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14)

“유신이 말이니까 무조건 동의하시는 건 아니죠?”

“그것도 그렇고요.”

인유신이 따끈따끈한 마시멜로의 끝부분을 떼서 먹고 남은 부분을 먹으라고 내밀었더니 현규하가 싱긋 웃었다.

“주인님. 아, 해 봐요.”

“네?”

“아.”

인유신은 뭔지도 모르면서 입을 작게 벌렸다.

그는 마시멜로를 떼더니 인유신의 입에 쏙 넣었고, 얼떨결에 손가락을 핥게 된 인유신은 뺨까지 빨개졌다. 혓바닥에 남은 단맛을 굴렸지만 살짝 스치고 지나간 손끝의 감촉이 훨씬 달다.

다행히 박승기는 친구 커플의 염장질을 무시하는 학구적인 대학원생이었다.

“평행 세계를 사제들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뭐 보통 이렇게들 나누는데 너무 단순해 보인단 말이죠.”

“정의야 학자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나는 크게 분류해서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신대(神代)가 이어지면서 과학 문명이 발전해도 여전히 신탁을 받고, 신의 이적이 현현하는 세계요. 이 던전 같은 곳이겠죠.”

“헌터님은 유신론자였어요?”

“신이 있어야 신성력도 있을 테니까요. 아까 그 사제처럼요.”

“오, 과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인유신은 남은 마시멜로를 얼른 입 속으로 넣었다. 뭉클하게 번지는 단맛이 감촉을 지워 주길 바랄 뿐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사는 세계요. 신의 힘은 존재하지 않고 종교도 맹신하지 않는 인간만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세 번째 분류는 반반?”

“맞아요. 종교가 중세를 지나면서도 계속 전파되어 우리나라에 곳곳마다 교회가 보이고, 유럽은 17세기가 되어서야 간신히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고, 세계 각지에는 극단적 종교 원리주의자들이 있고, 보편적 사회 윤리보다 국교로 지정한 종교의 해석이 더욱 중요하며, 유신 씨가 절이 아니라 성당 보육원에서 자랐을지도 모르는, 그럼에도 신을 접할 수 없기에 무교와 무신론자들이 공존하는, 그런 세계요.”

제 이야기가 나와서 마시멜로를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든 인유신은 생각하다가 끄덕거렸다.

“성당에서 자라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래도 역시 스님들과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더 좋아요. 아, 참. 승기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익명으로 보육원에 거액을 기부한 사람이 있다던데 너도 들었어?”

“어, 어. 안 그래도 건물이 많이 낡아서 고민이 많으셨는데 수리할 자금이 생겨서 잘됐지. 근데 헌터님이 말한 세 가지 분류 괜찮네요. 배경을 많이 관측한 경험자이셔서 그런가. 다듬어서 발표해 볼 생각 없으세요? 우리 교수님이 엄청 좋아하실 거 같은데요.”

“그런 귀찮은 짓을 왜요. 환영을 녹화해서 증거로 들이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썰 취급받고 말 게 뻔한데요.”

“아오, 증거가 안 남는 게 문제야.”

현실의 벽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전공자를 남기고 현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초 교대할 시간이라서 이만 가 볼게요. 가기 전에 주인님 얼굴만 보려고 했는데 대화가 길어졌군요.”

“아, 저도 같이 갈까요?”

“추우니까 그냥 있어요. 말만이라도 기분 좋네요.”

헐거워진 인유신의 목도리를 싸매 준 현규하는 마지막으로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상공으로 몸을 띄웠다. 아마 숲의 끝자락에서 경계를 서는 모양이었다. 게이트의 입구 근처에 직접 마수가 생성되지는 않아도, 생성된 마수가 접근하는 경우가 있으니.

현규하를 배웅하고 8세를 찾아 전진 기지를 둘러보며 걸었다.

기절했던 8세는 돌아와서 정신을 차렸고, 파우치에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을 발견한 최진혁은 탄성을 질렀다.

