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14)
  • 덜커덩, 드륵. 끽.

    번호판이 덜렁거리고 전조등 하나는 박살 나고 사방으로 죽죽 그어진 길고 짧은 흠집으로 너덜너덜해진 차에서, 역시 너덜너덜해진 인유신이 내렸다.

    “흐어어어…….”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거리는 몸이 현규하의 품에 안겼다.

    처음으로 그의 바이크를 탔을 때보다 더 멘탈이 흐물거렸다. 차 안에서도 현규하의 능력으로 보호받았으니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 연신 벌렁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8세는 벌써 기절해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건 쉽게 익히면서 왜……. 운전만…….”

    “주인님이 옆에 타고 있으니까 흥분돼서요.”

    인유신도 다른 의미로는 엄청나게 흥분된 거 같긴 했다.

    완전히 탈력한 인유신은 걸을 의지를 상실하고 축 늘어졌으며 현규하는 즐겁게 그를 옆구리에 끼고 사무실로 걸어갔다. 평소에는 그의 옆구리에서 대롱거렸지만, 오늘의 묘사는 흐느적흐느적이다.

    어떤 연예인보다도 더욱 연예인 같은 개연성 가득한 미모가 이능부 청사를 활보하고 다니는 거에 공무원들도 익숙해졌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마치 그가 처음 이능부를 방문했던 날처럼 “헉!”, “와.”, “미친.”, “대박.” 같은 감탄사가 곳곳에서 들렸다. 옆구리에 인유신이 끼어 있다는 거엔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유신이 왔…… 헐.”

    심지어 이능부에서 현규하와 알고 지낸 기간이 제일 긴 이혜연마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유신이 생일이야 사귄 기념일 아니면 유신이가 각성한 기념일 둘이 처음 만난 날”

    줄줄이 의문을 달고 나온 단어들이 전부 인유신과 관련된 것이었으니, 과연 현규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다웠다. 현규하도 수긍했다.

    “유신 씨를 위해서니까 비슷하긴 하네요.”

    “국제 행사에 초대되어도 슈트는 죽어라 안 입길래 알레르기라도 있는 줄 알았지.”

    “슈트는 불편한 데다가 준비할 게 너무 많잖아요. 기본적인 옷은 그렇다 쳐도 가터도 아래위에 한 쌍씩 해야 하지, 몸에 조이는 핏도 제대로 봐야 하지, 칼라 바에 넥타이핀, 커프 링크스, 행커치프나 부토니에르, 손목시계에 머리도 넘겨야 하고. 넥타이도 매는 방법이 많고. 화장도 하려다가 피부가 잡티 없이 매끄럽고 광이 나길래 안 했어요.”

    이혜연만이 아니라 슈트 입은 현규하를 목격하고 술렁거리던 사무실 직원 모두의 머릿속에 동일한 생각이 떠올랐다. 출근할 때 입는 양복으로 누가 저런 걸 다 챙기지

    그냥 업무용의 슈트를 편하게 입고 온 남자 직원들은 제풀에 찔려서 슬쩍 몸을 가렸다.

    “네 말 들으니 우리 남편한테 넥타이핀이라도 하나 새로 사 줘야 할 거 같네……. 근데 유신아, 너는 꼴이 왜 그러냐”

    현규하의 옆구리에서 해방된 인유신은 흐물텅거리며 책상에 엎어졌다. 기절한 8세도 파우치에서 꺼내 손수건을 덮어 주었다.

    “멀미요…….”

    정장 현규하를 목격하고 벌어진 입을 그제야 수습한 송찬영이 얼른 힐을 해 주었다. 덕분에 기력이 돌아온 인유신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누님은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어어. 성길이랑 이따 밖에서 만나기로 해서 사무실에서 시간 좀 때우다가 가려고.”

    밤샘 근무를 하고도 또 약속을 잡을 기력이 있다니 상위 랭커 헌터의 체력은 경이로웠다. 자신에게도 저만한 체력이 있었다면 아무리 현규하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고 해도 덜 후들거렸을 텐데.

    ‘역시 답은 운동…… 헉! 아니야.’

    인유신은 머릿속에 떠오른 삿된 단어를 후다닥 지웠다.

    “규하야.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냐 말로 하면 안 믿을 테니까 성길이한테 보여 주려고.”

    “맘대로 해요.”

    “아, 헌터님. 저도 한 장만…….”

    “저도…….”

