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14)

“실은 요즘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게 있어서요. 누군가에게 기대어서 지루함도 권태도 다 잊는 관계가 마냥 좋기만 한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역시 연애 상담이었군.”

“아, 아, 아닌데요.”

안 그래도 너무 티 나는 말이 아닌가 싶었는데 최진혁도 바로 현규하와의 문제라고 단정 지었다. 다만 그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관계겠지만.

“뭐가 불안한 건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인유신은 머뭇머뭇 입술을 움직였다.

“그냥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잖아요.”

“마음의 의지처를 구할 수 있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니, 평생 지속할 자신이 있는 관계라면 기대어도 좋을 것 같다만. 하지만 벌써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면 평생 이어 갈 자신이 없다는 뜻 아닌가?”

“…….”

“그렇다면 독립해서 혼자 설 준비를 해야지.”

“……그렇겠죠?”

낮아진 목소리를 들은 최진혁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짐짓 가볍게 대답했다.

“현규하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해 주고 싶군. 그놈은 다른 헌터들과는 달리 10대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으니까 본의 아니게 보고 들은 게 많은데, 특별하게 대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현규하는 정말, 사람을 믿지 않거든.”

유일하다는 얘기를 들을수록 어깨가 더욱 처지는 기분이었다.

최진혁에게 인사하고 텐트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현규하가 챙겨 온 매트리스에 팬히터까지 있으니 내부는 후끈후끈했지만, 시리게 젖은 마음의 한기는 통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한 저녁노을 아래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아, 내가 깨웠어요?”

보초를 교대하고 텐트로 돌아온 현규하의 기척에 인유신은 눈을 떴다.

“잠이 안 와서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로 했으니까 얼른 자요. 춥지는 않고요?”

“오히려 더워요.”

“더운 게 낫죠.”

현규하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옆자리에 누웠다. 매트리스 위의 맨바닥이었다.

“규하 씨 침낭은 안 가져오셨어요?”

“던전 안에서는 그냥 노숙만 대충 하다 보니 침낭 같은 걸 쓴 적이 없어서요. 지붕에서도 잘 자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배경에 따라 도시나 마을로 진입하는 던전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지붕이 아니라 건물 안에서 자면 좋을 텐데.

한 팔로 얼굴을 괴고 옆으로 누운 현규하가 낮게 속닥거렸다.

“텐트까지 친 것도 처음이에요. 이것저것 들고 다니는 게 번거로워서 식사는 늘 에너지바로 때웠는데 고기나 마시멜로 같은 걸 구워 먹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고요. 주인님과 다니면서 새로운 경험을 다 해 보네요.”

“……그런 게 귀찮으세요?”

“예전이라면 정말 귀찮았겠지만…….”

어스름이 찾아올 무렵의 흐린 햇살이 텐트를 투과하지 못하여, 내부는 한결 채도가 낮았다. 밝은 아마빛의 머리칼은 염색한 금발처럼, 붉은색을 띤 호박색 눈동자는 갈색처럼.

아버지가 왕이니 하는 혼혈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현규하가 미소했다.

“당신과 같이 겪으니 나쁘지 않네요, 이런 것도.”

그에 인유신은 말할 수 있었다.

“규하 씨, 다음 주 수요일에 저희 비번이잖아요. 저랑 같이 어디 좀 가 주실래요?”

“좋아요.”

현규하는 먼저 승낙한 뒤 목적지를 물었다.

“어디인데요?”

“양부모님을 모신 봉안당이요. 저를 구하고……. 두 분 다 같은 날에 돌아가셨어요.”

그의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보여, 인유신은 안대를 내리며 자는 척했다. 귓가에서 호흡이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하다, 이내 단념처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처럼 가까이에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밤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 * *

이른 아침에 헌터들이 마수들이 리젠된 던전을 한 번 더 쓸고 왔고, 보스는 점심 식사 뒤에 사냥하기로 했다. 클리어된 던전은 리셋 시간이 지나기 전에 계약한 용역 회사에서 마수의 사체 수거하고 채집도 할 것이다.

원래는 공격대와 같이 들어오는 게 보통이지만 현규하가 한마디 했다.

〈각성자들로도 모자라서 인부들 보모 노릇까지 나한테 시킬 셈이에요?〉

이능부 창립 이래, 그리고 먼 미래에도 현규하 같은 상전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담당관은 확신했다.

점심 식사 후의 사냥도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어제만 해도 마수의 주검이나 피비린내 따위에 속이 뒤집히는 표정을 짓던 각성자들도 그럭저럭 적응했다.

[던전에 생존한 마수는 1개체입니다.]

[던전의 마수가 전멸했습니다.]

[던전의 보스 ‘이상 없는 하루’가 나타납니다.]

그랬던 각성자들은 던전 보스의 등장에 헛구역질을 하거나 정말 속을 게워 냈다. 처참한 광경에 익숙한 헌터들도 인상을 찌푸렸으며 인유신도 급히 입을 막았다.

별 반응이 없는 사람은 현규하뿐이었다.

“시체 나올 거 같았는데 정말 시체 맞네.”

