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왜 나한테 떠?
* * *
고래는 커다란 눈을 씀벅거렸다.
왕의 아들의 곁에 있는 낯선 청년. 계약자의 바람과는 달리 왕의 아들과 동류이거나 이아드와 관련이 있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저 청년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세계인 이 철의 시대의 생명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이며, 그리운 내음이 묻어난다.
우르시토아레가 태어난 아이의 운명을 노래하고, 세계를 위한 주춧돌이 된 왕이 대지를 굽어보며, 신의 축복과 성스러운 기적이 현현하는 세계.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 님의 기척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이곳은 신이 떠난 세계. 왕이 지키지 않는 세계.
텅 비어 있는 신허계(神虛界)에 불시착한 고래. 대지를 지탱하는 거대한 네 마리의 물고기 중 하나, 솜노로스는 서러운 시간의 끝에 접한 고향의 내음에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었다.
7.
전투에서 8세의 쓸모없음이 밝혀졌으나, 현규하 외에는 누구도 기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8세의 생활에 변화는 없었다.
“찍!”
주인이 없을 때 멋대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는 게 발각된 8세는 대담해졌다.
오늘도 8세는 6세가 터널에 끼여서 잠을 자는 동안 굴을 파 놓은 베딩이 무너지지 않게 살살 걸어서 목욕통을 정리했다. 6세의 나이가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8세가 옆에서 보살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둘이 같이 “찍! 찌익!” 하며 소리를 주고받는 걸 보면 뭔가 의사소통은 되는 거 같기도 하고.
흐뭇한 눈으로 케이지를 바라보던 인유신은 자신이 현실 도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원래의 고민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왜 길드장님이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게 나한테 메시지로 뜬 거지?’
인유신이 지금까지 귀속 아티팩트와 관련된 시스템의 알림을 본 건 두 번이다. 처음은 현규하. 두 번째는 공태성.
귀속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모든 각성자들의 상태가 시스템에 나오는 건가, 라는 가정이 제일 처음에 떠올랐지만 그건 아니었다. 최진혁이 귀속 아티팩트를 해방했을 때는 잠잠하기만 했으니까. 추기경들이 타락한 시대에 교황이 독을 사용하는 걸 보아서 보르자 가문(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이탈리아의 명문가. 독으로 정적들을 암살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과 관련이 있는 던전에서 획득했나 싶은 생각은 들지만.
‘설마 또 테이밍……?’
두 번째 가정은 몹시도 살 떨리는 내용이었으나 역시 아니었다. 관련한 시스템의 메시지가 나온 적도 없고, 현규하가 귀속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했을 때처럼 환영을 본 적도 없었다. 그의 상태창에 있는 테이밍 목록도 여전히 6세, 7세, 8세 셋뿐이다.
무엇보다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건, 공태성이 귀속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게 이번이 두 번째라는 사실이었다. 침식 게이트에서 목격했을 때는 아무 징조가 없었는데, 두 번째에는 테이밍한 현규하와 유사한 메시지가 나왔다.
인유신은 두 상황의 차이점을 되짚어 보았다.
침식 게이트와 지속 게이트, 그리고 처음에는 없던 8세의 존재.
“혹시 네가 원인인 거야?”
“뀨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8세가 솜털이 보송보송한 작은 얼굴을 갸웃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귀여움이었다.
“에구, 모르겠다.”
주말부터 계속 고민해 봤지만 명확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정말 8세 때문인지 확인하려면 8세를 집에 두고 가서 귀속 아티팩트를 해방해 보라는 부탁을 해야겠지. 그렇지만 공태성이 그런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테이밍을 한 게 아니라 귀속 아티팩트 알림만 뜨는 거라면 해가 될 거 같지도 않았고.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아.’
현규하라는 얄팍한 끈이 아니면 공태성과 더 이상 엮일 일도 없을 터였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S급 헌터들과 그날그날 살아가는 평범한 자신. 사람의 목숨에는 차등이 있고, 차등은 곧 삶의 영역이다. 인유신이라는 범상한 개인의 삶은 특별한 그들과 비할 수 없다.
교차하지 못하는 평행선과 다름없는 별개의 삶이 맞물렸던 것 자체가 잠깐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때였다.
케이지를 정돈한 8세가 문을 열고 기어 나왔다.
“이리 올래?”
손바닥으로 도도독 달려드는 8세를 품고 자리에 누운 그는 정말 오랜만에 인유신이 아닌, 김유신이었을 때의 꿈을 꾸었다.
삶에 차등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던 그때를.
* * *
김유신.
직전에 맡게 된 아이의 이름이 유진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떠올린 이름, 유신. 거기에 원장의 성씨인 김. 겨울에 버려진 갓난아기의 이름은 그렇게 붙여졌다.
인근의 공원 화장실에서 몰래 출산한 아이라 추정되었다. 경찰은 부모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임시로 붙었던 김유신은 곧 아이의 이름이 되었다.
아이가 자라난 보육원은 어느 조직이 자금 세탁용으로 위장한 곳이었다. 겉보기에 그럴싸한 후원과 시설을 갖추었으나 원장은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다른 보육원에 비해 훨씬 좋은 환경이라며 자원봉사자들과 교사들은 말했다.