    그녀의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슬쩍슬쩍 휴대폰을 들었다. 그렇게 임시 포토존이 형성되었다.

    아직 정신머리가 도로 위를 헤매고 있는 인유신은 헌터들 중 셀카를 제일 잘 찍는 송찬영에게 현규하의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책상에 늘어져 있는데 이혜연의 휴대폰이 살짝 보였다.

    “폰 화면에 보이는 게 따님들이에요”

    “큰애가 중학생이야.”

    “우와, 벌써요”

    “나중에 놀러 올래 걔들도 좀 컸다고 아빠랑 엄마 손님 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데 너는 나이 차이 많이 안 나서 반가워할 거 같아.”

    “에이, 따님들한테는 저도 아저씨죠, 뭐.”

    그렇지만 초대해 준 건 기뻐서 얼굴이 연홍색으로 물들었다. 포토존에서 그 말을 엿들은 현규하가 끼어들었다.

    “유신 씨는 초대하면서 나는 왜 무시해요.”

    “엉 너는 오라고 해도 안 왔잖아.”

    “주인님과 나의 관계는 드레스 셔츠와 가터벨트란 말입니다.”

    “……”

    뭔 소리야.

    이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째 쳐도 인유신까지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현규하가 설명을 붙여 주었다.

    “남성용 가터요. 갑갑한데 내가 오늘 입은 거. 유신 씨, 화장실 가서 보여 줄 테니까 구경할래요”

    “바늘과 실 같은 관계라는 뜻 같아요.”

    그제야 이해한 인유신이 구경하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며 설명하자, 이혜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런 개떡 같은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듣다니 너희 정말 천생연분이긴 하다. 그래, 둘이 같이 손잡고 놀러 와. 딸내미들이 얼굴을 밝혀서 쟤는 좋아하거든.”

    “꼭이요. 아, 맞다. 얼굴이라 하시니 아까 말하려던 게 생각났는데, 첫째 딸이 아빠 닮으면 잘 산다고 하잖아요. 큰애가 형님 쏙 빼닮았어요.”

    “걔 어렸을 때 아빠 닮았단 얘기하면 엄청 울었어.”

    좋게 말하면 개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산도둑 같은 용모의 권성길을 떠올린 송찬영이 피식 웃었다.

    “권 장인님은 선이 강한 인상이셔서 그랬나 봐요.”

    하지만 인유신은 정색했다.

    “아니, 형님처럼 중후하고 무게 잡힌 고전적 미남이 어디에 있다고요.”

    “……내가 한창 연애하느라 콩깍지가 씌었을 때도 차마 성길이 얼굴 칭찬은 친구들한테도 못 했는데 말이야.”

    현규하의 눈썹이 예민하게 치솟았으나, 다행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대화의 맥을 끊었다.

    “안녕하…….”

    활달하게 인사하며 문을 연 김지연은 포토존의 현규하를 영접하고, 그 자리에서 우뚝 정지했다. 멍하게 풀어진 얼굴이 이윽고 하얗게 질리고, 다시 벌게졌다가, 하얗게 변하더니 곧 그녀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헉. 주무관님!”

    다른 사람이 쓰러지든 말든 알 바가 아닌 현규하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인유신의 한마디에 바로 사이코키네시스로 그녀를 부축했다.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은 김지연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는 지금 죽어도 좋아요…….”

    “다음에 또 규하가 슈트 입고 올지도 모르는데 벌써 죽으면 안 되죠. 주무관님도 빨리 사진 찍으세요.”

    이혜연의 친절한 말에 사진 찍을 멘탈을 회복한 김지연도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죽더라도 사진과 영상은 찍고 죽어야 했다. 그녀는 바로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36개월 할부로 고화소 최신형 휴대폰을 산 것이었다.

    정장 현규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홍보에 목숨 건 디지털소통팀의 귀에도 들어갔다. 즉각 오하나가 파견되었다.

    “헌터님! 현 헌터님……!”

    “왜요, 또 브이로그 거기는 무슨 맨날 브이로그 찍는 부서야”

    현규하는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건성으로 대꾸했지만 오하나는 굴하지 않았다.

    “저희 팀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브이로그도 좋지만 오늘 헌터님의 이 멋진 모습이 금방 인터넷에 퍼질 테니까, 마침 다음 주 월요일에 던전 연수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기도 하니, 그 전에 주목도를 확 끌어오는…….”