〈내가 저녁을 먹여 줘도 되겠나?〉

8세도 꺼리지 않아서 손바닥에 올려 줬으니 지금도 같이 있을 것이다. 전진 기지는 삼삼오오 모여 두런거리는 사람들로 은근히 소란스러웠다.

캠핑 쉘터의 화로 앞에 앉은 사람들 틈에서 최진혁을 발견했다. 같이 있는 사람은 나르샤 길드의 공태성과 한준수였다.

“송찬영 헌터님은요?”

“찬영이는 피곤하다고 일찍 자러 갔다. 힐러는 보초를 설 필요도 없는 귀하신 몸이니까.”

최진혁의 손바닥에서는 8세가 나뭇잎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찍!”

식사하는 도중에도 주인을 알아보고 면봉 같은 꼬리나마 뒤뚱뒤뚱 흔들며 인사했다. 반가움의 표시로 꼬리를 흔드는 동물은 개나 늑대겠지만, 이제 와서 별로 중요한 건 아닌 듯했다.

“던전의 식물은 미량이나마 마나가 깃들어 있어서 그런지 다른 음식보다 잘 먹더군.”

“그랬어요? 마나를 더 좋아하는지는 몰랐어요.”

인유신은 옆의 빈자리에 살짝 앉았다.

“저녁은 맛있게 잘 먹었어요?”

서글서글한 한준수에게도 목인사하고 휴대폰으로 딸 사진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공태성에게도 인사하려는데, 그를 본 순간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기이한 감각이 뇌를 훑으며 지나가는 느낌이 스친다.

“뵤오.”

쥐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면박 주는 현규하가 없으니 되는대로 울음소리를 내며 8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천천히 먹어.”

고개를 저으며 최진혁의 손바닥에 있는 8세의 등을 쓰다듬었다. 짧게 스친 감각은 곧 사라졌다. 착각이었나 보다. 던전 안이라서 신경이 예민해졌을 수도 있고.

“다 됐습니다, 길드장님.”

쇠를 연마하는 스킬을 갖고 있는지 기름 먹인 천으로 칼날을 잘 닦고 깨끗이 한 한준수가 칼을 내밀었다. 공태성이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넣으며 칼을 받았다.

가까이에서 그의 칼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일본도였다.

‘일본도 쓰시네. 일반 아티팩트인가?’

그냥 그 생각만 했을 뿐이었는데, 앞에 인유신이 있다는 걸 이제 눈치챈 공태성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내 귀속 아티팩트와 상성이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쓰는 거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앗, 네.”

정작 인유신은 별생각이 없었다. 하필이면 일본도란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왜도를 썼다는데 상황이 불가피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최진혁이 건수를 잡았다는 목소리로, 공태성에게 다 들리게 속닥거렸다.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표정인데 공태성 갈구는 일에는 활기가 도니 신기했다.

“토착왜구.”

“아니, 씨발. 돈 몇 푼 되지도 않는 던전 관광에 끌려온 내가 왜 욕을 처먹어야 하는 거지?”

“인유신, 저 인간 귀속 아티팩트가 뭔지 알고 있나?”

“헌터들의 아티팩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에도 없어서요.”

“야! 최진혁!”

“‘동쪽에서 피어나는 접시꽃’이라고 한다.”

의외였다.

“서정적이네요? 저번에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하셨을 때 칼에 살기가 맺히길래 전쟁터와 관련이 있는 줄 알았어요.”

“전쟁터와 관련 있는 거 맞아.”

공태성이 칼등으로 최진혁을 후려 패고 싶어 하는 얼굴이거나 말거나 그는 지껄였다.

“일본사를 알고 있다면 아마 이름은 들어 봤을 텐데, 저 토착왜구가 아티팩트를 획득한 던전이 세키가하라(도요토미 사후 벌어진 일본의 내전.)야.”

“아앗, 아. 그, 도쿠가와 가문이랑 도요토미 가문이 싸운 그거…….”

