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214)

인유신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상에 있으면 위험하다며 현규하가 하늘로 띄운 바람에 햄스터 잠옷과 나란히 노출되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거리가 멀어서 얼굴은 잘 숨길 수 있었으니까……. 옆에 대낮부터 햄스터 잠옷을 입고 설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라는 걸 아무도 모르면 덜 쪽팔릴 테니까…….

[남친은 입었는데 니는 왜 커플 잠옷 안 입음]

박승기의 문자에 표정으로 욕하는 이모티콘만 보냈다. 이 자식은 대학원생 주제에 인터넷 이슈에 왜 이렇게 빠삭한 거지

그의 쪽팔림과는 별개로 현규하는 “던전 밖에서는 사냥할 때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귀찮아요.”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마수들을 싹 쓸었다. 추가 인력이 도착하기 전에 현장은 거의 정리되었고 두 사람은 청사로 돌아왔다.

햄스터 잠옷이 활보하고 다니는 꼴을 목격한 김 과장은 이마를 싸매며 조기 퇴근을 허락해 주었다. 어쩐지 현규하가 공무 헌터가 된 이래 그녀의 주름살이 더 늘어난 거 같았다.

데이트를 만끽한 현규하는 옥탑방까지 날아서 바래다주었다. 그나마 안심되는 일이었다.

“이 옷이 보기보다 통기성도 좋고 폭신폭신해서 좋네요. 방수 기능 추가해서 평상복으로 입고 다닐까 봐요.”

“그치만 잠옷이잖아요.”

“잠옷을 집에서만 입어야 한다는 건 편협한 편견입니다. 주인님이 공정한 시야를 가졌으면 좋겠군요.”

“사회적 약속인데요……!”

“사회적 약속보다 햄스터 잠옷을 입은 내가 더 귀여우니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 그래도 안 되죠!”

현규하가 기겁한 인유신을 안고 옥탑방 앞에 내려섰다. 새삼스럽지만 자취방이 옥탑방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주민들의 눈치를 볼 것 없이 하늘을 날아서 들락날락하는 건 꽤 편했다.

무척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일찍 퇴근했는데도 야근을 한 것처럼 기력 없이 축 처졌다.

‘그래도 좀만 있으면 저녁때니까 식사는 같이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막 입을 열었는데, 현규하가 먼저 말을 붙였다.

“이만 돌아갈 테니까 오늘은 푹 쉬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그보다……. 오늘 나 어땠어요”

뒤집어쓴 후드의 햄스터 귀가 아래위로 파닥파닥 흔들렸다. 귀엽다.

“귀엽…… 아, 아니! 그냥, 평소의 규하 씨였는데요”

당당한 헛소리도 하고, 자신을 놀려먹으면서 만족감도 느끼며, 가끔 섹드립도 치는, 그냥 평소의 현규하. 그 현규하가 시선을 맞추며 무심한 입매를 부드럽게 물들였다. 인유신만이 볼 수 있는 미소다.

“내 진심도 바로 그래요. 유신 씨가 보던 평소의 나였어요.”

과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어제와 같은 오늘의, 평범한 진심.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현규하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키스해도 돼요”

귓전으로 나직이 흘러드는 음성은 익숙한 그의 것인데도, 듣고 나니 어쩐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음성이 젖어 드는 귓불의 솜털이 오소소 일어나는 것만 같다.

현규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비껴드는 오후의 햇살을 가리자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혀는 조금만 넣을게요.”

아예 안 넣겠다는 애기는 안 하는구나. 인유신은 해도 된다는 말도, 정말 조금만 넣을 거냐는 반문도 할 수가 없어 눈만 질끈 감았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살짝 감고 싶었는데 상당히 웃긴 꼴이 된 거 같다는 생각도 잠시.

느릿한 숨결을 흩어 내는 입술이 닿자 그 생각은 희미하게 녹아 사라져 버렸다. 여린 호흡이 입술을 부드럽게 훔치며 온기를 섞었다. 뭉근하게 섞인 온기에 열이 옮아 붙고, 한순간에 훅 짙어진 농밀한 열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몰캉한 혀가 그의 혓바닥을 긁으며 숨결을 모두 빼앗아 갈 것처럼 거칠게 훑었다. 두근두근하는 심장 박동처럼 완만하게 능선을 오르던 숨이 단번에 가빠진다.

