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214)
  • 결국 택시를 타고 연구원까지 와야 했던 현규하는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죽다 살아난 인유신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오, 일찍 왔군. 잘 왔네, 잘 왔어.”

    연구원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오는 와중에, 조상필은 정장 현규하에 반응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머릿속의 전구에 불이 켜진 연구자에게는 현규하가 정장을 입든 쫄쫄이를 입든 알 바 없는 문제였고, 8세가 더욱 중요했다.

    “못 보던 파우치로구먼. 재질을 보니 마수의 가죽인가”

    “8세도 여기에 들어가는 거 좋아하더라고요.”

    “흐음, 꽤 흔들릴 텐데 역시 멀미는 하지 않는 모양이군.”

    멀미 생각을 못 했던 인유신은 흠칫해서 8세를 파우치에서 꺼냈다.

    “어지럽지 않았어 괜찮아”

    “뀨잉, 뀽!”

    “저놈 울음소리가 갈수록 귀척질이 심해지는데요.”

    “……찍.”

    조상필은 두 사람과 한 마리를 훈련장으로 안내했다. 다른 팀이 없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너른 훈련장의 한편에는 테이머로 보이는 사람과 연구자들이 마수들과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추었는데도, 조상필의 목소리에서는 기대감이 짙게 전해지고 있었다.

    “8세의 마나 스탯이 A급이라고 했었지”

    “다른 스탯은 C급인데 마나만 A급이에요.”

    “자네는”

    “저는 뭐, F급이요.”

    “그게 요점이야.”

    조상필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나도 자네처럼 F급인데 일반 마수인 예삐 한 마리 계약하는 게 한계거든. 한데 자네는 벌써 두 마리가 아닌가.”

    사실은 세 마, 아니 두 마리와 한 명이다.

    “결정석을 동력으로 삼는 마수와 살아 있는 동물이기에 차이가 나는 게 아닌가 싶더군. 동물이 마수보다 테이밍에 필요한 마나의 소모가 적다는 얘기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자네는 몇 마리까지 테이밍이 가능한가”

    “예전에 세 마리까지는 해 봤는데, 그때 촉이 오더라구요. 다섯 마리까지만 가능할 거 같다고.”

    말을 하다 보니 위화감이 들었다.

    현재 테이밍을 한 개체는 셋인데, 8세를 테이밍을 할 때는 예전과는 달리 마나의 한계치를 느낀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지나간 일이기에 조상필이 환기해 주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8세는 보스 몬스터가 아닌가. 등급이 높은 테이머라도 마나 스탯이 최소 A급이 아니면 테이밍하지 못하는 게 보스 몹이란 말일세. 그만큼 마나의 소모가 막대한데 자네는 F급으로도 테이밍하지 않았나”

    “어, 그러게요……”

    “진작 떠올렸어야 했는데 자그마한 햄스터 모습이라서 지난번에는 미처 생각을 못 했어.”

    “흐음.”

    현규하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8세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박사님의 말은 이놈이 귀여운 척 꾸민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모두를 현혹했다는 뜻이군요.”

    “……그건 너무 과대 해석 같구먼.”

    떠오른 생각을 마구마구 말하느라 옆에 현규하가 있는 걸 깜빡했던 조상필은 헛기침을 하며 본론에 들어갔다.

    “아무튼 8세에게 일종의 마나 증폭기와 유사한 스킬이 있는 게 아닌가 싶더군. 자신의 A급 마나를 자네가 쓸 수 있도록 공유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추론하지 못한 다른 스킬이려나……. 다만 어떻게 최초에 계약이 가능했는지는 의문일세.”

    8세가 누군가의 선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조상필의 가설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쪽이든 8세가 있다면 자네의 마나 수치가 표시되어 있는 것과 달리 F급 이상이라는 게 내 가설이야. 어쩌면 다른 마수나 보스 몹도 계약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보스 몬스터들을 테이밍하는 세계 최초의 F급 테이머도 꿈은 아닌 걸세!”

    “근데 설치류가 보스로 나오는 던전이 또 있을까요”

    “아.”

    8세로 인한 마나의 증폭에만 천착하느라 제일 중요한 걸 깜빡했던 조상필은 허를 찔렸다.

    “다른 능력은……. 없나”

    인유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껏 떠올린 가설이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게 밝혀지자 좌절하는 조상필을 흘려 넘기며 현규하가 말을 툭 던졌다.

    “마나를 활용하는 다른 방법이 또 있잖아요.”

    아공간을 뒤적뒤적한 그는 스크롤을 두 장 꺼냈다.

    “스크롤 랜덤 박스에서 뽑기 실패했던 스크롤인데 버리지 않고 놔두니까 쓸 날이 오긴 오네요.”

    그런 랜덤 박스도 있었구나……. 인유신은 쓸모없는 지식을 넓히면서 스크롤을 받았다.

    “야, 유신 씨 마나를 건드리지 않고 놔두는 것도 가능하지”

    “찍!”

    “스크롤은 그냥 찢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마나를 주입하면서요.”

    스크롤은 무척 고가이기 때문에 직접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인유신은 비싼 스크롤이 낭비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찢었다.

    쪼르르륵.

    수도꼭지를 아주 미약하게 튼 것처럼 허공에서 물이 쪼르륵 흘렀고, 발 앞의 흙이 곧 동전 크기만 하게 젖었다.

    “우와!”

    기껏 소주잔이나 채울까 말까 한 물이었지만 마냥 신기했다. 쪼그리고 앉아 젖은 흙을 꾹꾹 누르니 차가움까지 느껴진다.

    “받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에요”

    “1급수예요.”

