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오롯이 홀로 존재한다는 의미라면, 현규하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와 닮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부자간의 유일무이한 공통점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멸망하는 세계를 홀로 지탱하는 왕의 유일한 자식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부여된 의무에 짓눌리던 그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마음을 살펴보는 것도 미숙하다. 그렇게 주변을 헤아릴 시간에, 그는 한 걸음이라도 더 달려가야 했으므로.
14년 전에 겪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은 현규하를 더욱 독선적인 외골수의 길로 이끌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길뿐이다. 죽든가, 이아드로 가는 세계의 통로를 열든가. 그 운명이 얽매고 있었으므로, 현규하는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제, 제가 인질이 대, 대신 될게요.〉
그랬던 현규하는.
스치는 눈빛, 흐르는 숨결, 목소리의 높낮이. 그렇게 드러나는 감정의 편린들을 꿰며 마음을 헤아리고, 깊이 동조하며, 상대의 동요가 저에게 더욱 크게 스며드는 유일한 존재가 생겼다.
인유신만이 권태의 늪에 고요히 가라앉은 감정을 뒤흔든다.
오직 인유신만이, 무의미하게 스쳐 보내던 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현규하는 처음으로 분식집에서 떡볶이도 먹었고, 코인 노래방에도 갔으며, 하잘것없는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죽였고, 던전에서 고기도 구웠고, 텐트 아래에서 숙면도 취했다. 그가 경험하는 모든 최초의 옆에는 언제나 인유신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강제로 주어진 감정 탓인가.
‘그래도 상관없어.’
어머니의 태에 잉태된 것은 아버지를 위해.
이름 석 자조차 아버지를 그리는 어머니의 마음.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현규하였으므로, 강압적으로 주입된 절박한 얽매임이 이제는 기껍다. 비록 시작은 원치 않았을지라도 인유신으로 인한 낯선 경험과, 그에 그의 심장에 번지는 울림은, 오롯한 자신의 것이었기에.
하여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 운명이 영원한 고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소유한 유일한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절 죽이고 싶다는 얘기를 하셨죠. 그게 규하 씨가 저에게 느끼는 진짜 감…….”
버림받은 기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첫걸음을 내딛는 것마저 두려워하는 숨을 삼키며 입술을 머금는다.
보드랍게 열리는 입술을 핥고, 온유하게 젖은 숨결을 담뿍 훔치며.
현규하는 언제부터인지 그를 죽여 이 관계를 끊어 내고 싶었던 제 살의의 흐름 하나가 고요히 잦아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도 이름을 알지 못할 만큼 난해했던 감정이 비로소 선연한 형상을 갖춘다.
[현재 상태 살의. 애정.]
그의 살의는 다시 단 한 사람만을 향한다.
아버지.
낳지 않았어야 할, 내 아버지.
귓가에서 동당거리는 이 울림이 무엇일까. 희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어지럽다.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젖은 그의 입술을 손끝으로 느리게 훔친 현규하가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접으며 미소했다.
“이것까지 가짜 같아요”
뒤늦게 그 말에 흠칫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 허리를 부드럽게 안는다.
“내 심장 소리 느껴 볼래요”
거칠지만 그의 앞에서는 더없이 부드러운 손길이 한 손을 가슴으로 이끈다. 왼쪽 가슴. 그곳에 새겨진 유일한 이름. 살갗과 근육과 뼈의 아래, 주먹만 한 붉은 살덩이. 그 울림.
〈나 이렇게 심장 뛰는 거 태어나서 정말 처음이에요. 만져 볼래요〉
언젠가의 분노가 무색할 정도로, 손바닥까지 저릿하게 울리는 선연한 고동이 인유신의 심장까지 번져 흐른다.
“이마저도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나 정말 슬플 거 같아요.”
“…….”
인유신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혼란이 뒤엉켜 있는 그의 눈동자가 여실한 답이기에, 현규하는 씁쓸한 고소를 삼켰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
“14년 전에, 한때는 친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랐던 남자를 내 손으로 죽였던 적이 있어요.”
혼란에 빠져 있던 눈동자는, 오히려 그 말에는 동요하지 않는다. 그 단단함을 기분 좋게 음미하면서 현규하는 되물었다.
“친아버지 같았던 사람마저 막 죽이는 내가 무섭지 않아요”
“규하 씨가 그런 일을 한 데엔…….”
인유신의 목울대가 잘게 움직였다.