“젠장! 귀속템이라서 획득하기 전에는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럼 아티팩트를 버리고 오란 건가?! 다시 또 언제 얻게 될지도 모르는 유니크템을?!”

“던전이 왜놈 땅이라는 걸 눈치챘으면 알아서 파밍도 안 했어야지.”

“첫판에 먹었다고 몇 년을 말해! 네놈이 하도 지랄을 해서 길드 이름까지 순 한글로 바꿨다고!”

길드 이름이 우라노스에서 나르샤로 바뀐 비사도 알게 되었다.

익숙한 모습인지 한준수는 태연하게 다른 길드원들의 무기를 연마하고 있었다. 인유신은 무겁게 침음했다. 최진혁이 얼마나 갈궜으면 저 공태성이 제풀에 찔리기까지 할까.

“접시꽃이면 도쿠가와 가문의 문양이죠? 그나마 도쿠가와라서 다행이네요.”

“도요토미 걸 먹었으면 저 자식은 토왜도 아니고 그냥 매국노지.”

“귀속템을 해제할 방법이 있다면 당장 뜯어내서 갖다 버리고 싶은 건 나야!”

“그러니까 인유신, 너도 던전에서 아티팩트를 줍게 되거든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해라. 재수 없으면 저놈 꼴이 나니까.”

“저한테 그런 기회가 오기나 할까요? 로또 당첨될 확률이라면서요.”

“늦든 빠르든 현규하가 언젠가는 너한테 줄 거 같다만.”

인유신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일본에서는 길드장님 아티팩트를 엄청나게 탐내면서 침만 흘리고 있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와 일본의 중간 수역에 열렸다가 우리나라 던전으로 인정된 던전이었다. 그걸 나르샤가 낙찰했었는데 나중에 일본에서 알고 배 아파서 죽으려고 했다더군.”

그건 좀 꼬셨다. 공태성 혼자의 희생으로 일본 헌터계에 소소한 엿을 먹였으니 어쨌거나 잘된 거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되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르샤 길드장이라면 다른 세계의 인물이었는데.

어느새 동네 형처럼 만만하게, 아니 가깝게 여겨진다니 큰일이었다. 최진혁도, 이혜연도 현규하가 아니었다면 평생 말 한마디 섞지 않았겠지. 그로 인해 뻗어 나간 자신의 세계를 돌아보며 인유신은 씁쓸한 숨을 삼켰다.

하지만 인유신은 정말 ‘큰일’과 바로 내일 대면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텐트로 돌아오는 길은 최진혁이 배웅해 주었다. 딱히 위험한 일도 없는 전진 기지다. 아무래도 배웅은 핑계고 8세를 손바닥에 조금이라도 더 올려놓으려는 목적 같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우치 앞에 손을 내려 8세가 기어들어 가는 것까지 본 최진혁이 아쉬워하며 허리를 폈다.

“8세도 일종의 사역마니까 종종 회사에 데려와라. 기왕이면 나와 근무 시간이 같을 때.”

“얘도 바깥바람 쐬게 해 주면 좋을 거 같아요.”

“찍!”

“그건 그렇고……. 고민하는 문제라도 있나?”

“어, 저요?”

“표정이 대학 원서를 어디 넣을지 고민하던 동생이랑 똑같더군.”

“맞다. 동생분이 있다고 하셨죠.”

“너와 비슷한 나이의 녀석이 하나 있지.”

최진혁이 30대 중반이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형제인 것 같았다. 그가 한 손으로는 파우치에서 빼꼼 내민 8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에게서 드문 미소는, 동생에 대한 자랑스러움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나 혼자 키웠는데 비뚤어지지도 않고 잘 자랐어. 교대 근무에 연봉도 적지만 길드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맡으니까 공무 헌터가 된 거다. 동생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잖아.”

인유신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서 동의했다. 가족이 먼저 죽는다는 건, 정말 무섭고도 참혹한 일이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