    “그래서 결론이 뭔데요.”

    “라이브 방송, 안 될까요”

    “기각.”

    “힝.”

    칼같이 잘라 내면서도 현규하는 인유신을 바라보았고, 얘기를 듣던 직원들도 컨트롤 타워를 힐끔거렸다.

    “……”

    서류 작성을 하고 있던 인유신은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디소팀에서 라방을 찍고 싶다고 하는데요, 보고 싶어요”

    “방송 안 해도 규하 씨 맨날 보는데…….”

    오하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지만 정장 입은 헌터님의 영상과 사진을 영원히 박제해서 보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요! ……물론 유신 씨는 정장 입은 헌터님도 맨날 보시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확실히 그랬다.

    인유신이 솔깃해하는 눈치이자 현규하도 어깨를 으쓱했다.

    “방송 내용은 뭔데요 명색이 공공 기관인데 나랑 내내 수다나 떨 건 아니잖아요.”

    “일단 헌터님께 허락부터 받아 오라고 팀장님이 말씀하셔서……. 고려하는 콘셉트가 있으시다면 제가 꼭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팀장님도 어지간하면 오케이 하실 거예요.”

    “없는데요. 주인님과의 커플 썰을 풀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앗, 그건 정말 반응이 폭발적일 거 같긴 해요.”

    다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오하나는 혹시 뭐 의견 있냐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얘기에 딱히 뭔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손 하나가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인유신이었다.

    “던전 연수 영상이 공개되는 게 월요일이라고 하셨죠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연수랑 관련해서 뭘, 좀 이렇게 홍보하는 거 어떨까요”

    “오오! 좋은 생각이에요! 바로 팀장님께 보고하러 갈게요! 참, 그 전에 헌터님,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라방 전에 예고편 올리려고요.”

    “포즈까지 요구하는 건 아니겠죠”

    “아뇨, 아뇨. 그대로 있으시면 돼요. 장갑만 벗어 주시고요!”

    오하나는 얼굴이 아니라,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현규하의 다리 사진을 찍어 갔다.

    그로부터 10분 뒤.

    - 이능부 최초! 라이브 방송이 10시 30분부터 진행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수줍게 미소하는 이모지)

    ……라는 내용이 정장 바짓단 아래로 복숭아뼈가 살짝 보이는 발목과 구두를 찍은 사진, 그리고 무릎에 가지런히 얹은 손 사진과 함께 인스타 스토리로 공개되었다.

    현규하가 공무 헌터가 된 뒤 이능부의 SNS에 올라온 사진은 셀카 한 장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언제나 떡밥에 굶주려 있는 현규하의 팬들은 소속사를 구독하는 심리로 이능부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다.

    - 야 이능부 인스스에 올라온 거 봤냐

    우리 애 기대해도 되는 부분

    └길고 예쁜 걸 보니 저 손 규하 손 맞음 아무튼 그러함

    └너무 기대는 하지 마셈. 규하는 재킷 말고 다른 옷 입은 역사가 없다.....

    └└왜구래ㅠㅠㅠㅠ남친이 입으라고 햇을 수도 있자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인멘인멘

    └└ㅋㅋㅋㅋ새삼 하는 말인데 뀨랑 그 재킷 진짜 물아일체 같애. 잘 어울리긴 하는데 그래도 ㅅㅂㅋㅋㅋㅋㅋ협찬 받아서 홍보하는 옷도 그렇게 맨날 입고 다니지는 못하겠다ㅋㅋㅋㅋ

    └└└걍 재킷이 현규하 본체임

    └└└요새 뀨 사진이 좀 풀린다고 배가 불렀네. 라때는 까만색 끄트머리만 봐도 심장이 멎었다고ㅠㅠㅠ

    - 그럼 현뀨 아니면 누구 같아

    남자 사진이니까 최진혁인가 공무 헌터들 잘 몰라서 지금 생각나는게 최진혁뿐인데 또 누구 있지

    └누가 됐든 간에 왜 평일 오전에 라방이냐며... 직장인 울어욧...

    └혜연 언니였으면 좋겠다ㅎㅎ 슈트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행회 태우는 중

    └뻘소린데 모델은 그렇다쳐도 구도가 ㄹㅇ꼴잘알ㅋㅋㅋㅋㅋㅋ규하 븨로그 보면서 예전부터 느꼈는데 이능부에 덕질 짬빠 좀 있는 직원이 있는거 같음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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