“제가 모르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날 믿으면서 왜 내 감정은 믿지 않죠”
“그건…….”
소리 없이 여닫히던 인유신의 입술이 꼭 다물렸다. 저 입술에 또 키스하면 이번에는 정말 놀라겠지. 현규하는 아쉬움을 누르며 대신 그의 뺨을 안았다. 새삼 놀랍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뺨의 어디에 제 심장을 전율적으로 움켜잡는 온기가 숨어 있는지.
“유신 씨의 말대로 테이밍이 해제되고, 가짜 감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가정해 봐요. 그 모든 게 전부 가짜였으니까 유신 씨와 보냈던 모든 시간들마저 거짓이라고 생각해요 테이밍을 끊는 즉시, 당신과 남과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될까요”
“…….”
“나는 당신과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기쁨을, 분노를, 슬픔을, 즐거움을 느꼈어요. 난생처음으로 갖게 된 충만한 감정들이 추억과 기억이 되어 내 영혼에 새겨졌는데, 이것까지 가짜 같아요”
혼란하게 깜빡거리던 인유신의 시선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모르겠어요.”
“정말 가짜인지 예정대로 테이밍을 해제해서 실험해 봐도 돼요.”
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내저었다.
“그런 실험을 어떻게 해요…….”
정말 착해 빠진 사람 같으니. 나라면 이딴 귀찮은 짓을 강요하는 인간은 실험하기 전에 그냥 죽여 버렸을 텐데. 현규하는 다시금 입술을 삼키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뺨을 안고 있던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목덜미로 내려온 손끝으로 고동이 짚인다.
긴장감과 당혹감, 여러 혼란으로 빠르게 맥동하고 있지만 결코 자신과 같지 않은 속도. 괜찮다. 이 속도를 맞춰 가는 건 제 몫이니까.
“그러면 우리 다른 실험을 해 봐요. 지금까지 위장했던 가짜 연애가 아니라 진짜 연애요.”
“…….”
“연애를 하고, 내 마음을 거듭 확인하고 부딪히는데도, 그래도 가짜 같다면.”
“…….”
현규하는 확신을 담아 인유신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때는 당신 마음대로 우리 관계를 끝내도 돼요.”
그가 아는 인유신이라면 절대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다. 몇 년 같은 몇 분이 흐르고, 현규하는 조심스럽게 호응하는 인유신의 숨결을 다시금 담뿍 맛보았다.
8.
어쩐지 오늘은 주인이 평소와 달랐다.
“꾸우우……”
8세는 케이지 안에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밖을 바라보았다. 주인은 아침 근무를 할 때 언제나 출근 시각에 아슬아슬하게 기상하고는 했다. 듣기로는 왕의 아들이 늘 회사까지 태워 주러 오는 덕에 기상이 더 늦어졌다는 모양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뒤척뒤척하는 것 같던 주인은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나더니 부산을 떨어 댔다. 샤워 시간도 평소의 배는 걸리고, 행어에서 요일별로 하나씩 아무거나 꺼내 입던 옷도 벗었다 입고 또다시 벗었다 입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나…… 바꿔 입어 봐도 거기서 거기 같은데…….”
“삐에에. 삐에.”
뭘 입어도 주인은 멋지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싶었지만 인유신은 다른 의미로 이해했다.
“오늘은 너도 같이 출근할래”
“삑!”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긴 했지만 주인과 동행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8세는 케이지를 기어 나와 쪼르르 뛰어갔고, 인유신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8세를 조몰락거리며 정서적 안정을 되찾았다.
“휴우. 괜찮아, 괜찮아. 늘 보던 규하 씨잖아.”
가짜 연애가 진짜 연애가 되고 키스를 했을 뿐이다. 괜찮다. 괜찮……. 그러다 부딪혀 오던 입술과 혀의 감촉을 떠올린 인유신은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현규하가 드러낸 마음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입술로 느낀 체온의 따스함과 깊게 스며 오던 열기가 마치 진심처럼 생생하여, 자신의 심장까지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드는 것만 같다.
상념에서 겨우 고개를 드니 어느새 출근해야 할 시각이었다. 현규하도 슬슬 집 앞에 도착했을 것이다. 8세를 파우치에 들어가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현관 벨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 규하 씨가 올라왔나 봐.’
인유신은 심호흡을 후아후아 한 뒤에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나가요.”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손이 도어 록을 해제하고 문을 연 순간, 인유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 맺혔다.