‘조금만 넣겠다고 했으면서……!’

그 억울한 생각이 떠오른 건, 현규하의 팔에 완전히 늘어져서 어깻숨을 헐떡거릴 즈음이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엄지로 닦은 현규하가 그 손을 할짝거리며 씨익 미소했다.

“내일 봐요. 이따 전화할게요.”

현관을 열자, 방 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향기가 그의 귀가를 반겼다.

9.

밤마다 무너지는 도시를 완공하기 위해 왕은 선택해야 했다.

주춧돌 아래에 매장해야 할 산 제물. 인신 공양. 도시를, 세계를 위해 바쳐야 할 제물.

쌍둥이를 바쳐 오롯이 신의 역사(役事)를 빌거나, 형제 중 하나의 부인을 바쳐 신의 가호를 청한 인간이 쌓거나, 또는 무엇도 바치지 않고 오롯이 인간의 의지로서 축성하거나.

왕은 쌍둥이를 선택했다.

스토얀과 스토야. 어린 남매는 왕의 군사들을 피해 세상의 끝까지 도주했다. 끝은 곧 막다름이다. 누이 스토야는 지하의 주춧돌 아래에 파묻혔으며, 오라비 스토얀은 지상의 주춧돌을 짊어졌다.

신들은 제물로 바쳐진 쌍둥이를 기꺼이 거두었다. 지상의 스토얀은 불로불사가 되었으며 지하의 스토야는 명계의 주민이 되었다.

기나긴 세월이 흘러 왕과 왕의 형제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도시는,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다. 스토얀과 스토야는 죽고 살았으며, 살고 죽은 채로 세계를 지탱하는 최후의 주춧돌로 남았다.

쌍둥이는.

그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별 개좆같은 꿈을…….”

깜빡 졸았던 현규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오늘도 옥탑방 지붕 위인지라 아침 햇살이 고스란히 비치는 탓에 더 좆같은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깰 수 있었다.

요즘 자꾸 이런 꿈을 꾸는 원인은 뻔했다.

현규하는 아공간에 대충 던져 놓았던 펜던트를 꺼냈다. 햇살 아래에서 핏빛은 더욱 선연하게 붉다. 눈알을 흡수하게 한 이후 점점 더 재촉하고 있다. 빨리 흩어진 열쇠를 찾고, 문을 열어, 이아드로 오라고. 왕의 자식으로서의 네 의무를 다하라고.

“좆 까라고 해.”

내키는 대로였다면 펜던트를 박살 내도 수백 번은 더 박살 냈으리라. 그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하나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만나…….

불현듯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의 벨 소리가 심념을 휘저었다. 휴대폰을 살 때 지정되어 있었던 초기 세팅에서 하나도 손대지 않은 기본 벨 소리다.

현규하는 숨을 깊게 들이켜며 짜증 나는 생각을 잘라 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펜던트를 도로 아공간 안에 던져 넣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현 헌터, 나예요.

성의 없는 인사에도 민끝녀는 개의치 않았다. 통화를 하기에는 이른 아침이다. 하지만 하루 수면 시간이 3, 4시간에 불과한 그는 새벽녘에도 대체로 깨어 있다.

그걸 알아도 이혜연이나 권성길 같은 지인들은 새벽이나 밤늦게 연락하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민끝녀는 그만한 선인이 아니다. 그녀는 용건이 있으면 시간과 관계없이 전화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독일 출장 중이라서 소식이 늦었어요. 차 상태를 보니 사고가 몇 번이나 난 거 같은데 다치지는 않았어요

“그걸로 다칠 거면 진작 게이트에서 뒈졌겠죠.”

-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안심했는지 민끝녀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낮은 웃음이 섞였다.

- 같은 차 다시 보내 줘요

“됐어요. 주차장에 누나가 준 차 많아요.”