    “목마를 때 한 모금 정도는 마실 수 있겠네요.”

    “그럼 스크롤을 한 번 더 사용해 봐요. 이번에는 저놈의 도움을 얻어서.”

    “네!”

    제 능력도 아닌 걸 사용하니 마치 마법을 쓰는 것 같다. 이 맛에 돈 많은 사람들이 스크롤을 박박 찢고 다니나 보다.

    인유신은 두 번째 스크롤을 즐겁게 찢었다. 그리고…….

    쏴아아아!

    폭우가 쏟아졌다. 스크롤을 사용하는 사람이 인유신이기에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현규하의 머리 위로.

    쏴아아아아!

    “…….”

    쏴아아아아아아아! 쏴아아아!

    “…….”

    A등급 마나로 찢은 스크롤은 직경 3미터의 공간에 집중 호우처럼 물을 쏟아부었다. 정성껏 세팅했던 머리가 축축 늘어져 이마를 덮고, 정장의 아이보리색이 물에 흠씬 젖어 연갈색이 되고, 재킷과 베스트 사이로 비치는 드레스 셔츠가 상체에 찰싹 달라붙을 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자네 괜찮나”

    “……규하 씨. 괜찮으세요”

    “……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새벽 4시부터 공들여 준비했던 슈트는 퇴근할 때까지 보존되기는커녕 한나절도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인유신은 젖은 현규하를 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상한 곳에서 성취했다.

    물을 잔뜩 먹어 무겁기만 한 재킷과 베스트를 벗어 팔에 걸친 현규하는 환복하러 터덜터덜 걸어갔다. 흠씬 젖어 살갗에 밀착한 드레스 셔츠와 물이 뚝뚝 떨어지고 흐트러진 머리칼. 여기저기에서 은근슬쩍 휴대폰이 올라왔다. 찰칵찰칵찰칵.

    그 덕분에 현규하의 팬들은 이능부의 정장 현규하 짤에 이어 전략능력연구원의 젖은 현규하 짤까지 하루 만에 쏟아진 떡밥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요약하자면 8세가 필요할 때 자네가 A급 마나를 활용하게끔 도와줄 수 있다는 거로군. 이건 기존의 테이머들에게 없던 새로운 메커니즘일세.”

    “스크롤 같은 템이 너무 비싸서 펑펑 쓰지는 못하겠지만요.”

    “여차할 때 호신용으로는 좋겠지. 현 헌터가 자네를 24시간 내내 경호하는 것도 아니니 말일세. ……그나저나 현 헌터.”

    “네.”

    “자네 정말……. 그 옷밖에 없나”

    슈트를 갖춰 입은 모습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던 연구자를 신경 쓰이게 한다는 위업을 달성한 현규하는 엉덩이의 앙증맞은 꼬리를 사이코키네시스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가 입은 건 침식 게이트에서 선보였던 바로 그 햄스터 잠옷이었다.

    “지금 있는 옷은 유신 씨와 같이 1박 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던 커플 잠옷뿐인데요. 커플 잠옷의 개시를 이렇게 하게 되다니 몹시 속상하네요.”

    그나마도 인유신이 급히 편의점으로 달려가 속옷을 사 오지 않았다면 노팬티가 될 뻔했다.

    “커플 잠옷이 왜 하필……. 아니, 아닐세. 자네에게는 대답을 듣지 않는 게 낫겠군.”

    “내 알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유신 씨뿐이라서 팬티만 입는 건 안 돼요.”

    “벗으라는 말은 아닐세!”

    기어이 조상필까지 기겁하게 한 현규하의 노골적인 말에 인유신은 슬쩍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서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 와중에 햄스터 귀가 솟은 후드까지 쓴 모습이 귀엽다.

    “큼큼. 아무튼 마나의 다른 활용법이 있을지는 천천히 고민해 보도록 하지.”

    더 남아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바로 퇴근하기에는 이르니 청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인유신은 몹시 두려웠다.

    “규하 씨. 존재감 지우는 그 스크롤, 더 있죠”

    다 쓰고 없다며 말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의외로 대답은 조상필이 했다.

    “그 스크롤을 사용한다고 해도 현 헌터의 지금 모습은 못 감춘다네.”

    “네! 어째서요”

    “그야 아무리 존재감을 낮춘다고 해도 한낮의 길거리에서 잠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기 마련이니까. 평범한 파자마라면 덜할지도 모르겠는데 저렇게 튀는 잠옷이니…….”

    “저희 따로 돌아가요.”

    현규하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해했다. 사이코키네시스로 쫑긋 솟아 있던 햄스터 귀까지 아래로 처졌다.

    “당신은 내가 창피해요”

    “오늘은요.”

    “하지만 주인님의 귀엽고 어여쁜 애완쥐니까 사랑으로 견디십시오.”

    “평소에는 잘만 날아다니시면서 왜요!”

    “그야 날아서 청사까지 가면 그만큼 주인님과 데이트할 시간이 줄어드니까요.”

    조상필의 안쓰럽다는 시선을 받으면서 인유신은 어떻게 해서든 현규하와 날아가든가 따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 유신 씨! 지금 현 팀장님이랑 같이 연구원에 있으시죠 곧 재난 문자가 갈 텐데요, 연구원에서 4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던전에서 보스 사냥에 실패하는 바람에 브레이크가 터졌습니다!

    “……!”

    절망한 인유신을 옆구리에 낀 채 현규하는 즐겁게 게이트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날, 현규하 팬들의 앨범 폴더에는 양손에 소총을 한 정씩 들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수를 사냥하는 커다란 햄스터 잠옷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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