먼저 다가온 건 폐부까지 달콤하게 감도는 농밀한 꽃향기. 그다음 시선을 휘어잡은 건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커다란 꽃다발. 부드럽게 귓전으로 흘러드는 그의 음성.
“잘 잤어요”
“……우와아.”
그에 대한 답이 고작 멍한 감탄사뿐이었다는 걸 인유신은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꽃향기가 진짜 좋아요. 근데 웬 꽃다발이에요”
“우리 사귀고 첫 데이트잖아요.”
지금이 출근길이며 회사가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은 현규하에게 딱히 없는 듯하다. 인유신도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조금 싱숭생숭해졌다. 졸업 축하를 명목으로 스님들에게 받았던 꽃다발 이후로는 이게 처음이었다.
“고맙습니다. 잘 말려 놓…….”
양손으로 들어도 묵직한 꽃다발을 안으며 고개를 든 인유신의 입에서 나오던 말이 끝에서 신음처럼 흐려졌다. 입 안만이 아니라 머릿속도 단번에 텅 비어 버렸다. 풍성한 꽃다발에 시야가 가려져서 이제야 보았다.
베스트까지 갖춰진 산뜻한 아이보리색의 스리피스 슈트, 왼쪽 가슴께의 행커치프, 섬세한 장식이 새겨진 칼라 바까지. 늘 되는대로 흐트러져 있던 연한 색조의 머리칼마저 단정하게 빗어 넘긴 현규하가 구둣발로 현관 바닥을 한 번 톡 치며, 날렵한 선이 떨어지는 허리를 숙였다.
“오늘 신경 좀 썼는데 나 어때요”
입까지 벌리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인유신은 그 말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다. 얼굴에서 후광이 비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고, 그의 미모에도 충분히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익숙한 라이딩 재킷이 아닌 것만으로도 새삼 감탄했을 텐데, 날렵한 근육질로 짜인 몸을 감싸는 슈트의 유려한 핏이 입을 틀어막았다.
“쩔어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절망적인 어휘력이었다. 뻐끔거리는 입술에서 겨우 나온 말이 이런 거라니. 그렇지만 그 단순한 뻐끔거림이 현규하의 눈가에 미소를 감돌게 했다.
“최고의 칭찬이네요.”
습관처럼 앞 머리칼을 쓸어 넘기려던 그가 반장갑을 낀 손을 허공에서 멈칫하는 듯하더니 애매하게 도로 내렸다. 갖춰 입은 정장의 포인트가 될 반지가 어설프게 만든 햄스터 모양이어서, 눈앞의 사람이 현규하가 맞는다는 증명을 해 주었다.
그 반지를 보니 비로소 입이 풀렸다. 인유신은 막혔던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는 열기가 올라 화끈거리는 뺨을 꽃다발로 숨겼다. 오늘 현규하에게 어떤 얼굴로 인사하면 될지 고민이었는데, 말문까지 막히는 미모를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장 입으신 거 첨 봐요.”
“나도 처음 입었습니다. 파티나 행사에 초대되어도 그냥 평소 입던 옷이나 대충 걸치고 갔거든요. 이상하지 않다니 안심했어요.”
“이렇게 멋있는데 그동안 왜…….”
“좀 불편해서요.”
현규하가 익숙하지 않은 듯 드레스 셔츠의 커프 링크스를 손가락으로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렸다. 촘촘히 세팅된 다이아몬드도 짭이 아니라 진품이겠지. 거울 앞에서 커프 링크스를 다는 현규하의 모습을 상상해 본 인유신의 머릿속이 잠깐 아찔해졌다.
“그렇지만 주인님이 마음에 들어 하니 앞으로는 매일 입겠습니다.”
“아뇨, 그건 좀…….”
인유신은 심호흡을 했다.
“매일 아침 이 모습을 마주치면 제가 심장 마비로 오래 못 살 거 같아요.”
진지한 대답이었는데, 현규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작게 웃음 지었다. 햄스터 반지가 앙증맞다. 아까는 정장엔 언밸런스한 느낌이었는데 지금 보니 햄스터까지 완벽했다.
“그럼 가끔 입을게요. 구체적으로 유신 씨를 내 얼굴로 공략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라면 괜찮겠죠”
“이미 공략되어 있어서…….”
