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아요. 당신이 생각한 그건 이쪽 세계에도 있는 개념이지만, 세계가 인지하는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어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글자로도 쓰지 못합니다.”
그 말을 듣자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규하 씨랑 제 상태창의 깨진 글자도 그거 때문이에요?”
“그럼요. 상태창 보면 이전 던전과는 다른 게 보일 거예요.”
상태창을 확인하니 첫 번째 던전에서는 ‘¦°ø¾니ð’라고 어느 정도 드러났던 글자는 평소와 같이 전부 깨진 ‘¦°ø¾Îð’로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찾는 게 나오는 던전에서는 일부가 드러날 거고요.”
“아하…….”
뭐가 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현규하가 허리를 숙여 눈맞춤을 했다.
“뭘 찾는 건지 다시 안 물어봐요?”
“대답 안 해 줄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이라면 내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알려 주지 않겠다던 예전의 그와, 장난스레 시선을 맞추는 현재의 그.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버거워, 인유신은 묻지 않고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현규하는 재차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숲 바깥에는 눈 쌓인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성인 남성의 신장과 비슷한 깊이의 구덩이들이 몇 겹으로 길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끊어지면서도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구덩이들은 마치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공태성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지형이 안 좋군. 구덩이 아래에서 형성된 마수가 출몰하면 예측하기 어렵겠다. 최진혁, 빨리 저 쓸모없는 짐들을 뒤로 물려.”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최진혁도 군말 없이 각성자들을 숲 가까이로 물러가게 했다. 인유신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현규하를 돌아보았다. 많은 수의 시체를 보게 될 거라는 아까의 말에 더하여 구덩이들까지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규하 씨, 구덩이들이 혹시 참호인가요?”
질문에 답하듯, 환영이 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구현된 지옥도였다.
「우와아아!」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을 내지르며 전진하는 앳된 군인들을 향해 반대편 참호에서 기관총의 총알 세례와 대포의 포격을 쏟아 낸다. 많은 군인들이 참호 근처까지 도달하지도 못한 채 팔다리가 터졌고, 그보다 적은 수의 군인들이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갈기고 트렌치 클럽(참호전에서 쓰던 둔기.)으로 후려쳤다.
무수한 시체만을 남기고서 점령한 참호는, 바로 이튿날 도로 빼앗겨 겹겹이 시체만 더 쌓고서 후퇴했다. 참호 사이에 널브러진 피투성이 시체들 사이에서 수습되지 못하고 남겨진 부상자들이 쥐들에게 생살을 뜯기며 흐느꼈다.
콰앙! 쾅! 비행기의 폭격이 참호 속에서 허리를 웅크리고 허겁지겁 식사하던 군인의 상반신을 터트렸다. 격추당한 비행기가 추락하며 숲을 불태웠다.
극도의 공포로 인해 미쳐서 혼자 참호에서 뛰쳐나와 사방에 총을 난사하던 군인은 동료에게 죽었다. 쏟아진 폭우로 참호가 매몰되며 쪽잠을 자던 군인은 생매장당해 죽었다. 부상자가 되어 전선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스스로 팔을 자른 군인은 후방에서 파상풍으로 죽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비명과 가족을 찾는 절규가 피비린내 나는 포연에 섞여 요동쳤다. 단 1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주검을 디뎌야만 했던 지옥도였다.
“어, 이거……. 그…….”
상상 이상으로 생생한 환영에 압도된 박승기가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서부 전선, 같은데…….”
“뭐, 대충 비슷하겠죠. 그쪽 같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모습은 이다음에 나올 거예요.”
후방에서 구호품을 갖고 서슴없이 참호로 다가오는 일단의 의료진이 있었다. 개중 긴 튜닉을 간소화한 것과 비슷한 의복을 갖춘 여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촛불처럼 자그마하고 따스한 빛이 여자의 손을 따라 부상병에게 머물렀다. 동상으로 괴사하던 환부가 불완전하게나마 걸을 수 있을 만큼 나았다. 군인이 눈물을 흘리며 칭송했다.
「시로나시여!」
인유신은 눈을 깜빡거렸고, 박승기는 탄성을 질렀다.
“힐러! 아니, 지금까지 던전의 배경에서 각성자가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힐러는 아니겠고, 이거 그거죠? 드물게 나온다는 그거, 그거! 저도 처음 보는 광경인데요! 물론 환영을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 고찰은 나중에 하고요. 슬슬 마수들이 나올 타이밍이니까 그쪽은 뒤로 튀기나 해요.”
현규하는 잔뜩 흥분해서 주절거리는 박승기를 사이코키네시스로 들어서 안전한 후방으로 옮겨 놓았다. 물론 인유신과는 달리 섬세하게 조절하지 않았기에 떨어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던전이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길지 않은 몇 분 동안 대지가 품고 있던 짧지 않은 기억들이 농축되어 흐르던 던전에서 마수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또는 지루하게 기다리던 헌터들이 무기를 들었다.
또 뭔가 의견이 안 맞았는지 최진혁과 투닥거리던 공태성이 그를 긴 다리로 걷어차며 칼을 뽑았다. 하얀 불길이 맺힌 칼이 일행의 가장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현규하는 그냥, 인유신을 옆구리에 끼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대지가 질척했다. 자작나무 숲과는 다르게 참호에 쌓인 눈은 금세 녹아 땅을 갯벌처럼 만들었다.
“공태성이 쓸모 있을 때도 있네요.”
