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망설임 없이 제 목을 걸 것이다.
거듭하여 생각해 봐도, 이것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조 박사님이 그러시던데 이론적으로 테이밍을 해제할 방법은 있대요.”
“괜히 데려갔네요.”
“살아 있다는 전제로 이어진 관계고, 죽음과 동시에 계약이 풀리니까 둘 중의 하나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가사 상태에 빠지면 해제가 가능할 거라고 했어요. 깨어나면 후유증은 다소 있겠지만 천천히 회복하면 된대요.”
“그건…… 일리가 있군요.”
현규하가 턱을 매만지며 수긍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척하며 주섬주섬 말을 이었다.
“당장 해제하자는 건 아니에요. 규하 씨가 뭔가 찾고 있다는 그 일에 도움은 드리고 싶거든요.”
죽음까지 방기하는 현규하의 만성적인 권태감은 그가 찾는 무언가에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을 도와서 현규하가 평생 쫓아온 그것을 손에 넣게 해 준다면 권태감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자신은 그에게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무가치한 약점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때가 되면 규하 씨에게도 저 같은 건 필요가 없을 테니까 테이밍을…….”
“그렇게 해요.”
“해제…….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하며 올려다보았는데,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보는 시선은 변함없이 태연했다.
“주인님이 끝내고 싶다고 하는데 연약한 쥐새끼가 무슨 힘이 있나요. 하고 싶은 대로 끝내요.”
“아, 그게…….”
“뭐, 내가 다 찾을 때까지 억지로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길게 기다릴 것 없이 당장 조 박사님에게 연락하세요.”
쉽게 응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그가 쾌히 응하자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인유신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인유신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사 상태가 되는 건 내가 할게요.”
“예? 그건 당연히 제가 해야죠. 제 고집으로 해제하는 건데 규하 씨에게 거기까지는 요구 못 해요.”
“50미터를 11초에 달리는 몸뚱이보다는 S급인 내가 더 튼튼하지 않겠어요?”
“그, 그것도 그렇긴 한데…….”
난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규하에게 가사 상태까지 요구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인유신은 겨우 다른 핑계를 떠올렸다.
“규하 씨가 테이밍되었다는 것까지 조 박사님이 알게 되잖아요. 이 일에 규하 씨는 끼어들지 않고 저 혼자 박사님을 뵙는 게 맞아요.”
“분명히 말했던 거 같은데.”
“뭘요?”
“나한테 뱀파이어 특질이 있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을 어떻게 했는지. 조 박사님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요.”
여상하게 나온 대화의 한 토막이어서 순간 이해하는 게 늦었다. 뒤늦게 인유신이 흠칫 놀란 얼굴을 하자, 그의 표정을 살핀 현규하가 벤치에 등을 붙이며 기대어 앉았다.
“농담이에요.”
다시 곱씹어도 농담은 아닌 거 같았지만, 일단 수긍했다.
“어쨌든 제가 할게요. 죽이지 않더라도 규하 씨의 비밀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인유신이 그답지 않게 고집을 내세우자 현규하도 곧 순순히 받아들였다.
“내가 언제 주인님 말 거역한 적이 있나요.”
“……근데 진짜 당장 해제해도 괜찮으신 거예요?”
“네에.”
그 말과 함께 현규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몇 시간 전 옥탑방에 데리러 왔을 때처럼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주인님이 하고 싶어 했던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으니까 집에 가요.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부터 먹을까요?”
* * *
봉안당을 나와 정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라볶이에 밥까지 싹싹 볶아 먹고 커피도 맛있게 마신 뒤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트로트밖에 모르는 현규하와 노래를 부르고, 옥탑방으로 귀가했을 때는 어둑한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옥탑방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돌아가던 현규하가 옥상까지 날아서 데려다주었다.
“주말에 던전 다녀온 피로가 덜 가셨을 거 같아서 오늘은 옮겨 주었지만 평소에도 계단을 부지런하게 오르도록 하세요. 계단 올라가는 건 좋은 운동입니다. 3층 높이밖에 안 된다는 게 아쉽네요. 엘리베이터가 없으니까 내려갈 때는 무릎 조심하고요.”
운동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인유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봉안당에 다녀온 것만 제외하면 오늘도 평소에 만나서 외출할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냈다. 즉, 데이트였다.
……어째서 데이트가 가능한 거지? 테이밍을 해제하자는 말을 꺼낸 직후에?
‘규하 씨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버리지 말라고 매달렸던 사람의 반응이라기엔 너무 담백하고 쿨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었다.
상태창으로 현규하의 감정을 읽으면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이밍까지 끝내겠다는 상황에서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의 상태창을 훔쳐보는 건 옳지 않은 일 같았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면서 기색을 살피자 현규하가 재미있다는 듯이 자신도 시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픽 웃었다.
“할 말이 매우 많은 표정이로군요.”
“무슨 생각이신지 물어봐도 되나요?”
“번거롭게 대답으로 들을 필요가 있나요. 상태창에 내가 무슨 감정 느끼는지 뜨잖아요. 그거 보면 되겠네.”
“……알고 있으셨어요?”
현규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테이머들이 마수들의 감정을 파악한다는 건 비밀도 아니던데요.”
당신의 감정이 다 뜬다는 설명을 하기가 뭣하여 그간 말하지 못한 바람에, 본의 아니게 숨기는 꼴이 되었다. 인유신은 머쓱하여 목뒤를 긁었다.