저 얼굴로 공략한다면 1초도 못 버티고 함락될 게 분명하다고 인유신은 확신했다. 아마 전생에 자신이 왕으로 태어났다면 현규하의 얼굴에 홀려서 나라도 팔아먹지 않았을까
경국지색의 참뜻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아침이었다.
“삐엣!”
꽃향기가 기분 좋은지 8세도 파우치 안에서 즐거운 소리를 냈다.
꽃다발을 식탁에 잘 놔두고 6세에게 인사를 한 뒤 현관을 나왔다. 꽃향기만이 향긋한 줄 알았는데, 은은하게 번지는 향수의 향도 코끝에 부드럽게 감돌았다.
“날마다 향수 바꿀 테니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해요. 그거만 쓸게요.”
인유신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향수는 잘 모르는 데다가 오늘 현규하가 쓴 향도 자극적이지 않고 푸릇한 느낌이 있어 좋았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향수 안 뿌려도 평소, 그……. 좋은 냄새가 나서……. 아, 아니, 규하 씨 취향의 향수로 써도 돼요.”
말하다 보니 어쩐지 뉘앙스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다급히 수습했으나 이미 현규하의 입꼬리가 발긋하게 물든 뒤였다. 향이 훅 가까워지는 듯했다. 허리를 굽힌 현규하가 귓불 언저리의 살갗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목덜미에 콧등을 비볐다.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유신 씨 체향이 더 좋아요. 나한테 묻어났으면 좋겠다, 그죠”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벌게진 목덜미를 문지르는 그에게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인 현규하가 에스코트하듯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요, 주인님.”
모솔의 긴장감은 그와 나란히 걷자 다시금 차올랐다.
수백 번은 오르내린 계단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현규하의 손을 잡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한 방울 맺힌 걸 그에게 들킬 것만 같고, 단차가 높아서 괜히 발을 헛디딜 것만 같고, 난간 밖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다.
맞잡은 손이 장난스럽게 인유신의 손등을 긁어 왔다.
“연애 첫날이라 긴장되면 우리 컨셉질이나 하나 할까요.”
“그게 뭔데요”
“정략결혼한 부부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생각보다 구체적인 콘셉트였다.
“유신 씨는 대대로 햄스터를 길들이는 능력이 있는 북부 대공이고, 나는 정략결혼을 한 영애인 거죠. 결혼하고 그동안은 겉으로만 사이좋은 부부인 척 지내다가 비로소 마음이 통한 거예요.”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처럼 창피한 헛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긴장감은 스르르 녹았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지금은 이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해도 될 것 같았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슈트 입은 규하 씨에게도 조금은 익숙해진 거 같고. 더 놀랄 일은 없을 거야.’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건 집 앞으로 내려오자마자 알았다.
늘 그를 맞이해 주던 바이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오래된 주택가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마수의 부산물을 사용하여 한정 제작한 차인 듯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차도 있었나”
위화감마저 느껴지는 그 풍경에, 마침 출근길을 걷던 동네 주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힐끗거렸다.
인유신은 설마 하며 물었다.
“규하 씨 차예요……”
“갑식이 대신 오늘은 얘 데리고 왔는데 아직 이름은 안 붙였어요. 주인님이 지어 줄래요”
“어음, 어…….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삼돌이 같은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막상 인유신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하긴 슈트 입고 바이크 타면 착장 다 흐트러지겠다.’
방금 뽑아 온 신차라도 되는 것처럼 번드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짙은 진청색 차체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양사 자동차의 엠블럼도 번쩍번쩍한 광택이 난다.
“저번에 규하 씨 집에 놀러 갔을 때는 차를 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주차장까지 데려가서 구경시켜 줄 만한 건 아니니까요.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끝녀 누나가 신차 나오면 깔별로 하나씩 보내 주거든요.”
양사 자동차의 본부장쯤 되는 사람이 현규하의 팬인가 보다. 그나저나 끝녀라니 꽤나 고전적인 이름이었다.
현규하라면 100살이 넘은 할머니도 앞에서 누나라고 부르고도 남을 테니까 끄덕끄덕하던 인유신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양사와 끝녀. 익숙한 조합이다.
“끝녀라는 분, 슬하에 5살짜리 딸이 있지 않으세요……”
“미운 5살이 하나 있죠.”
“남편분과는 이혼하셔서 지금은 혼자 지내시고…….”
“전남편이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었어요.”
“성씨가…….”
“민. 민끝녀.”
“…….”