- 갑자기 웬일로 차를 탔어요 바이크에서 자동차로 갈아탄 거라면 우리 회사 모델 한번 할래요 이능부 홍보 영상 기가 막히게 뽑혔던데. 콜

“콜은 무슨.”

현규하는 그녀의 농담을 코웃음으로 받아치며 지붕에 도로 드러누웠다. 햇살이 슬슬 따가워지고 있으니 파라솔을 꺼내서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내에서만 일하느라 피부가 하얀 권성길을 인유신은 미남이라고 평가했다. 아무래도 흰 피부가 취향인 듯했다. 생각이 난 김에 선크림도 꺼내서 발랐다.

“남친한테 구애의 춤을 추느라 옷을 빼입었는데 스포츠카 타는 게 더 폼 날 거 같아서요.”

- 아아, 그 남친 그러고 보니 공가 놈이 인유신 씨 뒷조사를 했던걸요.

현규하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르샤 길드 방향으로 날아가기 직전, 다시 민끝녀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나 바쁜데요.”

- 그놈 조지기 전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죠. 별다른 조사를 한 건 아니고 그냥 신상명세서 정도 열람한 거예요. 따로 사람을 붙이거나 하지는 않았고요.

“흐음.”

현규하는 일단 지붕에 다시 앉았다.

“공태성이 왜 그런 짓을 하죠”

- 글쎄요. 들리는 말로는 공 씨 상태가 좀 안 좋긴 한가 봐요. 가끔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지 않나, 웬 북쪽 사투리 같은 말을 한다고 하질 않나.

“정신 병원에 처넣어요.”

- 아무튼 다음에 공 씨 만나면 단도리, 아니 단속할게요.

“근데 그거 다 누구한테 들은 건데요”

- 준수요. 걔는 아직도 나랑 공 씨가 재결합하길 바라고 있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해 주죠.

“헛된 꿈이군요.”

사적으로는 가까운 관계지만 공적으로는 길드의 라이벌인 사람에게 정보원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공태성의 비서를 떠올렸다.

- 다음에 언제 한 번 짬 내서 인유신 씨랑 같이 식사나 해요.

“유신 씨는 섬세해요. 누나 같은 재벌 3세랑 만나자마자 같이 밥 먹으면 체할 게 뻔하니까 안 됩니다.”

- 아하하……. 그럼 천천히 친해져야겠네요.

전화를 끊었을 때는 사방이 훤했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벌써 거리에 나온 모습이 보인다.

현규하는 그동안 보았던 공태성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인유신에게 인사하고 말을 걸었던 건 자신을 나르샤 길드로 스카우트하려는 떡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따로 조사까지 한 걸 보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마 그런 쪽의 관심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만. 만약 인유신이 자신보다도 훨씬 연상인 그 자식에게 더욱…….

상상만으로도 유기되었다는 오해를 했을 때 같은 고통이 밀려왔기에 현규하는 급히 심호흡을 했다. 좌표를 띄워 본다. 인유신은 여전히 그가 인지하는 영역 안에 있었다.

한숨을 뱉으며 힘없이 지붕에 주저앉았다.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쿵쿵 울린다. 이 같은 감정이 진심이 아닐 리가 있나.

“아, 근데.”

현규하는 불현듯 좌표를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인유신도 깨서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인데 움직이지 않고 너무 한곳에 조용히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졸음이 가득 묻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앓아누운 건 아닌가 했는데 그냥 늦잠을 잔 모양이다.

“오늘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 챙기는 거 잊지 말라고 전화했어요. 자고 있던 거예요”

- 지금 몇 시……. 헉!

외마디 비명이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 저 일단 씻을게요! 이따 봬요! 으아, 왜 알람을 못 들었지

허둥지둥 씻으러 가는 인유신의 기척을 느끼면서, 현규하는 내일부터 모닝콜을 해 줘야 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했다.

그리고 ‘즐겁다.’라는 생각을 한 자신에게 다시금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 불안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들뜨고 유쾌해진다.

삶이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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