“죄송해요.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좀 기분 나쁘시죠?”
“다른 사람이 읽었다면 척추를 친절하게 뽑아 줬을 텐데 유신 씨라면 괜찮아요. 나는 주인님에게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게 없는 사랑스러운 애완쥐입니다.”
“그럼 조금만 볼게요.”
양해를 구하고 현규하의 상태창을 슬쩍 본 인유신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손등으로 마구마구 비빈 뒤에 다시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왜 이런 게 나오지?
[현재 상태 : 살의. ??. 기대감.]
앞의 두 개는 근래 디폴트였으니 그렇다 쳐도, 기대감? 기대감이라니?
순간 혼란스러웠으나 인유신은 곧 납득할 만한 이유를 스스로 찾아냈다.
‘규하 씨도 날 죽이면서까지 계약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잖아. 기대감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는데도 불현듯 가슴 한쪽을 나달나달하게 흔드는 허전함이 밀려온다. 현규하가 허리를 굽히며 말없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인유신과 눈을 맞췄다.
“뭐라고 떠요?”
“살의랑 뭔지 모르겠는 물음표랑, 기대감이요.”
“물음표? 그건 또 뭐지?”
혼잣말을 하며 현규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어쨌거나 살의와 기대감이라니 정말 정확하군요. 조 박사님에게 얘기해서 날 잡으면 꼭 나한테 말해 줘야 합니다. 그럼 어서 들어가요. 내일도 출근해야 하잖아요.”
빨리 들어가서 쉬라며 현규하가 손짓했다. 인유신은 꾸벅 인사하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도로 닫고야 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기대감’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마음을 찜찜하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규하다.
자신이 어렵잖게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 감정이 그의 안에 있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저기, 규하 씨.”
“네.”
“뭐가 기대되시는 거예요?”
“그야 주인님과 테이밍이 해제되는 거요.”
“……진짜 그거예요?”
“그럼요.”
그 외에 뭐가 필요하냐는 듯이 현규하의 눈가에 기대감이 빙글 감돌았다.
“테이밍을 해제하면 유신 씨는 이제 내 주인님이 아니고, 나는 더 이상 주인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죠. 가련한 애완쥐는 앞으로 자유예요. 규하 이즈 프리.”
언뜻 듣기로는 대수롭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고 작정한 현규하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걸 익히 겪은 인유신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눈치 안 보고 뭐, 뭘 하실 생각이세요?”
현규하가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우며 왼쪽 눈을 찡끗 윙크했다.
“비밀입니다. 비밀은 남자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죠.”
“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신데…….”
“하하하.”
“규하 씨이…….”
대번에 울상이 되자 그도 결국 애처로운 한숨을 폭 쉬었다.
“마지막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주인님이니까 내가 져 줘야지 어쩌겠어요. 생각하다 보면 구체적으로 다른 방법들이 나오겠지만 지금 떠오른 생각으로는 귀여운 짓과 깜찍한 짓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요?”
“깜찍한 거……?”
“매일매일 옥탑방 앞에 드러누워서 땡깡 부리려고 했어요.”
“왜, 왜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현규하가 수줍게 대답했다.
“테이밍 해제했으니까, 다시 테이밍해야죠.”
“뭘 해요?”
“테이밍.”
“예?”
“테이밍.”
“…….”
“테이밍.”
머릿속이 멍했다.
걱정했던 것처럼 괴악한 행동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한데……. 반응이 쿨했던 이유는 테이밍을 다시 하면 되기 때문이었나? 아니, 그게 잘못된 대응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그래도 뭔가 이건 아닌데…….
혼란스러워진 인유신은 일단 머릿속을 정리하는 걸 접고 다시 물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깜찍한 짓이 나름 순한 맛이었으니 귀여운 짓도 비슷할 거 같았다.
“그, 그럼 귀여운 짓은요?”
“자살 공갈 협박이요.”
“…….”
인유신은 질문하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서 하얀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는 그에게 현규하가 딴에는 친절하게 설명을 붙였다.
“유신 씨는 성품이 선하잖아요. 다시 테이밍하는 걸 원하지 않아도 내가 죽을 거라고 공갈 협박을 하면 들어주지 않을까요? 원만하게 재계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어요.”
자신이 알고 있는 ‘원만함’의 사전적 정의가 현규하가 알고 있는 ‘원만함’과는 다른 의미인 게 분명했다.
“그, 그러다가 규하 씨가 잘못되면요…….”
“죽으면 테이밍을 못 하는데 죽을 리가 있나요. 대동맥만 가볍게 찌를게요.”
“예?! 대동맥을 자르면 진짜 죽잖아요!”
“굳이 자르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시각적으로 그게 더 효율적인 공갈 협박일 거 같긴 하네요.”
“규하 씨!”
“알았어요. 힐러까지 옆에 대기시킨 뒤에 협박할게요.”
“아, 그럼 다쳐도 금방 나을 테니 다행……이 아니라!”
넋이 나가서 현규하의 말에 휘말릴 뻔했던 인유신은 황급히 정신을 수습했다.
“어째서 다시 테이밍을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해가 왜 동쪽에서 뜨냐는 질문을 받은 느낌이군요.”
“테이밍을 하게 되면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게 되는 거잖아요.”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현규하의 눈가에서 비로소 웃음이 걷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