래로 축 처졌다.
대놓고 보란 듯이 온종일 기운 없이 시무룩한 그를 외면하느라, 인유신은 무슨 쇼핑인지 묻는 걸 깜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