〈유신아, 이리 오렴.〉
몇 번 마주친 일도 없어서 보육원에 걸려 있는 사진이 아니라면 얼굴마저 가물가물했을 원장이 살갑게 불렀다. 아이가 5살이 되던 해였다.
〈이 아이가 우리 보육원에서 제일 얌전하고 착하답니다.〉
입양 조건을 ‘손이 안 가는 어린아이’로 걸었던 어느 중년 부부에게 말하며 원장은 짐짓 상냥한 척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으로 올려 안긴 원장의 무릎이 몹시도 불편하여 아이는 몸을 꼼지락거렸다.
부부는 몇 번 더 보육원을 방문하며 아이를 유심히 관찰했고, 정말 손이 많이 안 가는 어린아이란 걸 확신하자 즉시 입양 서류를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유신이에요.〉
〈어, 그래.〉
그때까지 아이가 부부와 나눈 인사말은 그 두 마디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입양이 결정된 이후 아이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작은 심장은 기대감과 설렘으로 콩닥거렸다. 어떤 분들일까. 나를 좋아해 줄까. 미움받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지.
‘아빠. 엄마.’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부르는 호칭이 허공에 새겨진다. 아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빨개진 얼굴을 감추었다. 아이에게도 이제 아빠와 엄마가 생겼다.
마침내 추유신이 된 날, 아이는 수없이 연습했던 한마디를 수줍게 말했다.
〈아빠. 엄마. 고맙습니다.〉
얼른 말하고 창피해서 눈을 꼭 감았다. 벌써 아빠랑 엄마라고 불렀다고 혼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는 한편으로 무척 기대되었다. 아빠와 엄마가 ‘유신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소리가.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말이 없어 아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앞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멀뚱멀뚱하게 내려다보는 중년 부부가 있었다.
〈얘, 그냥 아저씨랑 아줌마라고 불러. 정들라.〉
한숨처럼 나온 대답이었다. 수줍은 기대감은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아이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네, 아저씨.〉
TV에 나오는 애들은 양손으로 부모의 손을 하나씩 잡고 걸어가던데, 아이는 한 걸음 뒤에서 부부를 따라갔다. 승용차에 올라타고 2시간이나 차를 달리는데도 칭얼거림 한마디 뱉지 못했다.
도착한 집에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자식들이 셋이나 있었다.
〈아빠, 얘 누구야?〉
〈친척집 애인데 잠시 우리 집에서 맡기로 했어.〉
〈아 씨, 나도 이제 고등학생인데 얘 때문에 시끄러워지면 어떡해.〉
〈얌전한 애니까 조용할 거야.〉
아이는 거절당했던 ‘아빠와 엄마’를 그들은 참 쉽게도 내뱉었다.
여섯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살기에 집은 다소 좁았으나, 아이는 보육원에 있을 때보다 깔끔한 옷을 입었고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게 끝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는 바빴으며, 한창 사춘기인 자식들은 아이에게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밖에는 위험한 물건들이 많으니까 방에서 나오면 안 돼. 알겠지?〉
부부가 출근하고 자식들이 학교에 갈 때면, 아이는 혼자 방에 남겨졌다. 잠긴 문 안에서 TV를 보고, 식사를 하고, 딸린 화장실을 사용하고,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고, 동화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그러다 보면 가족 중의 하나는 귀가했다.
보육원에 있을 때보다 좋은 옷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도 아이는 외로웠다.
〈여기 아이용 의자랑 접시 좀 주실래요?〉
〈저거 갖고 싶어?〉
가족끼리 외식하러 중국집에 갔던 저녁. 부부는 아이를 위한 부탁을 따로 했고, 돌아오는 길에 펫 숍의 창문으로 보이는 햄스터를 계속 곁눈질하는 아이에게 물었다. 부부가 베풀어 준 유일한 관심이었다.
[햄스터의 테이밍이 가능합니다.]
[테이밍하시겠습니까?]
[Yes / No]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은 TV며 동화책에서 봤던 멋진 이름들만 줄줄이 붙였다. 작은 방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아이와는 다르게 모험을 떠나고, 요정을 만나고, 친구와 우정을 나누고, 세상을 구하는 멋진 용사와 왕자의 이름. 작은 케이지에 갇혀 있는 햄스터가 자신과는 달리 넓은 세상에서 훨훨 날 수 있길 바랐다.
부부가 아이를 입양한 건 다자녀 특별 공급 분양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하던 청약에 당첨된 부부는 프리미엄을 붙여 불법적으로 판매하고, 해외로 이민을 갔다.
그들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을 때, 아이는 두 번 다시 보는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보육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를 교사들이 뒤늦게 발견했다. 1세는 같이 오지 못했다. 그나마 버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맡긴 것만이 부부가 아이에게 보여 준 최소한의 온정이었다.
아이는 다시 김유신이 되었다.
〈어쩐지 그 인간들 느낌이 쎄하더니.〉
몇 달 만에 돌아온 아이를 본 원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전부였다.
원장은 여전히 원아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입양되는 아이를 부러워했던 다른 원아들은 부모가 버리고 갔다며 심술궂게 놀려 댔다.
아이는 자신이 두 번이나 버려졌다는 걸 알았다.
두 번이나 버려진 아이는 더 외로워졌고, 더 말수가 줄었고, 더 얌전해졌다. 말을 안 들어서 처음부터 날 예뻐하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처음부터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되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