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씻고, 6세와 8세의 사료를 챙겨 준 다음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침까지 먹을 시간은 없어서 도중에 동네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사 왔다. 현규하가 아니었으면 정말 지각할 뻔했다. 오늘의 큰일이라고 해 봤자 겨우 이것이었다.
어제 한나절 동안 온갖 일을 다 겪어서 그런지 오늘의 평화로움이 몹시 낯설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에 돌발 게이트가 열리거나, 뭔가의 저주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거 같은 느낌인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하다. 기상청에서 예보한 비도 1시간 만에 그쳤다.
조기 퇴근하느라 어제 미처 완료하지 못했던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이 사무실에서도 옆자리인 김지연이 슬쩍 물었다.
“어제 헌터님이 입으셨던 햄스터 잠옷 말이에요. 어디서 사셨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아, 그거 따로 주문 제작한 거라고 했어요. 잠깐만요, 물어볼게요.”
인유신은 회의실에서 인터뷰 촬영을 하고 있을 현규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본래 디지털소통팀에서는 라이브 종료 후에 방송 영상을 업로드하려 했었다. 마지막 어그로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물론 그래 봤자 이미 현규하 팬들이 딴 영상 덕분에 문제의 그 장면도 짤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디지털소통팀은 애써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며 대본대로 읽으면서 홍보하는 인터뷰 영상을 따로 촬영하기로 했다. 월요일에 공개할 던전 연수 영상에 붙여 넣어 어그로를 조금이라도 무마하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촬영 중의 휴식 시간인지, 아니면 촬영을 무시했는지 모르지만 현규하는 바로 답신을 보냈다.
“고맙습니다. 잠옷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사려고 찾아봤는데 영 안 나오더라구요.”
“개인 주문을 하면 너무 비싸지 않을까요”
“공구하면 단가 내려갈 테니까 괜찮아요.”
햄스터 잠옷이라면 기성품들도 있을 텐데 공구까지 하면서 살 사람이 많은 걸까 인유신은 의아했지만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더 묻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현규하가 기다리던 레어템을 가지고 온 박승기와 만나 같이 식사를 했다. 거래처에 충실한 서비스를 하는 그는 약속했던 어린 시절 인유신의 사진을 따로 인화한 뒤 파일도 USB에 담아서 건네주었다.
친구 커플과 시간을 보내는 걸 반기는 이는 드물 테지만, 박승기는 개의치 않았다. 랭커 헌터의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올 수 있다면 친구 커플의 머슴도 될 수 있는 준비된 대학원생이었다.
‘나한테 없는 사진도 왜 이 자식이 다 갖고 있지’
인유신이 어이없어하는 사이에도 현규하는 빨려들 듯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는 이미 뒷전이어서 두 입밖에 먹지 않은 리소토는 이미 식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고작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진으로 보니 무척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인유신은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 시절의 제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은근히 따돌림당했으니까 학교에서는 딱히 좋은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거 같아.’
귀가하면 친형제 같은 보육원의 아이들이나 아버지처럼 따스하게 맞아 주던 스님들이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그는 파양의 기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그나저나 사진에 꽂힌 현규하의 고개가 올라올 생각을 안 했다.
“규하 씨, 식사는 안 하세요”
대답하는 것마저 잊고 파묻힐 것처럼 사진만 보던 현규하는 두 사람이 접시를 다 비웠을 무렵에야 시선을 올렸다. 눈동자가 마주친 인유신은 흠칫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색이 옅은 앰버색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짙게 물든 황홀한 빛이었다.
“교복 이거, 이제 없어요”
“보육원 동생들한테 물려줬어요.”
“아깝다…….”
현규하는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다시 사진을 응시했다.
“최고로 귀여워요……. 이상하다, 진짜 왜 귀엽지 그냥 교복 입은 옛날 사진일 뿐인데……. 10대 시절의 주인님을 상상하니까 귀여워서 죽을 거 같아요……. 걸을 때마다 뽀작뽀작 하는 소리도 날 거 같고, 뽈뽈뽈 다닐 때마다 뒤에서 우유 향기가 날 거 같고, 막…….”
“아니, 그냥 말 안 듣는 사춘기 고딩이었는데요…….”
황홀하게 녹아내린 중얼거림에 인유신은 차츰 민망해졌고, 박승기는 이 과도한 찬양을 못 들은 척해 주었다.
“얼마나 귀엽냐면……. 나보다 더 귀여워요.”
그러나 못 들은 척하던 박승기도 이 말에는 결국 반응하고 말았다.
“그럼 헌터님은 22살의 유신이보다는 본인이 더 귀엽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네.”
“…….”
갈수록 점점 더 뇌절하는 주접에 창피해 죽을 거 같았던 인유신은 그 말에 정신이 좀 돌아왔다. 현규하가 귀여운 건…… 사실이니까.
현규하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사진에서 눈을 뗐다. 남이 보면 사진을 도로 빼앗기는 줄 알 것이다.
“더 어렸을 때 사진은 없어요”
“저희가 휴대폰을 중학생이 되면서 살 수 있었거든요. 그 전에 찍은 사진들은 스님들이 갖고 있으십니다. 바쁘실 텐데 사진 보내달라고 대뜸 연락하기가 좀 그래서요.”
박승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대로 달가사의 스님들을 찾아뵌 지도 꽤 오래되었다. 현규하와 사귀……게 된, 그 추락 사건이 마지막이었으니.
후식으로 나온 젤라토의 스푼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으나, 인유신은 끝내 그에게 ‘같이 보육원에 가서 스님들께 인사를 드리자.’라는 한마디를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박승기는 둘을 보며 왠지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귀는 사이인데 희한하게 담백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현규하가 숨 쉬듯이 추근거리기도 하고 가벼운 스킨십도 드물지 않게 하는 편이었지만,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뭔가 파바박! 하고 튀거나 눈빛이 막막! 그렇거나, 그러지 않나 현 헌터 쪽은 확실히 그런 게 좀, 있는데.’
잘 정리가 되지 않는 감을 다듬던 박승기는 미묘한 위화감의 근원을 깨달았다. 인유신이었다. 현규하의 헛소리도 곧잘 받아 주고, 그에게 휘말려 난감해하면서도 그걸 또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지만, 불투명한 거리감이 있었다. 긴 시간 부대낀 친구가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불투명한,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거리감이.
‘불알친구 앞이라고 유신이 놈이 빼고 있는 건가.’
모솔의 첫 연애이니 서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인유신은……. 14년 전, 인유신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린 박승기는 낮은 신음을 눌렀다.
친부모에게는 버림받고, 양부모가 저를 구하느라 사고를 당한 데다가 파양까지 두 번 연이어 겪은 꼬마는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퍽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사정을 몰랐을 때는 박승기도 같은 고아 주제에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며 화도 내고 싸우기도 했을 정도였다.
더 어렸을 때의 사진을 가지고 오지 않은 건 그 탓이었다. 울적한 세상 안에서 문을 굳게 닫아건 채 스스로 고립되었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이의 얼굴은, 인유신이 직접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사람과 가까워지는 걸 어려워하는 인유신이니 연애도 비슷한 속도로 나아가지 않을까. 박승기는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의 불투명한 거리감을 보며, 현규하가 친구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