“……평범한 시체는 아니지 않나.”

최진혁이 메스꺼워하는 얼굴을 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체가 아니라 좀비의 군체라고 해야 걸맞을 생김새였다. 그것도 전쟁터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처참한 시신의 형상으로.

축을 이루는 건 대포와 폭격기, 기관총 등 당대의 무기였다. 거기에 군체를 이룬 무수한 주검들이 끊임없이 기어오르고, 쏟아지고, 흩어졌다. 팔다리를 잃고,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흐르고, 눈알과 내장이 덜렁거리고, 상체 또는 하체를 상실한 앳된 군인들의 시체가 몰려나왔다.

“강제로 던전에 끌려온 것도 모자라서 좀비 영화까지 찍다니 참 가지가지 하는군.”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공태성이 짜증을 섞으며 칼을 휘둘렀다. 불길이 번지며 눈앞에서 달려들던 10여 구의 주검들이 불탔다.

참혹한 형상이며 수가 많다는 난점이 있을 뿐, 좀비처럼 달려드는 주검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그 뒤에 닥쳐왔다.

“조심하세요! 일종의 독극물 같습니다!”

후방에서 상황을 살피며 대기 중이던 송찬영이 외쳤다.

헌터들에게 썰리고, 찍히고, 베이고, 뚫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조각들로부터 역겨운 시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녹물과 비슷한 색으로 변질된 땅이 끓어오르며 탁한 연기가 번졌다.

동시에 군체의 축을 이루던 대포의 포구며 총구에서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쿠웅! 쾅!

그것들이 격발한 것은 탄알이 아닌 주검으로부터 흐른 부패한 시독(屍毒)이었다.

“으아악!”

시독에 노출된 헌터가 비명을 질렀다. 살갗에 급속도로 끓어오른 벌건 수포들이 터지고 진물이 흐르며 살이 짓무르는 끔찍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썩은 살점에서 금세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현규하가 다급히 인유신을 허공으로 높이 대피시킨 순간, 최진혁을 중심으로 빛살이 번지며 배경을 지워 내듯이 던전의 주변 풍광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 질척하게 녹아 엉기던 땅은 비교적 단단하고 고른 골목길로, 우거진 자작나무 숲은 골목을 빡빡하게 메운 건물들로, 서쪽으로 넘어가던 태양은 달도 뜨지 않은 밤하늘로.

귀속 아티팩트를 전체 해방하여 전개한 고유 필드다.

세상의 법칙이 바뀐다.

정결하고 경건해야 할 진홍색 사제복을 갖춘 사제들이 기꺼이 일곱 가지 죄악의 씨앗에 영혼을 더럽힌다. 하늘 높이 솟은 대성전의 첨탑에 화려한 별빛이 부서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초라하고 음습한 뒷골목의 밤으로 시체가 사라지고 황금이 주인을 잃는다. 죄악에 깊게 물든 동시에 세속적으로 더없이 유능한 종들의 종이 독이 든 반지를 낀다.

이곳은 이제 전선의 이상 없는 하루가 반복되던 던전이 아니었다. 가문과 일신의 영달을 위해 기꺼이 사용한 은밀한 독으로 지배되는 세상이었다.

‘이상 없는 하루’가 살포한 독은 필드의 법칙을 깨지 못했다. 은밀하며 절대적인 독과 부딪힌, 부패한 시독이 제 기능을 잃는다.

최진혁이 급격히 소진되는 마나에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나는 필드 유지 몇 분 못 해!”

“알고 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태성이 넘실거리는 하얀색 불길로 뒷골목에서 방황하는 시체들을 불태우며 빠르게 내달렸다.

그를 겨냥하던 ‘이상 없는 하루’의 포구들이 덜그럭거리며 정지했다. 부패한 성대로 기음을 흘리며 쏟아지던 시체의 폭포가 정지 화면처럼 일제히 멈춘다. 한 손을 앞으로 길게 뻗어 능력을 쓴 현규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끝내.”

“도움도 안 되면서 시끄러워!”

쓰러지는 시체 더미와 지붕을 밟으며 도약한 공태성이 양손으로 움켜잡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귀속 아티팩트가 일부 해방되며 칼날에 한 번의 싸움으로 떨어진 수만 명의 원혼과 살기가 맺히고, 귀곡성이 소름 끼치게 울렸다.

피를 토하듯 서리서리 맺힌 원념의 칼날은 ‘이상 없는 하루’를 단번에 양단했다. 양단하고 찢어발기고 가르고 베며 도륙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로 조각난 육편들이 바닥에 겹겹이 쌓일 무렵.

[던전의 보스 ‘이상 없는 하루’가 사망했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출력되었고, 마나를 쥐어짜며 가까스로 버티던 최진혁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깜빡한 순간 필드는 해제되고 던전은 겨울 숲이라는 본래의 풍경을 되찾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부유하던 인유신은 눈앞에 새로이 나타난 메시지를 당혹하여 바라보았다.

[각성자 공태성이 귀속 아티팩트 ‘동쪽에서 피어나는 접시꽃’을 일부 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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