얕고 넓게 번진 하얀색 불길이 땅을 어느 정도 마르게 하지 않았다면 거동이 더욱 곤란했을 터였다.
헌터들이 사냥에 열중하는 동안 캠핑이 무산되면서 의욕도 상실한 현규하는 그냥 상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러면서도 비행 마수들도 잡고, 뒤쪽의 각성자들에게 접근하는 마수들도 잡으면서 제 몫은 하긴 했지만.
“와아, 길드장님도 역시 굉장하세요. 불길이 진짜 살아 있는 거 같아요.”
“안 굉장해요.”
잠깐 공태성을 칭찬하는 것 같았던 현규하는 인유신의 입에서 감탄이 나오자 순식간에 태도를 전환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쩐지 뾰로통하다.
‘……어째서 귀여워 보이지?’
멍하니 생각하던 인유신은 이어지는 한마디에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공태성은 혼자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아티팩트를 전체 해방해서 필드까지 구현해야 하지만, 나는 안 쓰고도 클리어할 수 있어요.”
“알죠, 알죠. 규하 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제가 다 봤죠.”
“그 던전에서 나온 게 허신이 아니었다면 팔도 아작 나지 않고 멀쩡했어요.”
“그럼요. 길드장님보다 규하 씨가 더 멋있어요.”
남들이 들으면 듣는 사람이 수치심을 느낄 만한 대화였지만 인유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현규하가 공태성보다 더 멋지고 대단하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제야 느슨하게 풀어진 현규하가 비행 마수 두 마리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추락하는 마수에게 깔릴 뻔한 공태성의 욕설을 무시하며 물었다.
“근데요, 주인님.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시끄러운데요?”
“저기 밑에서 싸우는 소리 말고, 그놈이요, 그놈.”
현규하의 손가락은 인유신의 옆구리에서 대롱거리는 파우치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몹시 조용했다.
설마 해서 내려다보았다.
“…….”
8세는 어느새 파우치에서 기절해 있었다.
“공태성보다 더 쓸모가 없군요.”
“…….”
이번만큼은 차마 8세를 두둔할 수가 없었다.
* * *
저녁이 되어도 던전의 시간은 여전히 해 질 녘에 머무르고 있었다. 교대로 팀을 짜서 사냥하던 헌터들은 전진 기지로 귀환했다. 중상자는 없었고 경상자도 송찬영의 치료로 회복했다.
초소형 던전이니 현규하가 의욕 없이 늘어져 있다고 해도 공태성과 더불어 바로 보스까지 사냥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 연수의 커리큘럼이 1박 2일인 탓에 필수적으로 하룻밤을 던전에서 보내야 했다.
“연수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여 놨는데 순삭하고 나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윗분이 만든 규칙 같구만.”
인유신도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
“솔직히 저녁 식사까지 캠핑 같더라.”
저녁은 챙겨 온 전투 식량에 더불어 사냥한 마수의 고기였다. 손질도 덜 되고 양념도 부족하니 바깥의 고깃집에서 먹는 것보다는 맛이 덜했지만 캠핑 분위기가 한몫했다. 등급이 낮은 각성자들에게 던전을 경험하게 하고 직업 선택의 폭을 넓혀 준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던전 소풍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박승기가 드론이 녹화한 영상을 돌려 보며 아까워했다.
“던전의 환영은 녹화가 안 된다는 게 진짜네. 이것 좀 봐.”
“환영을 볼 때는 되게 생생했는데 녹화된 거로 보니까 그냥 안개가 낀 거 같아. 왜 이런 거야?”
“뇌에 직접 자극을 줘서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도록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더라고. 환영을 보는 건 고작 몇 분인데, 환영으로 연출되는 시간은 수십 년일 때도 있잖아.”
이래저래 복잡한 얘기였다.
목격한 환영의 내용을 잊지 않도록 메모한 박승기가 태블릿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의 여자가 입은 옷이랑 비슷해 보여?”
“어, 대충.”
“가끔 그 여자처럼 신성력과 유사한 힐이나 능력을 쓰는 사람들이 나와. 신화 속 신의 이름을 빌리는 이들이어서 사제라고 추론하고 있어. 게이트를 나가서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군인들이 하던 말이 불어였으니까 ‘시로나’가 켈트 쪽 신이 아닌가 싶긴 한데…….”
연구와 관련된 내용이면 말이 많아지는 게 학자들의 공통점인가 보다. 그냥 앉아서 듣던 인유신은 이어지는 박승기의 말에 묘한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규칙성이 있는 차이를 보면 왜곡되거나 변질된 역사가 아니라 평행 세계라는 이론에 무게가 더 실린단 말이야.”
“평행 세계가 맞을 거야.”
그의 말엔 스스로가 놀랄 정도의 확신이 배어 있었다. 마치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직접 평행 세계라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 그냥, 그럴 거 같다고. 평행 세계라는 게 낭만도 있잖아.”
제풀에 움찔해서 인유신은 서둘러 말을 수습했다. 다행히 박승기는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너도 역시 아는구만. 그 낭만이 존나 중요하다니까. 헌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현규하가 와 있었다. 그는 양손에 들고 있던 구운 마시멜로를 두 사람에게 하나씩 건넸다. 정말 캠핑 같다.
“그렇게 생각해요.”
박승기의 말은 듣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던 현규하는 인유신의 설명을 듣고서야 제대로 대답했다.
“평행 세계 맞아요.”