그가 그동안 알고 있던 재벌 3세 민끝녀는 양사 그룹의 후계자이자 부회장이고, 공태성의 전처였다. 그리고 이제 현규하에게 고가의 차를 턱턱 안겨 주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정보가 추가되었다.
양사는 예전부터 현규하의 서포트를 잘해 주는 대기업으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산하 길드인 안팡으로 스카우트하려는 공적인 관계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 현규하’가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교분이 있었다니. 그것도 강석우가 살해된 14년 전의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인데…….
인유신은 그냥 생각을 포기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포화 상태다. 지인 중에 돈 펑펑 쓰는 재벌 3세가 있으면 현규하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조수석에 타도 돼요”
“내 무릎에 타도 됩니다.”
현규하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이 위로 열리는 차를 실제로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옆자리에 사람 태운 적 없으니까 안심하고요.”
내부를 신기하게 구경하며 차에 탔다. 현규하도 보닛을 빙글 돌아 운전석 쪽의 문을 열었다.
“안전벨트는 내가…….”
현규하의 눈빛에 섭섭함이 서렸으므로 인유신은 얼른 안전벨트를 도로 풀었다. 씨익 웃은 그가 조수석으로 허리를 굽히며 팔을 뻗었다. 향수 냄새가 한결 짙게 흐르고, 마치 포옹을 하는 것처럼 팔이 가까이 머문다.
느슨하게 이완되었던 신경이 심장을 지그시 누른다. 향수에 섞인 숨결이 목덜미를 느리게 쓸었다.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한숨을 입 안에서 짓씹었을 때, 현규하의 손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인유신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뱉어 내지 못한 한숨과 함께 삼켰다.
“그럼 갈게요.”
현규하가 시동을 걸었다. 걸리지 않았다. 시동은 5번 만에 성공했다. 자차도 없고, 차를 얻어 탈 때도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던 인유신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주차한 차를 후진하기 위해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오른손으로 조수석 헤드레스트 뒤를 붙잡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을 뿐이었다. 지금 깨달은 건데, 왼쪽 손목에는 처음 보는 검은색 광택의 손목시계까지 있었다.
뒤로 후진하던 차가 전봇대를 살짝 받았다. 콩. 몸이 약간 덜그럭거렸다.
‘새 차처럼 깔끔했는데 흠집 생겼겠지 아깝다.’
각도를 틀어 길가에서 나온 스포츠카가 앞으로 나아갔다. 끼긱, 덜그럭. 이번에는 주인집 담벼락이었다. 소리를 보니 아주 길게 흔적이 생겼을 거 같다.
“부딪힌 걸로 흠집 났다고 하면 수리비 유 변한테 청구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때라도 이상함을 깨닫고 당장 그가 운전하는 차에서 탈출했어야 했다.
끼이익. 덜그럭. 쿠웅, 쾅. 덜그럭. 야! 운전 좀 똑바로 해! 끼기긱. 덜그럭. 덜그럭. 쾅.
“저기, 규하 씨. 제가 뭐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진짜 진짜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운전…… 오랜만이에요”
현규하가 차창에 비치는 아침 햇살보다 더욱 해맑게 웃었다.
그가 유독 순진한 척 웃을 때치고 좋은 일을 겪었던 적이 없다. 등골에 오싹 불길함이 스몄다.
“면허 따고 처음 운전해 봐요.”
“며, 면허는 언제…….”
“19살요.”
“저 내릴래요.”
인유신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안전벨트를 푸는 것도 깜빡하고 다짜고짜 차 문부터 열려고 했지만 벌써 잠겨 있었다. 시동도 제대로 못 거는 인간이 잠그는 것만 재빨랐다.
“우리, 태어난 날은 각자 다르지만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하지 않았나요”
“안 했어요! 대체 집까지는 어떻게 새 차로 온 건데요!”
“유신 씨 집에 갈 때는 내가 직접 들어서 옮겼죠.”
“그럼 지금도 들어서 날면 되잖아요!”
“첫 운전이라는 아다를 유신 씨와 떼고 싶네요. 나 엄청 부끄럽지만 열심히 할게요.”
“제 의사는요!”
“좋다고요 나도 주인님이 좋아요.”
“사람 살려! 112! 119!”
인유신의 절박한 비명을 배경 음악으로 깐 최고급 스포츠카는 새로 생긴 흠집을 덕지덕지 매달고서 열심히 뒤뚱뒤뚱 달려갔다. 일방통행 골목길을 역주행하며, 지그재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